악당 가족이 독립을 반대한다 1–

1. 시작은 파혼부터

7–9 minutes


다시 한번 말해 .”

, 아가씨…….”

뚫린 입으로 잘도 나불대더니, 막상 앞에서 말하라니까 닫는 저의가 뭐지? 나를 무시하는 거니?”

, 아닙니다!”

어느 눈부시게 찬란한 여름날. 앞에는 한여름인데도 겨울인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하녀들이 일렬로 있었다. 내가 지나가고 있는 알아채지 못하고 뒷담화를 했다는 이유로.

거면 몰래 것이지.’

저택의 사용인들이 나를 우습게 보고 업신여긴다는 알고 있었지만, 내심 알고 있는 것과 귀로 직접 듣는 차이가 컸다. 듣고도 그냥 넘어간다면, 이후로는 아예 대놓고 무시해 대겠지. 나는 매섭게 눈을 뜨며 하녀들을 노려보았다.

기회를 주겠어. 금방 했던 말을 다시 보렴.”

, 그게…….”

하겠어? 사생아 주제에 유세란 유세는 부린다고 했잖아. , 어쩌면 친딸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던가?”

일주일을 앓다가 오랜만에 외출한 것이라 나는 까탈스러웠다. 끝까지 하녀들이 입을 다물고 저들끼리 흘긋흘긋 쳐다보고 있자 결국 인내심이 닳았다.

꿇어.”

죄송합니다, 아가씨!”

꿇으라는 들리니?”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꿇으라니까!”

강제로 하녀들을 밀치려던 순간이었다. 감히 하녀 주제에 그들은 손길을 피하며 몸부림을 쳤고, 바람에 밀쳐진 것은 오히려 나였다. 그리고 순간.

‘-?’

몸이 기우뚱, 뒤로 기울었다. 놀란 얼굴로 오히려 뒤로 물러나는 하녀들 몇몇의 낯이 아주 느리게 보이고, 착용하고 다니던 펜던트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파삭. 엄마의 유일한 유품이 깨어지는 찰나였다. 순식간에 낯선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윤가을.”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잡아!”

그러다 죽는다고-!”

! ……후드득.

“……. 윤가을!”

파노라마처럼 밀려드는 기억의 파도 속에서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없이 지나가는 장면과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음성.

이게…… 뭐지?’

윤가을. 낯설고도 익숙한 이름과 함께 누군가 내게 다급하게 손을 뻗는 장면이 바로 지금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아무래도 죽기 직전의 기억인 모양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세계. 잠깐 혼란할 곧바로 머릿속에서 자리를 찾아가는 장면의 조각들. 그제야 나는 그것이 전생의 기억임을 깨달았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살던 윤가을은 21,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여 엘로디 페르디아로 다시 태어났다.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충격에 멍하게 앉아 있자 눈치를 보던 하녀들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아가씨! , 괜찮으세요?”

일부러 그런 아니라…… 제발 매질만은 참아 주세요!”

이러지 마시고 얼른 일어나셔야…….”

감히 내게 손을 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하녀들을 멀거니 올려다보던 얼굴에서 이내 핏기가 싸아악 빠져나가는 듯했다. 불현듯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가 떠오른 탓이었다.

“……망했다.”

? , 저희의 인생이요?”

망했어. 망했다고……!”

살려 주세요, 아가씨! 잘못했어요!”

끄아아악! 주변에 하녀들이 있든 말든 나는 괴로워하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랬다. 이곳은 세상이었다. 그리고 미래는 암흑이 예정되어 있었고!  

  *** 엘로디 페르디아. 페르디아 공작가의 유일한 딸이자 사생아인 엘로디는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온갖 성질이란 성질은 부리는, 한마디로 고구마 유발 밉상 캐릭터였다. 엘로디가 어떤 패악을 부리고 다녀도 가족들은 신경도 쓰지 않기에 그녀의 성격은 나날이 괴팍해져만 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몸이 약한 편이라 바깥에 나돌지 못하고 주로 집안의 사용인들만 괴롭혔다는 것일까. 내가 읽었던 소설의 제목은 바로 <악당 가문의 입양 딸이 사랑받는 >이었다. 제목 입양 딸이 나냐고?

아니죠.’

안타깝게도 원작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에스텔 페르디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페르디아 가문에 입양되었지만 햇살 여주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오빠와 아빠, 엄마까지 함락시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그야말로 힐링 로맨스 판타지의 정석이었다. 속에서 엘로디는 작중에서 언니를 괴롭히다가 발각당해서 죽게 되는…… 악녀 …… 아니야, 그냥 조연 악역 정도였다. 충격적인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진짜 딸도 아니라는 거지…….’

사생아란 자고로 반쪽은 피가 섞여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하지만 엘로디는 페르디아 공작의 친딸이 아니었다. 그녀의 생모가 친딸이라고 속였던 것이다. 에휴. 테이블에 앉은 턱을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친엄마.’

전생의 기억이 없는 채로 살아왔던 나는 줄곧 친엄마를 마음속으로 원망했다. 그도 그럴 자식을 아버지에게 받고 팔아넘겼다는 엄마를 어떻게 그리워할 있겠냐고. 페르디아 공작가에서 친모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금기였다. 아버지가 친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탓에 나는 크면서 친엄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자라났다. 아주 어릴 하녀들이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몰래 훔쳐 들어 아는 전부였다.

아르셀리아? 그년은 운도 좋지. 하룻밤으로 좋게 임신해서 단단히 챙겼으니 말이야.”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런데 여자,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난들 아나. 외국으로 튀었다는 말도 있고.”

어쨌든 떵떵거리면서 살겠지.”

대화 속에서 알게 엄마가 나를 아버지에게 팔아넘기고 떠났다는 것과 아르셀리아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 가지였다. 원작에서도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내가 아닌 에스텔이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다만 진짜 아빠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 있었다. 나중에 내가 죽게 되는 이유 중에는, 페르디아 공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도 있었으니까.

많고 많은 소설 중에 하필 소설에 빙의한 거야?”

빙의라기엔 세계에서 태어나 중간에 기억을 되찾은 셈이니 환생이 맞을지도. 기억을 되찾은 벌써 며칠이 흐른 지금. 무려 뜻밖의 출생의 비밀을 알아 버린 데다 전생의 기억까지 번에 나를 덮치는 바람에 상황을 이해하는 사실 쉽지만은 않았다. 모두 꿈일 거라고 모든 것을 부정해 보기도 했고, 그러다 아직 겪지 않은 죽음을 악몽으로 꾸기도 했다. 하지만 생생한 기억이 망상일 리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던 윤가을의 삶과, 동시에 떠오른 속에서의 이야기들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결말은 여지없이 죽음이었다.

살아남아야 .’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패악질을 부린 과거가 바뀌지 않았다. 원작에서는 엘로디가 패악을 부리던 이유가 나와 있지 않았지만, 모든 과거를 직접 행한 나는 이유를 알았다. 가족들은 내게 무심했고, 태도에 사용인들은 쑥덕거리며 나를 홀대했다. 페르디아 가문의 하나뿐인 공녀로서 잔뜩 날을 세우고 밖으로 분노를 표출해야만 말을 듣는 시늉을 했다. 그래야만 나는 페르디아의 공녀로서 긍지를 지킬 있었다. 서로에게 관심 없는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자기방어였다고는 하지만, 이유가 면죄부가 수는 없었다. 이상 그렇게 수는 없었다.

이제 패악 부리는 그만둬야 .’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사고방식과 고집을 버리고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박살이 버린 펜던트를 내려다보았다. 엄마가 두고 갔다는 펜던트는 다섯 생일, 페르디아 공작이 내게 넘겨준 것이었다. 하나 없는 공작저에서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공작가의 레이디니 어느 정도 가진 재산이 있겠거니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땡전 없었다. 무분별한 소비? 가능하다. 사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가주의 허락하에 이루어지고 있었고, 드레스나 보석 따위의 처분마저도 집사를 통해 보고가 들어갔다. 쓰듯 있는 가문의 재산 개인 재산은 어느 것도 없다는 말이었다. 하나 있던 엄마의 유품마저도 박살이 버렸으니 이제 진짜 빈털터리였다.

독립하려면 돈이 있어야 .’

바라지는 않았다. 수도 솜니아 교외의 하나 거실 하나 욕실 하나 있는 아담한 크기의 . 그리고 평생 놀고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을 정도의 . 참고로 사치까지는 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의 나는 이전의 엘로디가 아니니까. 정도면 충분할 같은데!

으음. 너무 많은 바라는 걸까……?’

, 하지만 일하지 않는 백수는 모든 이들의 꿈이니까! 책에서 읽기로 내가 방울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이라는 밝혀지는 , 언니인 에스텔이 가문에 입양된 이후였다. 지금 나이는 성년식을 1 앞둔 19살이었다. 입양까지 앞으로 3. 그전까지 쥐죽은 가만히 있다가 돈을 모아서 독립하는 나의 우선 목표였다. 이미 독립해서 떠난 마당에 친딸이니 아니니 따지고 들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죽음 엔딩은 피할 있겠지. 물론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미래가 바뀌도록 노력을 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러려면 우선…….’

무엇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때, 마침 전속 하녀 마사가 침실로 들어왔다.

아가씨. 서신이 도착했어요.”

누가 보냈니?”

마사가 활짝 웃으며 서신이 담긴 쟁반을 내밀었다.

황자 전하께서요.”

1황자 아덴미르 프레실 윌렌트. 현재 약혼자이자 훗날 언니 에스텔이 입양되는 원인인 남자였다. 속에서 1황자가 엘로디의 평판을 지적하며 파혼을 거론하자, 페르디아 공작 입장에서도 정치적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대안을 모색했다. 이에 대한 대안이 언니 에스텔을 입양하는 것이었다.

입양 딸이나 사생아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한 걸까?’

전적으로 1황자와의 약혼은 이전의 내가 원했기에 성사되었다.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인 그가 황제가 된다면, 그와 결혼하게 나를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더구나 1황자는 눈부신 은발과 진한 녹안을 가진 엄청난 미남이었다. 눈부신 외모와 건장한 체격 또한 취향이었으니 탐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1황자가 나를 대하던 태도는 약혼녀를 대하듯 정중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나 그의 옆에 서기를 꿈꿨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정말 힘들게 성사된 약혼이었지.’

하지만 아무리 힘들게 성사되었다고 한들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일까. 애초에 1황자는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언니가 나타나면 한눈에 반할 뻔했다. 내가 싫다는 남자에게 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평판을 이유로 파혼을 요구할 거라면, 서로 번거롭지 않게 가는 좋지 않겠어? 에스텔이 보육원에 오게 되는 입양되기 1 전이니까, 지금 파혼한다고 해서 에스텔이 먼저 오게 일도 없겠지. 쟁반 서신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빙긋 미소 지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섰다. 우선 번째.

약혼자에게서 떨어지자!’

*** 윌렌티아 제국의 수도 솜니아. 수도 근방 어디에서도 보이는 가장 높게 솟은 탑을 자랑하는 그곳은 바로 지고한 제국의 황성이었다. 1황자 아덴미르는 집무 잠깐 휴식을 취하기 위해 서류를 뒤로 밀어놓았다. 피곤한지 낯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의 외모는 오히려 나른하고 섹시한 매력이 더해졌다. 아덴미르는 다소 짜증 어린 음성으로 서류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로드리고 앙겔로스로군.”

윌렌티아 제국에는 건국 초기부터 함께해 4개의 가문이 있었다. 앙겔로스, 세베레스, 크룬델, 그리고 페르디아. 그중 공격적인 투자로 상업에 두각을 나타내는 앙겔로스 공작가는 사사건건 사건을 일으키곤 했다. 주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벌어지는 사건이 대부분이었다.

이번에도 당근을 주는 어물쩍 넘어가면 듯하고.’

사실 앙겔로스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가문은 따로 있었다. 페르디아 공작가. 페르디아는 제국 암시장과 경매장, 도박장 어두운 거래가 오가는 모든 음지를 소유한 암흑가의 주인이었다. 크게는 군수 물자를 황가에 납품하거나 제국 굵직한 광산을 소유하기도 했다. 인간 같지 않은 외모를 가진 그들은 자비 없는 손속으로 제국민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악당 가문이라 불릴 정도였다. 가문을 떠올리자 자연히 자신의 약혼녀가 떠올랐다. 제국민이라면 엘로디 페르디아에 대해 모르는 자가 없었다. 가장 먼저 손꼽히는 것은 천사처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외양이었다. 언뜻 은색으로도 보일 정도로 옅은 금색의 머리칼과 개화한 봄꽃처럼 선명한 분홍색의 눈동자는 감히 누군가와 비할 없을 정도로 찬란한 외모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유명한 것은 바로…… 엘로디의 성질머리였다. 강아지처럼 순한 외모와 다르게 입만 열었다 하면 폭언을 내뱉는 데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는 것은 부지기수. 감히 페르디아 가문과 대적할 용기가 있는 자가 있을 없으니 그녀를 말릴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황자인 내게까지 막말을 내뱉을 정도니 했지.’

싫든 좋든 개인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역할에는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아덴미르의 생각이었다. 비록 약혼녀가 머리가 텅텅 비고 신경질적인 성질 더러운 여자라고 해도. 그러나 언젠가 자신이 황위에 올라 황제가 된다면, 그와 결혼할 여자는 황후가 텐데, 과연 자리에 여자가 어울리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열릴 황제의 탄신 연회 관련하여 논의할 것이 있으니 언제쯤 페르디아 가문으로 가도 좋겠냐는 서신을 보낸 있었다.

때가 되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마침 시종이 집무실 안에 들어섰다.

전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서신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엘로디 페르디아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덴미르는 당연히 시간이 적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서신을 펼쳤다. 그러나 서신 내용은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안타깝지만 황자 전하께 시간을 내어드릴 없을 듯합니다.] 웬일일까. 가벼운 의문과 함께 그는 아랫줄을 읽었다. [동봉한 서류에 서명하여 대신 제출해 주시겠어요?]

서류?”

말에 시종이 서신과 겹쳐 있던 서류를 가리켰다. 서류를 펼쳐 아덴미르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파혼서. 의심의 여지 없는 파혼서였다. 엘로디의 자필 서명이 아주 꼼꼼하게도 적혀 있는. . 아덴미르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무슨 수작이지?’


 

2. 어차피 진짜 가족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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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한고비 넘겼다.”

파혼 서류도 보냈겠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날 하루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바람에 충격받은 나를 진정시키는 힐링 타임을 여유롭게 가졌다. 따뜻한 물을 받아 목욕도 하고, 달콤한 디저트도 즐기면서. 이상 남에게 관심받거나 인정받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되레 마음이 편해졌다. 가족들 눈치 보느라 그들 앞에서는 얌전히 있다가, 사생아인 나를 무시하는 사용인들에게 패악을 부릴 일도 없겠지. 나에 대해 떠들어 대는 사교계 호사가들의 이야기에 신경 쓰며 몰래 울지 않아도 . 남들처럼 평범하게 없는지 의심하지 않아도 되고.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래. 이제부터는 똑똑하게 살아 보는 거야.’

돈만 생기면, 집구석 뜬다……! 그러나 그런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사건은 다음 벌어졌다.

아가씨. 가주께서 부르십니다.”

무려 무거운 데다 오직 아버지에게만 충성을 다하기로 유명한 저택의 집사가 친히 나를 찾아와 이른 것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용건을 가지고.

아버지께서? 지금?”

. 지금 당장 오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집사를 따라나설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그렇게 기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무서워.’

갓난아이였던 내가 저택에 맡겨져 자라는 동안, 나는 번도 아버지의 앞에서 긴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이런 집안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히 눈치가 빨라지게 되어 있다. 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을 떼기도 전에 알아챘다. 엄마의 이야기를 꺼낼 수조차 없는 가문의 분위기.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삭막한 . 그런 무관심 속에서 나는 오로지 유모의 손길로만 자랐다. 아마 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내가 원치 않게 태어난 사생아라 그런 거겠지. 존재가 가문의 오점일 테니까.

그렇게 싫어하던 내가 사실 사생아도 아닌, 다른 남자의 딸이라는 알게 되면 끝장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 잠자코 기다리던 집사가 점잖게 재촉했다.

아가씨. 모쪼록 서둘러 주십시오.”

알겠어.”

어째서 나를 부른 걸까? 지은 죄가 많은 몸이라 때문인지 쉽게 짐작되지 않았다. 나는 집사의 뒤를 따르며 대체 무슨 일일지 생각에 골몰히 잠겼다. 전생을 떠올린 이후로는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느라 침실 안에 박혀 있었지만, 바로 직전에만 해도 사고를 치지 않았던가.

역시 하녀들이랑 대거리한 때문일까?’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일들로는 호출한 없었는데. 사교계에 가서 다른 가문 영식들의 머리채를 쥐어뜯었을 때도 아무 않던 페르디아 공작이었다. 애초에 나를 포함한 자식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얼굴을 일은 거의 없었다. 달에 가지는 가족 식사 자리 정도? 그것도 거의 형식적인 의미였다. 워낙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가족 구성원이라 가끔 살아 있음을 서로에게 알리는 생존 보고 같은 시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나와 아들을 대하는 무관심에는 차이가 있었다. 애초에 그들과 나는 살고 있는 장소부터 달랐다. 처음 이곳에 맡겨졌을 때부터 별채에 거주하는 나와, 본채에 거주하는 아들. 가끔 집무실에 불러 가문 일에 대해 의논하는 그들과 달리, 부르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인 . 그런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노력했던 때가 있었지만 돌아오는 차가운 시선과 침묵이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만 봤을 뿐인데, 눈빛이 그렇게도 서러웠었다.

그런데 나를 부른 거지?’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지금, 앞으로 어떻게 스토리가 흘러갈 건지 알고 있기 때문에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무서웠다.

주인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

나는 집무실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다소 초조한 기분으로.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서서히 내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내리깐 서류를 보고 있는 남자. 미남자가 바로 아버지 실베스터 페르디아였다. 페르디아 공작가의 가주이자 암흑가를 지배하는 어둠의 황제라고 불리는 강대한 권력의 소유자. 이내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창가를 뚫고 들어온 햇빛마저 모조리 흡수해 물들일 흑암한 머리칼과, 옭아맬 선명한 금빛의 눈동자.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시선은 마치 맹수를 연상시켰다. -.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긴장한 기색을 애써 지우며 집무 책상 앞에 가서 섰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페르디아 공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엘로디 페르디아.”

이름이 불리자마자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나는 이미 옴짝달싹할 없는 신세였다.

.”

사고를 쳤더군.”

덤덤히 사실을 말하는 공작의 음성에는 어떤 유감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냥 말하는 것뿐.

왔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최근 들어 가장 크게 소란을 피운 어제 하녀들과 대거리한 사건이었다. 사건이 공작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외쳤다.

죄송합니다!”

“……?”

잘못했어요!”

엘로디 페르디아.”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

이름하여 사과 3연타. 자고로 상대방이 이렇게 용서를 먼저 구해 버리면 말이 없어지는 . 정말로 수법이 먹혔는지 그토록 냉철하던 공작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성공한 건가?’

최소한 화가 같지는 않으니 아닐까. 그렇게 희망 회로를 열심히 돌리고 있을 , 다시금 표정을 굳힌 공작이 미간을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1황자에게 연락을 받았다. 네가 황자에게 파혼을 요구했다던데.”

? 그건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 . 하녀들이랑 싸운 이야기인 알았네. 파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탓에 이유로 호출될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딱히 신경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에 대해서 딱히 관심이 없으니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심상치 않은 공작의 기색에 다시 바짝 긴장했다.

아차차.’

아무래도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는 바람에 간도 커진 모양이었다. 무려 페르디아 공작을 앞에 두고 긴장을 풀다니. 나는 다시금 잔뜩 긴장한 몸을 움츠렸다. 어처구니없다는 나를 쳐다보던 공작의 표정이 싸늘히 굳었다.

그동안 네가 가문 내에서 무슨 짓을 벌이든 눈감아 주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번 건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

“…….”

네가 원해서 약혼이 아니던가?”

그랬다. 그때의 1황자와 약혼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황가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페르디아 공작을 조르고 졸라 약혼을 성사시켰다. 누구도 나를 사생아라며 힐난하고 무시하지 못하게, 강한 권력을 가지고 싶었으니까. 황자비, 나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면 누구도 나를 비웃지 못하겠지. 그토록 무시하던 사생아를 황후라고 부르는 굴욕을 맛보게 하고 싶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게 멸망으로 가는 최단루트인 알았다면 그랬을 거라고……!’

나는 공작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분명 약혼할 반대하신 걸로 기억해요. 그러니 약혼을 깨더라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상황이 달라졌다.”

현재 윌렌티아 제국의 황위 후계 후보는 명이었다. 황후 소생의 1황자 아덴미르 프레실 윌렌트와 황비 소생의 2황자 벨트란 로크 윌렌트. 나와 약혼한 것은 페르디아가 암묵적으로 1황자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원작을 떠올렸을 , 나와 1황자가 파혼하게 되자 자리에 대신 밀어 넣기 위해 언니를 입양할 정도니 공작의 말은 진실일 .

파혼은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알겠어요.”

내가 덤덤히 순응하자 공작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맹세코 딸을 바라보는 눈은 아니었다. 눈앞의 상대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간파하려는 눈빛일 . 나는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렇듯 공작의 눈을 피했다.

역시 파혼은 쉽지 않구나.’

1황자가 내가 아닌 공작에게 연락을 취했을 줄이야. 상당히 의아한 일이었다. 당연히 옳다구나, 하면서 파혼서에 서명해서 제출할 알았는데. 그도 그럴 1황자 아덴미르는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황제가 되기 위해 페르디아의 권력만 탐했던 사람이라, 나를 정말 약혼자로만 대했다. 반면 전생을 떠올리기 이전의 나는 남자에게 조금 호감이 있었다.

잘생겼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잘생겼다고 한들 얼굴 뜯어먹고 것도 아니고, 파멸할 미래를 피하는 우선이지. 어쨌든 아덴미르가 싫어하는 확실하니 아무래도 상대방 쪽에서 먼저 파혼을 요구하도록 유도하는 좋을 듯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 페르디아 공작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손을 저었다.

당분간 근신이다. 돌아가서 반성해라, 엘로디 페르디아.”

생각보다 가벼운 벌에 놀랐다. 반성하지 않았다고 벌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밖으로 나가려 몸을 돌리던 찰나, 나를 응시하는 공작의 표정을 보았다. 왜일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인데, 착각일까? 결국 나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직접 물어보고 말았다.

혹시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니. 돌아가라.”

말에 집무실을 나서면서도 의구심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정말로 말이 있는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머지않아 , 문이 굳게 닫혔다. *** 훌륭한 근신 라이프를 수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침실로 향하던 때였다. 재수 없게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안녕, 리리.”

오라버니인 얀시 페르디아와.

?”

남동생인 카를로트 페르디아였다. 복도의 끝에 있는 페르디아 공작의 집무실뿐이니, 아마 사람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뵙고 오는 길인가 . 듣자 하니 1황자에게 파혼 요청했다던데, 정말이야?”

얀시가 평소와 같이 애칭을 부르며 다정한 음색으로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또한 그를 따라 옅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경계했다. 페르디아 공작을 닮은 흑발에 공작부인의 벽안을 물려받은 얀시 페르디아. 페르디아 공작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생글생글 웃고 있어서, 젊은 공작이 웃으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페르디아 공작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얀시는 가문의 권능 또한 가장 강력하게 구사했다. ‘파괴 페르디아. 그중 얀시가 가진 권능은소멸’. 생명에게는 치명상을, 무생물은 그대로 사라지게 만들 있는 소멸의 권능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힘이었다. 그에 반해 온화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지만 상냥한 껍데기에 속으면 된다. 얀시는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애칭을 부르며 스스럼없이 안부를 물었다. 덕분에 얀시만큼은 가문에서 유일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나를 노려보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한 이후로 나는 내가 착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었지. 이번에 기억이 돌아오면서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얀시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겉과 속이 다른 인간.’

속에서 얀시의 심리묘사가 일부 나와 있었는데, 내가 느끼던 것과 같았다. 그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철저한 계산으로 사람을 대하며, 때에 따라서는 철저히 짓밟을 있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다. 내가 웃을 대답을 하지 않자 바로 옆에 있던 카를로트가 빈정거리며 한마디 했다.

파혼 요청이 아니라 1황자한테 파혼당한 거겠지.”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칼에, 금빛 눈동자를 지닌 카를로트는 대놓고 나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나보다 2 어린 동생이었지만, 번도 누님이라고 부른 없었다. 그뿐인가. 어릴 때는 이름 대신, 사생아라고 부르기도 했지. 머리가 조금 자란 지금은사생아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그게 친부 얼굴에 먹칠하는 거라는 자각이 생긴 건지, 뭔지.

저게 조금 나아진 거라니…….’

통탄할 노릇일세. 굳이 비교하자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얀시보다는 대놓고 나를 싫어하는 카를로트가 대하기 편한 편이었다. 가족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들 앞에서는 얌전하게 구는 내가 유일하게 맞서는 상대기도 했다. 눈앞의 사람은 친모인 공작부인과 친부 페르디아 공작의 외모 특징을 하나씩 빼다 박은, 누가 봐도 페르디아 가문의 직계들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동떨어져 있었다.

피가 방울도 섞였으니 당연한 거였는데.’

옛날에는 사실이 무척 서러웠지만, 진실을 알게 지금은 아무 감흥이 없었다.

맞아요. 아버지와 대화하고 나오는 길이에요.”

얀시를 보며 대답하자 순식간에 무시당한 카를로트가 나를 노려보는 느껴졌다.

흥이다.’

나는 카를로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얀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많이 혼났어?”

그냥 근신으로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를로트가 끼어들었다.

. 좋다.”

명백한 도발이었지만 나는 가볍게 카를로트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끝났어요.”

근신이라니, 힘들겠네.”

어차피 최근에는 계속 침실에만 있었는걸요. 괜찮아요.”

그래. 힘내, 리리. 필요한 있으면 내게 말하고.”

얀시가 부드럽게 웃으며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카를로트가 나를 더욱 죽일 노려보았다.

필요한 있으면 혼자 해결해. 우리 형한테 껄떡대지 말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적의. 따위는 결코 우리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없다는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보다 못한 얀시가 결국 한마디 했다.

그래, 카를. 가족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가아조옥?”

카를로트가 비아냥거리며 되물었지만 얀시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사랑스러운 동생들인걸.”

거짓말.’

밖으로는 상냥하고 다정하게 웃어 주지만, 사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그런 남자였다.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교활한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히 카를로트는 질색하며 팔짝 뛰었다.

. 미친 거야? ‘저거 내가 같다고?”

사생아인 나는 가족 취급도 하지 않는 카를로트는 믿을 없다는 있는 대로 표정을 구겼다. 불과 하루 전의 나였다면 상처받아 까칠하게 굴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어때? 어차피 진짜 가족도 아닌데!’

그래서 오히려 카를로트의 속이 뒤집히도록, 평소보다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오라버니. 그리고 카를.”

그런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의미심장한 눈으로 얀시가 나를 쳐다보았다.

우웩.”

카를로트는 고개를 비틀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싸가지.’

나는 혀를 쯧쯧 차며 몸을 돌렸다. 상대하기도 귀찮았다.

됐어.’

하루라도 빨리 집에서 독립해야지. 그럼 꼴은 보지 않아도 되잖아? 필요 없었다. 외부에서는 사생아일지언정 페르디아의 하나밖에 없는 영애라고 떠받들지만 사실 속으로는 곪을 대로 곪은 집안 같은 .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3. 엘로디 페르디아가 변했다

6–7 minutes


평소라면 달려들어 카를로트와 붙었을 엘로디가 어째서인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훌쩍 떠났다. 심지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페르디아 형제는 덩그러니 남아 엘로디가 사라진 복도를 가만히 응시했다. 먼저 입을 것은 카를로트였다.

.”

?”

이상하지 않아?”

얀시가 옅게 미소 지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히 심통이 카를로트가 표정을 구겼다.

재미없어, .”

엘로디에 한해서 줄곧 호전적인 카를로트의 태도에 결국 얀시가 짐짓 타이르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카를.”

형도 딱히 쟤를 동생으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잖아.”

“…….”

정도는 알아. 쟤도 알걸?”

겉으로는 친절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 완벽한 타인을 대하는 것과 다를 없다. 특히 얀시는 처음 신생아이던 엘로디가 처음 가문에 모습을 드러낸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어느 , 아르셀리아라는 여자를 별채에 들인 페르디아 공작이 무심하게 말했다.  

엘로디 페르디아.”

“…….”

동생이다.”

  정부라느니 노예라느니 소문이 무성했지만 페르디아 공작은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어머니가 화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저택은 고요했다. 며칠 여자는 홀연히 사라졌지만 아기는 저택에 남았다. 징그럽도록 울음을 터트리는 낯선 아기에게 애정을 느낄 리가. 얀시에게 그녀는 영원한 이방인일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친동생인 카를로트도 그리 애틋하게 생각하는 아니었지만, 같은 가문의, 한배에서 태어난 가족이라는 소속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진짜 이상해. 잘못 먹었나?”

여전히 미심쩍은지 카를로트가 인상을 구긴 투덜거렸다.

어지간히 관심이 많네. 엘로디 페르디아에게.’

본디 페르디아 가문의 혈족들이란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지독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카를로트는 페르디아답지 않은 편이었다. 얀시 또한 평소 같지 않던 엘로디의 차분한 모습을 떠올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날뛰는 엘로디 같지 않았다.

그래. ……이상하네.”

그것만은 확실히 단언할 있었다. 변했다. 엘로디 페르디아가.

  *** 옛날, 지상을 파멸로 몰아넣던 7 죄악이 있었다. 교만, 음욕, 시기, 분노, 식탐, 나태, 탐욕. 그것들은 대륙을 망가뜨렸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늘과 땅까지 탐낸 저승의 여신, 이르칼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세상이 형편없이 망가지기 시작하자 결국 이르칼라의 동생이자 하늘과 땅의 여신인 이슈타르가 나섰다. 그녀는 7명의 인간에게 자신의 권능을 나눠 주어 각각 7 죄악을 봉인하도록 했다. 교전 끝에 인간들은 승리했으며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죄악을 봉인한 영웅들은 7개의 가문을 세웠고, 이것이 윌렌티아의 건국신화가 되었다. 7개의 가문은 세월이 흐르면서 5개의 가문만이 남았고, 중앙의 황가 윌렌트와 개국공신인 4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내가 몸담은 가문인 페르디아 가문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고리타분한 신화에 대해 떠올린 것은, 신화가 밥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놈의 권능!’

신화가 정말 사실이었는지, 황가와 4 가문의 ·방계는 신의 권능을 사용할 있었다. 5 전후로 발현되는 권능이 나에게는 나타나지 않을까, 사생아라 그런 걸까, 슬퍼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 이유가 있었던 거였다니. 페르디아의 핏줄이 아닌 내게 파괴 속성 권능이 발현할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나는 권능을 사용할 없냐고? 페르디아의 피가 방울도 섞였으니까?

아니.’

내게는 다른 권능이 있었다. 무려 다른 가문의 직계 권능이. 친부가 바로…… 세베레스 공작가의 가주 리하르트 세베레스였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베레스 공작은 혼수상태로, 현재 부재 상태였다.

좋다 말았네.’

세베레스 공작이 결혼도 하지 않고 후계도 없던 탓에 가주의 일은 가주 대리가 대신 처리하는 중이라고 풍문으로 들었다.

. 하필 친부가 혼수상태일 뭐람…….”

그럼 이렇게 열심히 살아남을 궁리도 해도 됐을 텐데. 불쌍한 인생. 몸에 흐르는 세베레스 가문의 . 세베레스 가문의 속성 권능은정화였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을 , 원작에 권능이 무엇인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원작 여주 에스텔을 처리하기 위해 악독한 수를 꾸미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하는 장면에서 엘로디가 무의식중에 권능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 사생아가 아니라는 들키고 가문에서 제명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지. 중요한 , 능력이 세베레스 가문의 권능이라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써먹을 있을 같다는 사실이었다. 원작에서 권능이 원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내게도 권능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도 권능이 있었다니.’

권능만 발현된다면 페르디아의 사람으로서 가족들의 인정을 받을 있을 거라고 믿고 5살이 되는 날부터 밤마다 모아 기도하며 잠들기도 했었다. 물론 가문의 일원으로서 인정이고 뭐고 이제 부질없지만, 그래도 간절히 바랐던 마음이 남아 있는지 정말 기뻤다. 며칠 전생의 기억이 찾아왔을 시험 삼아 권능을 사용해 결과 능력이 진짜라는 확인한 후로 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 능력으로 어떻게 돈을 벌지?”

고민에 빠진 나는 턱을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무언가가 있었다. 후원에 가득 휘황찬란한 꽃과 풀들. 바로 공작 부인의 독초밭이었다. 테미스 페르디아. 공작 부인은 대륙에서 제일가는 독제사였다. 음지에서 유통되는 5할이 부인이 개발한 것들이었다. 그런 부인의 수입원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독제였다. 독을 쓰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독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황성에서는 암시장에 독을 유통하는 공작 부인을 눈엣가시로 여기지만, 페르디아의 권위 아래 있는 부인에게 손대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황성에서 공작 부인의 신경을 건드린 일이 있었는데.’

순간 어떤 신문 헤드라인이 머릿속을 스쳤다. [페르디아의 해충 박멸 . 사실 정적 제거용 극독?] 해충을 박멸하는 탁월한 효과가 있는 공작부인의 살충제가 시장에 풀리자마자 황실에서 수거령을 내렸다는 기사였다. 해충에게도 치명적인 만큼 인간도 예외는 아니라, 해독제 없는 독을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났다며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최근 해충이 기승을 부려 대륙에 흉작의 그늘이 드리우자, 이번에는 나름 대의를 위해 살충제를 개발했던 공작 부인의 선의가 무참히 짓밟혔다. 탓에 신제품의 출시가 완전히 망해 버린 공작부인의 기분은 저조한 상태였다. 황성에서는 살충제를 다시 시장에 유통하려면 해독제를 개발하라며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해독제를 그렇게 빨리 개발할 있을 리가 없었다. 머릿속이 팽팽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 해독제. 그리고…… 권능.

?’

잠깐만.

이거, 되겠는데?”

기막힌 돈벌이가 생각나 버렸다! *** 나는 곧바로 작전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일은 나의 전속 하녀인 마사를 호출하는 것이었다. 마사는 저택에서 유일하게 이라고 부를 있는 사람이었다. 방치되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갓난아기인 나를 맡아 길러 유모의 딸이기도 했다. 같은 또래인 마사는 하녀지만 친구 같은 존재였고,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들에겐 악랄하게 굴어도 유독 그녀에게는 약했다.

무슨 일이세요, 아가씨?”

마사.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외출은 돼요. 근신 중이시잖아요.”

예전에도 근신을 받은 마음대로 나간 화려한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노심초사하는 얼굴이었다. 나에 대한 마사의 믿음이 얼마나 바닥인지 있는 적나라한 반응이 아닐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야.”

다행히도 외출은 아니군요. 그럼 뭔가요?”

내가 작게 손짓하자 불안한 얼굴로 마사가 귀를 주었다. 소곤소곤. 귓속말이 이어질수록 마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그건 하러요?!”

당연히 된다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번에 화를 줄이야.

데가 있어.”

돼요. 너무 위험해요. 무슨 짓을 하시려고요!”

마사.”

돼요.”

마사가 짐짓 단호한 어조로 잘라 거절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사아-.”

되는데…….”

부탁할게. ?”

내가 마사에게 약한 것만큼 나에게 약한 마사는 나의 거듭된 부탁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정말로 위험한 벌이시면 돼요.”

알았어!”

호언장담에 결국 넘어가는 마사를 보면서 속으로 고해성사했다.

미안, 마사. 약속은 지킬 같아.’

위험한 짓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 ……내가 하려는 일은 위험 부담이 테니까. . . . 이틀 . 우여곡절 끝에 모든 준비를 끝마친 나는 준비물을 들고 대망의 발걸음을 떼었다. 근신하라고는 했지만 저택 내를 돌아다니는 정도는 괜찮겠지. 이틀 동안 작업을 하느라 기운이 없고 몸이 축축 늘어졌다. 상당히 어지러워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같았다.

쉬고 싶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만나는 좋아. 시간이 없으니까.’

혼자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나와 마주친 하녀들은 하나같이 사색이 되어 반대편으로 도망갔다. 저택에서 악명이 얼마나 자자한지 있는 부분이었다. 발걸음이 멎은 곳은 바로 후원에 위치한 공작 부인의 독초밭이었다. 파라솔을 펼쳐 놓은 테이블 앞에 앉은 공작 부인은 독초를 관리하는 사용인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공작 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인사에 공작 부인이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엘로디.”

.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

뜨끔. 날카로운 눈빛에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눈치 빠른 공작 부인이 행여나 변화를 눈치챌까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것 외에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내게 아주 불편한 존재였다. 아기 때부터 저택에 팔리다시피 살게 사생아인 나를 공작 부인이 해코지한 적은 번도 없었지만, 내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것만은 확실했다. 누가 굴러들어 사생아를 기껍게 여길까. 나라도 껄끄럽고 싫을 같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 부인. 순순히 떨어져 나갈게요!’

다시금 독립을 굳세게 다짐하며 나는 최대한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공작 부인이 부채를 팔락이며 예의상 물었다.

근신 중이라고 들었는데, 답답해서 나왔나 보구나.”

. 너무 안에만 있다 보니 머리가 아파서요.”

그래.”

. 대화가 끊겼다.

“…….”

“…….”

애초에 살가운 사이가 아니라 적당한 대화거리가 없었다. 공작 부인의 눈길은 작업이 진행 죽인 독초밭에 향해 있었다. 지척에 있는 존재는 벌써 잊은 듯했다. 아니면 일부러 나를 무시하는 거라거나.

뭐가 됐든 서러운 마찬가지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공작 부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운을 뗐다.

황실도 정말 너무하죠. 공작 부인께서 농민들을 위해서 좋은 살충제를 개발했는데, 수거령을 내리다니.”

, 그렇지.”

얘가 지금 놀리는 건가? 하는 듯한 얼굴로 공작 부인이 흘긋 나를 쳐다보았다. 예민한 주제를 꺼내서인지 탐탁지 않은 표정이긴 했지만 관심을 끄는 성공했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그래서?”

제가 공작 부인께 도움을 드릴 있을 같아요.”

낚싯대는 던져졌다!

물어라!’

나는 두근대는 가슴을 누르며 대어가 낚이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공작 부인의 입이 열렸다.


 

4.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요

6–7 minutes


무슨 수로 내게 도움을 준다는 거니?”

네가? 뒷말은 듣지 않았지만 마치 들은 기분이었다. 불과 며칠 전의 나를 떠올리면 나에 대한 공작 부인의 기대치가 현저히 낮은 충분히 이해할 있었다. 며칠 전의 나는 …… 그러니까…….

개차반이었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공작 부인은 느긋한 태도로 요요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자 진한 화장이 돋보이는 눈매가 매력적으로 드러났다. 부부 아니랄까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페르디아 공작 앞에 있을 때와 비슷했다. 나는 준비해 약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게 뭘까?”

해독제예요.”

해독제?”

. 이번에 부인께서 개발하신 살충제의 해독제예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부인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부인의 독을 구해서 제가 해독제를 만들어 봤어요.”

말을 지금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물론 믿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설마 지금 나를 놀리는 아니겠지?”

그저 우아한 어조로 질문을 뿐인데, 부인의 분위기에 압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밀리면 된다. 사실을 끊임없이 머릿속에 새기며 입을 열었다.

의심하는 것보다는 한번 사용해 보시는 어떨까요?”

나는 물러나지 않고 자신감 있게 권했다.

효과 하나는 보장합니다!’

일부러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긍정적인 답이 거라는 기대는 전혀 없었다. 까이면 권하고, 까이면 제안하면 되겠지. 그랬는데.

그래. 마침 무료하기도 참이니, 잠깐은 어울려 있겠지.”

“……!”

생각보다 흔쾌히 응하는 부인의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물론 시답잖은 농지거리로 나를 속인 거라면 대가를 치러야 거야.”

당연히 경고도 뒤따랐지만. , 소리 나게 부채를 접은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초밭의 관리인을 불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그녀가 나를 곁눈질했다.

따라오렴.”

나는 잠자코 부인의 뒤를 따랐다. 부인이 나를 데리고 곳은 역시 후원에 위치한 온실이었다. 대륙 전역에 자라나는 희귀한 약초와 독초가 모여 있는 그곳은 구획 별로 온도조절 마도구가 설치되어 있는, 그야말로 유지만으로도 돈이 줄줄 새어 나가는 장소였다. 독초 재배를 위한 장소이자 연구실이기도 이곳에 내가 들어오는 처음이었다. 멀찍이서 구경하기만 했으니까. 나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온갖 희귀한 식물들을 관찰했다.

! 저건 극동에서만 자란다는 꽃이잖아?’

저건 황가에서도 재배에 실패했다는 나문데.’

새삼 페르디아 가문과 공작 부인의 재력에 감탄했다. 이전의 내가 상인들을 저택에 불러 쓰듯 쓰던 돈은 아마 발의 피도 되지 않을 분명했다. 감탄하며 꽃을 내려다보던 문득 주위가 고요하다는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공작 부인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엘로디.”

“……!”

나를 빤히 보던 부인이 작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나붓나붓하게 손짓했다.

“……아니야. 이리로 오련?”

부인의 작업대 위에는 갖가지 구하기 어려운 제조 재료들이 있었다. 엘루 나비 요정의 가루, 에이테임 영지의 해안절벽에서만 얻을 있다는 형광 이끼, 독성이 너무 강해서 결계 마도구가 없으면 보관할 없다는 붉은뿔미치광이버섯까지. 그중에서 부인이 가리킨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상자였다.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저게 뭔지 알아보겠니?”

벌레 같네요. 상당히 .”

그래. 벌레가 최근 병충해의 원인인 웜크란다.”

나름 귀엽게 생겼는데 저게 최근 대륙을 덮친 흉작의 원인이라니.

평범한 벌레가 아니야. 마수화된 생명체라 생존과 번식 능력이 끈질기단다.”

그렇군요.”

그럼 네가 가져온 해독제를 시험해 보도록 할까.”

확신은 있었지만 막상 시험한다니 초조해졌다. 그런 나와 달리 공작 부인의 행동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망설임 없이 살충제를 유리 상자 안에 들이붓자 웜크의 행동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목숨이 간당간당한 모습. 위로 해독제가 쏟아졌다. , , ……. 시간이 지났지만 웜크는 미동이 없었다.

이럴 없는데?’

당황하며 공작 부인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죽은 뻗어 있던 웜크가 뽈뽈 유리 상자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것도 이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 살아났어요, 부인!”

“…….”

, 죄송해요.”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생각이 들어 화들짝 놀라며 발짝 멀어졌다.

너무 친한 굴어서 불쾌하시겠지?’

조심하자. 잠깐 긴장을 풀면 흥분해 버리는 문제라니까. 머뭇머뭇 고개를 들자 언제부터였는지 나를 내려다보는 공작 부인의 얼굴이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언뜻 굳어 있었다.

엘로디.”

.”

해독제, 어떻게 만들었지?”

심각한 얼굴로 묻는 부인의 말에 나는 확신했다.

걸려들었어!’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죽어 가던 벌레가 금세 쌩쌩해질 정도로 해독제의 효과는 확실했으니까. 그러나 중요한 바로 지금부터였다. 능력을 담보로 부인과의 협상을 끌어내야만 했다. 나는 부러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부인께 방법을 알려드리고 싶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커서요. ……이해해 주실 거죠?”

흘긋 올려다본 공작 부인의 얼굴은 사뭇 무시무시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국의 4 가문의 안주인이자 사교계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는 부인이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윽고 공작 부인이 입술을 떼었다.

발칙하고 맹랑하구나, 엘로디.”

불쾌했다면 죄송해요.”

불쾌하지는 않아. 그저 신기할 뿐이지.”

공작 부인의 푸른 눈이 나를 유심히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시선 앞에서 잔뜩 긴장하는 어쩔 없었다.

앞에서만은 유난히 소심하고 많던 애가 갑자기 이렇게 변했을까…….”

꿀꺽. 그저 마른침을 삼켰다.

감히 내게 거래를 운운하다니.”

말하는 내용은 살벌하지만 어조는 평소와 다름없이 나긋나긋했다. 잠시 , 짧은 고민 끝에 부인은 결론을 내렸다.

그래. 좋아. 원하는 뭔지 말해 보련?”

“……!”

드디어 협상 테이블에 앉는 성공했다. 무려 테미스 페르디아 공작 부인과. 나는 침착하게 원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해독제를 부인의 이름으로 판매해 주세요.”

“……?”

그리고 제게 판매액의 일정 비율을 주세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어차피 사람들은 믿지 않을 거예요. 해독제를 만든 엘로디 페르디아라는 .”

누가 믿을까. 패악질만 일삼던 페르디아 가문의 사생아가 하루아침에 해독제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해독제의 효과에 대한 의심만 생겨날 것이다.

이래 봬도 주제 파악은 잘하는 편이거든요.”

그게 전부니?”

그리고, 눈에 띄고 싶지 않아요.”

.”

그러니까 모든 비밀로 주셨으면 좋겠어요.”

엘로디 페르디아가 공작 부인이 만든 독의 해독제를 개발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부인이 다시 부채를 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손해 없겠구나.”

그렇게 내가 원하는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다음은 부인의 요구대로 해독제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밝힐 때였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변명을 생각해 두었다.

말해 보렴. 해독제를 어떻게 만든 것인지.”

사실, 며칠 전에 권능이 개화했어요.”

권능이?”

비록 찰나였지만, 부인이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독제의 효과를 보고도 놀라지 않던 분이었는데. 신의 권능은 대개 다섯 전후로 개화하게 된다. 늦은 나이에 개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매우 드문 경우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보다 드문, 권능이 개화하지 않는 케이스였는데…… 이번에 개화하게 되었다는 내가 만든 설정이었다.

. 아무래도 독의 독성을파괴하는 권능인 같아요.”

아니다. 사실 내가 가진 권능은 독을정화하는 권능이었다.

.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지.’

원작의 엘로디는 언니인 에스텔에게 극독을 먹이려다가 오히려 본인이 먹게 된다. 세베루스 가문의 정화 권능을 가진 엘로디는 독에 중독되었지만 죽지 않았고, 과정에서 페르디아 가문의 사람이 아닌 발각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독살 미수 사건이 원작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능력을 쉽게 파악할 있었다. 독을 정화하는 권능을 발현하는 데에는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번째, 직접 음독할 . 번째, 시간이 흐른 평범한 물에 정화 권능을 발현하면 그것이 해독제가 되는 . 만들 있는 해독제의 양은 권능의 숙련도에 따라 다르므로 많지 않았다. 음독 후에 시간이 부족할 경우에는 체내의 혈액을 해독제로 수도 있었다. 권능은 우선 혈액을 정화한 후에야 바깥으로 발현할 있는 듯했으니까.

유용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권능이지.’

독을 먹어야만 능력을 있으니까. 비록 죽지는 않지만,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드디어 권능이 개화했다니, 잘됐구나. 그런데 그것이 위험 부담이 크다는 거니?”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만 말했지만 부인은 이해한 얼굴이었다. 사생아일 뿐인 내가 당신 아들들의 자리를 위협할 생각은 절대 없다는 말뜻을.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주제 파악을 잘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어째서인지 공작 부인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야호. 벌었다!’

해독제에 대해서 부인이 자세하게 시험도 봐야 하고, 다시 승인받고 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해독제를 만드는 양도 제한되어 있으니 당장 큰돈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개인 재산이 생겼다는 사실에 듯이 기뻤다. 아직 기운이 남아 있는지 쓰러져 누워 자고 싶을 정도로 힘든 와중에도 웃음이 실실 났다.

열심히 벌어서 독립해야지!’

걸음은 좀비, 그러나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계약서를 들고 침실로 향할 때였다.

아가씨!”

마사가 맞은편에서 다급히 달려왔다.

그래?”

손님이 오셨어요.”

말에 얼굴에 절로 핏기가 가셨다.

손님……? 친구가 없는데……?”

사교계의 성격 파탄자인 나를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찾아왔다고? 그야말로 올해 최고의 공포 사건이 아닐 없었다. 마사가 진지한 얼굴로 말에 동의했다.

그건 그래요. 아가씨 친구 없으시죠.”

“……마사.”

어쨌든 서둘러 가야 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도대체 누가 왔는데?”

“1황자 전하요.”

. 나는 입을 작게 벌리고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궁리에만 몰두한 나머지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래. 파혼 문제가 흐지부지됐었지.’

긴장이 풀렸는지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찾아온 1황자를 되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어쩔 없지.”

나는 남은 기력까지 쥐어짜 내며 응접실로 향했다. 지금, 파혼하러 갑니다. *** 약혼녀인 엘로디 페르디아가 미쳤다. 아덴미르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

우리, 해야 이야기가 있지 않나.”

아덴미르가 꺼낸 말에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했기 때문이다.

파혼 이야기는 진심이에요.”

그러고는 말까지 덧붙였다.

전하께선 원치 않은 약혼이었을 텐데, 고집으로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죄송? 죄송하다고? 엘로디 페르디아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다니. 정상이 아니었다. 아덴미르의 수려한 얼굴이 설핏 굳었다.

공녀. 혹시 무슨 있는 건가?”

아덴미르는 진지하게 정신 관련하여 진료를 권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 상대의 속도 모르는 엘로디는 오로지 파혼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은 없고요. , 아버지께서 파혼을 반대하세요. 하지만 전하께서 말씀드리면 받아들이실 거라고 생각해요.”

“…….”

말은 전혀 듣지를 않으셔서.”

“…….”

전하?”

아덴미르는 천진한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엘로디를 빤히 쳐다보았다.

역시 석연치 않군.’

엘로디는 갖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고 마는 성격이었다. 예비 황자비의 자리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납득이 가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틀림없었다.

갑자기 파혼하기로 결심한 거지?”

그의 질문에 잠깐 머뭇거리던 엘로디가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요.”

“……?”


 

5. 약혼녀의 낯선 얼굴

6–7 minutes


  아덴미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현실감이 없었다. 진심인가? 속내를 간파해 보려는 아덴미르의 시선에 엘로디가 손으로 볼을 감싸며 시선을 피했다.

부끄럽네요.”

문득 유독 붉게 물든 뺨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알아챘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약혼자가 있는 몸으로 다른 분을 마음에 수는 없으니까요.”

거짓을 말하는 같지는 않았다. 그가 아는 엘로디 페르디아는 거짓말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불같이 화를 내고 패악을 부릴지언정.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뀔 없으니, 저것이 진실이라는 말인데……. 어째서인지 탐탁지 않은 기분으로, 아덴미르가 무심코 물었다.

상대가 누구지?”

그걸 제가 전하께 말씀드려야 하나요?”

엘로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아덴미르는 허가 찔린 기분이었다.

“……아니.”

누굴 좋아하는지 말할 이유는 없었다. 설령 대화 상대가 약혼자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래서 이상 전하와 약혼 관계를 유지할 없게 되었어요.”

엘로디가 찻잔을 들어 올리려다 말고 도로 내려놓았다. 엘로디의 손끝이 떨리는 아덴미르는 그녀가 긴장하고 있다고 추측했다. 고작 찻잔이 무거울 없으니까.

파혼서는 언제쯤 제출하실 생각이세요?”

아덴미르는 어김없이 파혼을 이야기하는 엘로디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파혼, 파혼이라.’

못할 것도 없었다. 엘로디 페르디아는 황후가 재목이 아니었으므로, 장차 그가 황제가 되었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아덴미르의 과업이었으므로.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알아서 떨어져 나가 주겠다는데,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엘로디가 먼저 파혼을 거론하였으니 페르디아 공작도 그에게 책임을 떠넘길 없을 것이다. 그리하면 그들의 정치적 관계도 그대로 유지할 있겠지. 그런데.

한데 뜻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지.’

앵무새처럼 파혼만을 말하는 약혼녀의 바람을 순순히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기이하게 차오르는 치기 어린 반발심은 같지 않았다. 그는 평소보다 조급해 보이는 약혼녀를 응시했다. 역시 석연치 않았다. 난데없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도, 연거푸 파혼을 거론하는 것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토록 욕심 많은 엘로디 페르디아는 황자비의 자리를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아덴미르는 엘로디를 유심히 살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보였다. 뭔가 찔리는 있는 모양인지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과 약혼하기 위해 매일같이 페르디아 공작을 찾아가 졸랐다는 말을 소문으로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했으면서, 이렇게 쉬이 파혼을 말할 리가. 역시 제게 아직 호감을 가지고 있는 분명하다. 아덴미르는 확신했다. 욕심 많던 그녀가 미래의 황후 자리를 포기할 리가 없다고.

공녀.”

, 전하…….”

엘로디의 음성이 기어들어 것처럼 작았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얼굴도 들지 못했다. 아덴미르는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을 내뱉었다.

대체 무슨 수작이지?”

“……?”

이런 식으로 관심을 끌려는 거라면 그만두는 좋아.”

“……?”

아까는 빨갛더니, 이제는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로디를 보던 아덴미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가 원한다면 파혼을 것도 없지만, 급히 결정할 사안은 아니니…… 추후 다시 논의하는 좋겠군.”

“…….”

이전에 물었던 부황의 탄신 연회 관련해선 서신으로 이야기 나누는 좋겠어.”

“…….”

그의 말에도 엘로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젠 아픈 관심을 유도하려는 건가. 웃기지도 않는군.’

그런 얕은수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놀아나고 싶지 않았던 아덴미르는 문가로 향했다. 그때였다. 풀썩-. 뒤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덴미르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진 엘로디를 보았다.

공녀.”

하다못해 쓰러진 연기를 하는 건가? 대체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생각으로 그는 팔짱을 끼고 쓰러진 엘로디를 가만히 응시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공녀.”

“…….”

공녀?”

대답이 없었다. 보폭으로 곧장 엘로디를 향해 다가간 아덴미르는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몸이 불덩이 같았다. 호흡은 불안정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혼절한 것이었다.

공녀!”

엘로디의 몸을 흔들어 깨웠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까무룩 정신을 놓은 약혼녀를 바라보던 그는 미간을 좁혔다.

“……젠장.”

어릴 때부터 기사단원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자라온 그는 이성과 접촉한 경험이 드물었다. 그것은 약혼녀인 엘로디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연회에서 함께 춤이나 추는 전부였으니. 쓰러진 사람을 앞에 두고 고민은 짧았다. 엘로디를 안아 아덴미르는 응접실을 박차고 나갔다.

여봐라!”

복도를 걸으며 사람을 찾았지만, 엘로디가 머무는 별채에는 돌아다니는 사용인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유령저택에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사생아라지만 페르디아 공작의 유일한 딸인 그녀가 머무르는 건물에 상주 사용인이 이리도 없을 수가 있나. 그가 직접 페르디아 가에 방문하는 일이 드물기도 했고, 방문했을 때에도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거겠거니 하고 넘겼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어쨌든 환자를 그냥 두고 수도 없는 일이니 그는 근처의 아무 손님용 방에 들어가 엘로디를 눕혔다.

별짓을 하는군.”

황제의 탄신 연회 관련 이야기를 하며 겸사겸사 엘로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었는데, 예정에도 없던 일을 겪고 말았다.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열린 너머로 하녀 명이 지나가는 보였다. 그의 기억상 엘로디 옆에 붙어 다니던 전속 하녀였다. 이름이 마사였던가. 그녀는 별채에 발을 들이고 번째로 만나는 사용인이었다. 번째는 차를 내왔던 사용인이었는데,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거기.”

?”

주인이 쓰러졌다.”

말에 손님방 안쪽을 흘끔 바라본 사용인이 만하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 쓰러지셨군요.”

?”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그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뒷걸음질 치는 하녀를 아덴미르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 쓰러지셨군요, 라니.’

저게 주인이 쓰러졌다는데 있는 반응이던가. 이곳에 있으니 머리가 어떻게 되는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짜고짜 파혼하자는 약혼녀부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별채의 상황까지. 어쨌든 의원이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니 의자를 끌어다 엘로디 옆에 앉았다.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지만, 그래도 금방 죽을 같지는 않았다. 와중에도 엘로디가 긴장해서 손을 떨고 식은땀을 흘렸다고 생각했던 모두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수치스러움이 몰려왔다.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것인가.

.”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뱉고 있을 , 아덴미르의 눈에 무언가 띄었다.

이건…….”

옷자락으로 가려져 몰랐으나, 그녀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설프게 감긴 붕대는 느슨히 풀려 있었고, 속에는……. 날카로운 것으로 길게 그은 상처가 있었다. 매일 훈련하고, 검을 다루며, 전장에 나섰던 그가 상처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자상(刺傷). 분명 검으로 내리그은 상처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중요한 그게 아니었다.

이게, 대체…….”

상주 사용인이 없는 별채. 주인이 쓰러졌다는데도 있는 일처럼 덤덤하게 물러가던 사용인. 그리고 팔의 상처까지. 아덴미르의 눈길이 감고 있는 엘로디의 얼굴로 옮겨갔다. 순간, 줄곧 지겹다고 생각했던 약혼녀의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 미미한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깨어났다.

, 머리야.”

아직 남아 있는 기운 탓에 온몸에 힘이 없었지만, 자고 일어나서인지 전보다는 상태가 훨씬 괜찮았다. 왼손으로 이마를 부여잡던 나는 위화감을 느끼고는 손을 떼어 냈다. 붕대. 해독제를 만들다가 혈액을 해독제로 경우에는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손끝만 살짝 찌르려다 실수로 팔에 상처를 내어 버렸었다. 아무래도 음독 후라 상태가 좋지 않아 삐끗한 탓이었다. 내가 직접 감은 붕대는 서툰 솜씨 때문인지 압박이 잘되어 있지 않았는데, 지금 감아 놓은 붕대는 분명 전문가의 솜씨였다.

꼬장꼬장한 의원 노인네. 사생아는 절대 진찰 준다면서 오지도 않더니, 웬일이래.”

대놓고 내지는 않았지만 가문 내에는 사생아인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고, 그중 하나가 페르디아 가문의 의원이었다. 사실 방치는 익숙한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런데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막상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있는 침실이 매우 낯설었다. 아무래도 별채의 손님방인 같은데, 여기에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내가 1황자와 응접실에서 대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충 상황을 예상할 있었다. 1황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쓰러진 모양이었다. 마침 마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나셨네요. 미지근한 가져왔어요. 약도 드세요.”

며칠간 때문에 하도 쓰러져서인지 마사는 내가 쓰러졌다는 사실에도 그렇게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권능이 개화했다고 탓에 그런 거라고 둘러댔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 그런데 마사, 1황자 전하는?”

의원님이 도착하시자마자 떠나셨어요.”

역시 예상대로 1황자 앞에서 쓰러졌구나.

, 어쩔 거야?’

살다 보면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질 수도 있는 거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마사가 건넨 약을 삼켰다. 어차피 약이든 독이든 안으로 들어가면 정화가 되어 버리니 소용없겠지만, 먹지 않으면 마사가 걱정할 테니까. 그보다는 파혼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가 궁금한데…….

전하께서 아가씨 깨어나시면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나는 마사가 건넨 종이를 읽었다. [탄신 파티가 시작되기 삼십 전에 저택으로 가겠다. 그때 보도록 하지.]  

?”

절로 괴상한 소리가 나왔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파혼을 한다는 걸까?”

글쎄요. 아가씨한테 반했나?”

나는 코웃음을 치며 서신을 반으로 갈라 죽였다.

말도 되는 소리.’

애초에 1황자는 나와의 약혼을 싫어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하면 당연히 1황자는 내게 파혼을 요구할 알았다. 명백한 과실이니까 상대의 책임으로 돌리고, 정치적 이해관계는 그대로 유지하면 테니까. 독립을 방해하는 1황자가 상당히 거슬렸지만, 그냥 우선순위에서 치워 두기로 했다.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언니가 입양될 때까지 3 남았으니까, 안에만 정리하면 된다. 독립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때까지 죽은 돈이나 모으자! ……라고 생각했었는데. 며칠 , 복도를 걷다가 곧바로 사소한 복병과 맞닥뜨렸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익숙한 얼굴. 종종 보던 얼굴이지만, 전생의 기억을 찾은 이후로는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얼굴을 보는 순간, 문장이 저절로 떠올랐다. [ 누가 알았겠는가. 페르디아 공작의 보좌관 헥토르 아롤드. 개처럼 충성하던 심복인 그가 페르디아 공작의 뒤에 칼을 꽂으리라는 것을.] 헥토르 아롤드. 미래의 변절자. 그리고 3 , 에스텔 독살 미수 사건 독을 바꿔치기하여 내가 페르디아의 핏줄이 아닌 것이 발각되게 만드는 인간.


 

6. . 자식이라고?

6–7 minutes


어떻게든 3년이 지나기 전에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에만 집중해서인지 막상 원인이 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자세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 독이 바꿔치기 당했다면, 분명 주체가 있을 텐데.’

결과가 있다면 일의 원인 또한 존재하는 . 하지만 내가 헥토르와 마주치기 전까지 그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조연인 헥토르보다는 주인공인 에스텔의 존재감이 크기도 했으니까. 속의 내용을 기준으로 봤을 , 페르디아 공작의 보좌관인 헥토르는 2황자 벨트란 로크 윌렌트와 내통하고 있는 배신자였다. 페르디아 공작은 현재 1황자 아덴미르 프레실 윌렌트를 차기 황제로 지지 중이니, 어마어마한 뒤통수를 때리는 셈이었다. 나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좌관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충성스러운 얼굴로 음침하게 배신을 때린단 말이지?’

쯧쯧. 생긴 번듯한데. 역시 사람 속은 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다.

아가씨.”

“…….”

아가씨?”

속으로 혀를 차던 나는 속마음을 감추고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냥 무료해서 걷고 있었어. 근신이라지만 계속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잖아?”

. 정도는 각하께서도 눈감아 주실 겁니다.”

보좌관이 온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로 착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사람의 사전에배신이라는 단어는 없을 것처럼. 실제로 에스텔이 입양되고 가문에서 든든한 조력자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하니, 누구도 그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하는 당연할 것이다. 어차피 보좌관의 배신은 속에서 내가 제거되고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거기다 지금의 보좌관이 2황자와 내통 중일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리고 정말 변절한다고 해도 나랑 관계없는 일이고.

에스텔이 입양되기 전에 독립할 거니까.’

그런데 모르면 몰랐지 알고서 그냥 넘어가는 찝찝했다.

어쩐담?’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보좌관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함정을 파볼까.

아롤드 . 고민이 있는데, 들어 있어?”

, 아가씨. 무엇입니까?”

실은 아버지가 단단히 화나신 같아. 무슨 방법이 없을까?”

나는 부러 속상한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겉으로 보이는 외양만큼은 순한 편이라 불쌍한 척하는 표정은 제법 먹히는 편이었다. 물론 마사 한정으로 보여 주는 표정이었지만.

각하께서 화가 나셨습니까?”

그게, 있지. 내가 파혼한다고 말한 알고 있지?”

정도는 보좌관이니 당연히 알고 있을 .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신 겁니까?”

바로 그걸 묻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뺨을 감싸며 쑥스러운 바닥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모하는 다른 분이 생겼거든. 그래서 1황자 전하와 파혼하고 싶어졌어.”

그렇습니까? 사모하는 다른 분이 대체 누구시기에.”

내가 누굴 좋아하든 관심 없지만, 예의상 물어보는 티가 났다. 하지만 이어질 말을 듣고 나서도 평정을 유지할 있을까? 나는 괜히 주변을 , 둘러본 보좌관에게 손짓했다. 귓가를 내게 가져다 그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경만 알고 있어. 내가 사모하게 사람은-.”

씨익.

“-2황자 전하야.”

“……?!”

보좌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악했다. 그럴 만도 했다. 무려 아버지의 정적을 좋아한다는 미친 소리니까.

.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 함구하겠습니다.”

여전히 경악한 기색을 지우지 않고서 보좌관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괜히 자세히 물어봤다간 귀찮아질 뻔하니, 서둘러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 아버지 화는 어떻게 풀어드리는 좋을까?”

그건…… 아가씨께서 이상 사고 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알겠어, 아롤드 . 새겨들을게. 상담 고마워.”

나는 멀어지는 보좌관의 등을 보았다. 2황자는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가끔 연회에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아마 눈에 띄는 외모 때문이겠지 싶었다. 애초에 이용할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2황자가 내게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만약에 보좌관이 지금 현재도 2황자와 내통하고 있다면, 분명 사실을 알릴 것이다. 비록 사생아지만 페르디아 공작의 딸인 내가 본인을 좋아한다는데,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스스로 입안으로 걸어 들어온다는데 과연 누가 마다할까. 다만 먹잇감이 독이 먹잇감이라는 문제겠지만.

과연 함정에 걸려들까?’

어쩐지 흥미진진해졌다.

  *** 달에 , 비정기적으로 갖는 페르디아 가문의 만찬 시간. 고요한 다이닝룸에는 아주 가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기다란 식탁에는 다섯 명이 있고, 식당 가장자리에는 명이 넘는 사용인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모두 침묵을 지키는, 막히는 식사 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한 자리기도 했다. 적어도 달에 번은 꼬박꼬박 만찬을 가졌다는 뜻이니까. 나는 더없이 귀족적인 모습으로 우아하게 식사하는 페르디아 공작을 흘긋 쳐다보았다.

대체 가족 식사를 고집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페르디아 가문의 기조가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페르디아 공작은 서로의 이득을 위해 정략 결혼을 했다는 부인과도, 핏줄인 아들에게도 무정했다. 사생아(사실 아님) 내게 기울일 관심은 당연히 없었고. 그런데도 가족 식사만큼은 잊지 않고 초청하니 이상할 수밖에. 우물거리며 공작을 훔쳐보던 순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깜짝 놀라 눈을 피할 뻔했지만, 대신 방긋 웃었다.

혹시라도 미리 아부를 떨어 놓으면 나중에 핏줄이 아닌 밝혀져도 봐줄지도 모르니까?’

그런 나의 원대한 계획이었으나.

“…….”

공작은 나를 아주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매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 애초에 마주 보고 웃어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나도 감흥 없었다. 여전히 죽음의 침묵 식사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고요를 것은 얀시였다.

소식 들었어요, 어머니. 짧은 시간 안에 해독제를 개발하셨다고요. 역시 대단하세요.”

아직 기사도 나지 않았는데 소식을 들었다니, 너도 만하구나.”

공작 부인이 고고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딱히 나무라거나 질책하는 어조는 아니었으나, 어쩐지 압도되는 분위기였다. 나는 샐러드를 와삭와삭 씹으며 듣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해독제를 개발한 바로 나였으니까. 발표되지도 않은 정보를 벌써 접하다니, 역시 정보 수집에 도가 얀시 페르디아다웠다.

하여간 음침하기로는 1등이라니까.’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독은 만드셔도, 해독제 개발에는 오래 걸리시더니 이번엔 웬일인가 했어요.”

운이 좋았지.”

운이요?”

그래. 유능한 약제사를 손에 넣었단다.”

말에 나는 극도로 긴장했다. 혹시라도 공작 부인이 나를 쳐다보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얀시에게 향한 채였다.

휴우.’

어쩐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나는 잠자코 물을 들이켰다. 얀시가 공작 부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약제사?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

…….”

마음에 걸리시면 제가 뒷조사를 볼게요.”

콜록, 콜록……!

, 뒷조사라니!’

순간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자 가족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음식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행히 그들은 금방 내게 관심을 껐다.

얀시가 뒷조사해 봤자 내가 해독제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공작 부인 뿐이니까, 밝혀지지 않겠지.’

믿을 공작 부인과 했던 약속뿐이었다. 왠지 불안한 마음에 공작 부인을 쳐다보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는 보았다.

허튼짓 말렴.”

그녀는 얀시에게 짧은 경고를 남기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다행히도 비밀은 지켜질 듯싶었다. 안도한 나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본저택의 주방장이라 그런지 요리 솜씨가 일품이었다.

리리. 입맛이 없는데 억지로 먹지 않아도 .”

?”

나는 접시를 다시 얀시를 쳐다보았다. 멀찍이 앉아 있어 내가 얼마나 먹었는지 미처 보지 못했는지 그는 상당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 먹었네.”

나는 어색하게 웃는 얀시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 맛있던데요?”

불과 얼마 전의 나는 매번 불편한 만찬 분위기에 음식을 깨작거리다가 별채로 돌아갔었지만, 이젠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가족애라고는 없는 가문. 내가 노력해 봤자 가족이 없고, 마음대로 지내도 가족이 아니라면…….

그냥 마음 편하게 살아야지, .’

음식은 죄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나온 디저트까지 깔끔하게 해치운 나는 식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분위기는 만신창이였지만, 식사는 정말 맛있었다! *** 뜨억……. 카를로트는 나이프를 채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의 시선은 엘로디가 나가 버린 식당 출입구에 머물러 있었다.

“……, 미친 건가?”

경악한 카를로트의 중얼거림에 대꾸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만큼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엘로디였다. 그런 그녀가 자기는 먹었다며 홀랑 다이닝룸을 나가 버렸는데, 아무도 지적하지 않지?

아버지. 이상하지 않아요?”

마치 일러바치듯 페르디아 공작에게 물었으나 그는 대답 대신 묵묵히 와인을 마실 뿐이었다. 혼란스러운 카를로트 뿐인 듯했다.

사람이 미쳤는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냐고!’

그런 카를로트의 생각과 달리, 나머지 사람은 번씩은 엘로디가 사라진 식당의 출입문을 응시했다. *** 근신 처분을 받았어도 가문 차원의 공식 행사에는 참석해야 했다. 그중 하나는 오늘 있을 황제의 탄신 연회였다. 마차를 타고 황성으로 가는 .

하실 말씀 있으세요?”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덴미르에게 질문하자 그가 미간을 좁히며 곧바로 부정했다.

있을 리가.”

그런 사람치고 이동하는 내내 나를 쳐다보는 탓에 얼굴이 뚫릴 뻔했다. 대체 저러는 건지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쓰러진 일로 사과를 받고 싶은 건가?’

생각을 순간 마차가 멈춰 섰다. 우선은 연회 홀에 입장해야 하기에 아덴미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장소를 옮겼다. 홀에 들어서자마자 1황자는 측근들에게 둘러싸였다.

잠시 이야기를.”

. 다녀오세요.”

나는 눈치껏 1황자를 보내 주었다. 파벌의 귀족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1황자의 파트너로 파티에 참석해도 어차피 형식적인 약혼이라 같이 시간을 보내거나 춤을 적은 손에 꼽았다. 어차피 오늘 파티에서는 해야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혼자 있는 편이 좋았다. 이윽고 나는 자리를 옮겼다. 내가 고른 곳은 서쪽 기둥 앞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 눈에 띄는 자리. 그곳에 있는 이유는 명확했다.

반갑군, 공녀?”

바로, 남자에게 내게 접근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2황자 벨트란 로크 윌렌트가 앞에 있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올리면서 옅게 미소 지었다. 내게 접근한 2황자. 사실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페르디아 공작의 보좌관은 2황자와 내통하는 중이다. 내용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

하면 전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는데, 전하?”

“…….”

전하……?”

잠깐-.”

아덴미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무려 그의 약혼녀인 엘로디가 그가 가장 혐오하는 인간인 벨트란과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웃어? 심지어 엘로디는 벨트란에게 인사하며 옅게 웃기까지 했다. 순간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하던 엘로디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요.”

“……?”

부끄럽네요.”

  기가 찼다. .

자식이라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놈이?


 

7. 혹시 저를 걱정하세요?

5–7 minutes


애초에 아덴미르는 엘로디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믿지도 않았다. 역시 관심을 끌기 위해 수작질을 부리는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벨트란 로크 윌렌트라니. 제정신이 아니야.’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자각을 하고 있기는 건가? 페르디아 공작의 여식이 2황자와 교류하겠다는 말도 되는 발상을 하는 아니겠지. 그냥 두고 페르디아 공작이 아니었거니와, 아덴미르 또한 가만히 있을 사안이 아니었다. 널리고 널린 온갖 가문의 영식이건만, 하필 벨트란이지? 2황자 벨트란의 여성 편력은 유명했다. 데뷔탕트 볼을 치른 가문의 여식 그가 번쯤 건드리지 않은 레이디가 없다는 소문이 정도였다. 그뿐인가. 향락의 거리에 출몰하여 술에 잔뜩 취해 없이 돌아다닌다는 제보가 빗발치기도 했다. 한마디로 벨트란은 인간쓰레기였다. 자신과의 파혼의 이유가 벨트란 로크 윌렌트라면, 더욱이 엘로디의 요구를 들어줄 없었다. 약혼녀가 쓰레기통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지켜만 보고 있을 정도로 그는 무정하지 않았다. 아덴미르의 시선이 줄곧 곳으로 향해 있자 옆에 있던 측근들이 웅성거리다 그를 불렀다.

전하? 듣고 계십니까?”

조용히 .”

? …….”

거리가 너무 멀어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수는 없지만, 확실한 엘로디가 벨트란의 말에 웃으며 대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럴수록 아덴미르는 강하게 다짐했다.

결코 파혼해선 된다.’

엘로디를 위해서도. 그리고 자신과 페르디아 공작을 위해서도. 벨트란의 더러운 인성을 아니까, 엘로디가 해를 입지 않도록 구해 주는 셈이다. 그래, 그래서 그런 것이다. 파혼하자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 파혼 불가의 사유를 속으로 번이나 되뇌던 아덴미르는 결국 보다 못해 나서기로 했다. 1황자와 2황자가 대립하는 상황을, 연회의 사람들이 모두 테지만, 그보다는 엘로디를 저치에게서 떼어 내는 급선무였다.

잠깐 다녀올 곳이-.”

아덴미르가 엘로디를 향해 걸음 떼는 순간이었다.

“……!”

그보다 먼저 누군가가 엘로디와 벨트란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게 누구인지 알아본 아덴미르는 적잖이 놀랐다. 정말이지 뜻밖의 인물이었으니까.

  *** 평소에는 엘로디에게 말도 걸지 않던 2황자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레 인사를 건넸다.

평소에 레이디 페르디아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겨서 기쁘군.”

별로.’

질색하는 속마음과 다르게, 엘로디는 자본주의 미소를 지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

공녀. 오페라 관람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언제 한번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가는 어떤가?”

, 내가 같은 놈이랑?’

역시 마음의 소리를 억누르고 모호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오페라를 보고 나서는 근처에 단골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서 식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너나 많이 먹어라, 이놈아.’

하하하……. 그녀는 역시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관심 없는 이렇게 온몸으로 내면 알아서 눈치채고 떨어져 나갈 알았는데, 2황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끈질긴 놈이었다. 대화의 맥을 끊는 엘로디의 시도에도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참으로 가상했다. 보좌관이 배신자라는 알아냈으니 이제 2황자의 존재는 이용가치가 없어졌는데도. 한편 벨트란은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었다.

분명 나를 좋아해서, 형님과 파혼하겠다고 했지. 사실을 빌어먹을 형님과 페르디아 공작이 알게 되면 얼마나 재밌을까.’

엘로디가 함정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벨트란은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굳게 믿었다. 엘로디 딴에는 썩은 미소라고 생각하고 지은 표정이 벨트란에게는 연정을 감추는 수줍은 미소로 보였다. 부끄럼을 타는 건가. 고분고분 대답하는 모습이 제법, 아니 마음에 들었다. 엘로디의 외모야 옛날부터 자신의 취향 자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질이 더럽다는 소문과 형님의 약혼녀라는 때문에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로디가 자신을 좋아하며, 이런 식으로 부끄럼 타고 얌전하게 군다면 거두어 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나저나 형님도 무심하군. 이리 아름다운 약혼녀를 홀로 내버려 두고 가시다니. 어떤가, 공녀. 나와 함께 춤을 영광을 그대에게 -.”

그가 오만하게 미소 지으며 신청을 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화가 끝난 모양이군.”

나른하고 낮은 음성. 고개를 한참 들어올려야 얼굴을 확인할 있을 정도로 신장.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형형한 금빛 안광이었다. 엘로디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

딸과 이야기가 있어 데리고 가겠다.”

페르디아 공작은 엘로디의 손을 붙잡고 자리를 벗어났다.

꿈인가?’

뒤를 따르는 엘로디가 혹시나 뺨을 꼬집어 봤지만…….

아야야.”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 페르디아 공작이 나를 데리고 것은 선객이 없는 발코니였다. 공작은 곧바로 커튼을 내려 흘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했다. 두꺼운 커튼 덕분에 연회 홀의 오케스트라 음악 소리가 곳에서 들려오는 아득하게 느껴졌다. 줄곧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홀에 있다가 조용한 발코니로 오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나는 난간에 등을 기댄 페르디아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페르디아 공작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한마디 내뱉었다.

“2황자를 멀리해라.”

역시나 2황자와 접점이 없던 내가 대화를 나눈 것이 페르디아 공작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2황자가 먼저 말을 걸어서 대충 대답하던 중이었어요.”

서둘러 변명했지만 미미하게 굳은 공작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놈은 손버릇이 나쁘기로 유명하니, 사석에서 만나는 것을 삼가고. 연락이 오거든 무시해라.”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말을 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걱정……. 잠깐, 걱정?’

그럴 리가 없겠지만, 정말 혹시 모른다는 마음에 조심스레 질문했다.

혹시 저를 걱정하세요?”

“…….”

답이 없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내가 했던 질문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스스로 조소할 때였다.

그래.”

나직한 음성으로 페르디아 공작이 답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페르디아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걱정하신다고요?”

그래.”

저를요?”

“…… 번이나 대답해야 하는 거지?”

걱정은커녕 내게 관심 자락도 없던 아버지가 갑자기 이러니 그저 얼떨떨했다. 그래도 딸이라고 챙겨 주는 걸까. 순간 내가 처한 냉정한 현실을 자각했다.

내가 반이라도 자기 핏줄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겠지. 진짜 딸이 아니라는 밝혀지면 가차 없이 버릴 거야.’

친딸이 아님이 발각되고 죽었던 소설 사실을 머릿속에 연거푸 되새기며 괜히 피어오르려는 기대를 접었다. 대신 조금 긴장하며 페르디아 공작을 응시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해라.”

말이 허무맹랑하고, 말도 되는 소리로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

보좌관 아롤드 경을 조심하세요.”

말을 믿고 말고는 페르디아 공작의 자유지만, 그래도 번쯤은 의심해 주길 바랐다. 미리 배신자를 색출해 낸다면, 분명 미래에 도움이 테니까. 이건 나름의 키워 보답이었다. *** 윌렌티아 황성의 연회 . 밝은 샹들리에 빛이 드넓고 화려한 곳곳을 눈부시게 비추는 가운데, 결혼 적령기 레이디들의 시선이 바쁘게 오갔다. 흘긋, 흘긋. 쳐다보는 눈길의 종착지에는 어김없이 남자가 있었다. 페르디아 가문의 공자인 얀시와 카를로트였다. 세간에 악당 가문으로 불릴 정도로 악명이 자자하지만 황제조차 접는 대단한 위세에 선망하는 이들은 아주 많았다. 특히 공자의 눈에 들어 연인이 되고자 하는 레이디들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로트는 기가 막혀서 길길이 날뛰는 중이었다.

! , 의원한테 보여야 하는 아냐?”

카를. 소리 낮춰.”

아니, 그렇잖아! 갑자기 2황자한테 달라붙는데? 맨정신으로 있는 일인가, 그게?”

달라붙은 2황자야, 리리가 아니라.”

얀시가 차분하게 그를 진정시켰으나 카를로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엘로디는 원래도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온갖 사건을 일으키는 트러블메이커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엄청난 트러블을 일으킨 것이다.

그게 그거지. 지금 미쳤다고! 사회에 풀어 두면 ! 저러다가 무슨 짓거리를 벌일 알고 내버려 두는 거야?”

카를로트가 길길이 날뛰자 침묵하던 얀시가 고요히 미소 지었다. 스으으. 순간 얀시가 쥐고 있던 와인 잔이 서서히 형체가 흐려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소멸의 권능. 얀시가 남들 앞에서 능력을 쓰지 않는다는 아는 카를로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얀시가 환하게 웃으며 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모르게 권능을 버렸네. 그보다 카를.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있어 줄래? 권능을 버릴지 모르잖아.”

이건, 부탁을 가장한 경고였다.

, …….”

망아지처럼 날뛰던 카를은 순식간에 조신해졌다. 형님의 권능에 최후를 맞이하는 사양이었으니까……. *** 발코니에서 나와 시종에게 음료를 받아 홀짝대고 있을 때였다. 바쁘게 사라진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약혼자가 눈앞에 나타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와 춤출 있는 영광을 주겠나?”

피곤해서 추고 싶지 않은데요.”

“…….”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아덴미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잡아. 있으니까.”

권유가 아닌 명령. 내키지 않았지만 위대하신 황자 전하께서 용건이 있다니 별수 있나. 가련한 귀족 영애인 나는 그의 위에 손을 올렸다. 이윽고 우리는 음악에 따라 유려하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우리 사람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공녀.”

그의 음성이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마주 보는 얼굴이 가까워서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파혼하길 원한다고 했지.”

.”

뭐지? 갑자기 파혼 얘기를 꺼내는 거지? 설마 파혼할 마음이 건가? 자라나는 기대감에 설레는 마음으로 1황자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기대를 무참하게 꺾었다.

아쉽지만 그건 어렵겠어.”

왜죠?”

나와 파혼하길 바라는 그대는 제법 쓸모가 많거든.”

쓸모? 쓸모오?’

뭐라는 거야, 인간이. 순간 욱한 나는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균형을 잃은 헛디디는 -. 콰악! 1황자의 발을 밟아 버렸다. 불시에 발을 밟힌 1황자가 미간을 좁히며 질책하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어머나. 실수.”

물론, 환하게 웃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8. 말이 있으니 따라와라

6–7 minutes


  황제의 탄신 파티가 끝난 지도 벌써 이틀이 흘렀다. 공식 행사를 제외하고는 아직 근신 해제가 되지 않은 나는 별채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찾기 바로 직전에 사용인들을 쥐잡듯 잡아서인지 다들 눈에 띄지 않으려 각자 구역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고즈넉하게 지낼 있었다. 사교계의 가십지를 읽다가 턱을 나는 파티 1황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발을 밟은 직후.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

하지만 1황자는 이후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약혼자로서 정중히 에스코트했다. 일부러 발을 밟은 심했나 싶기도 한데 내가 물건도 아니고, 쓸모를 논하는 그냥 넘어갈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돌아왔다 해서 성질 더러운 이전의 내가 사라진 아니니까.

이전의 엘로디도 나라고.’

달라진 있다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있는 눈이 생겼다는 점일까. 어쨌든 1황자가 파혼해 주지 않는 제법 성가신 일이긴 했다. 1황자 입장에서도 지금 파혼해 놓는 나중에 편할 텐데.

에스텔한테 반해서 나한테 파혼해 달라고 엉엉 울면서 치맛자락 붙들어 보든가. .”

상상만 했지만 정말 1황자와 어울리는 행동이긴 했다.

파우트 백작 부인과 저택 집사가 은밀히 마구간에 들어간 부분까지 읽었는데…….”

다시 읽던 가십지를 펼쳐 독서를 시작하려고 때였다. 마사가 황급히 들어왔다.

아가씨, 사고 치셨어요?!”

사고는커녕 요사이 별채에만 틀어박혔던 나는 순간 억울해져서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더듬으시는 . 치셨네요! 그랬으면 공작 부인께서 아가씨를 호출하실 이유가 없지!”

공작 부인? 부인께서 부르셨어?”

! 온실로 오라고 하셨다고요!”

걱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마사와 달리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겉옷을 걸쳤다. 나를 부른 이유가 대충 예상이 되었다.

, 가시게요?”

그럼 가야지. 부르시는데.”

마사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이유를 짐작할 있었다. 음지의 권력가 페르디아. 가문의 일원 모두의 성정이 잔혹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손속이 잔인한 사람이 누구인지 굳이 꼽자면 바로 공작 부인인 테미스였다. 그녀는 가문에 숨어든 첩자에게 동안 불에 타오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는 독을 꾸준히 먹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무자비한 고문관이었다. 알고 있는 진실을 실토한 후로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기 위해 첩자에게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는 소문도 함께 돌았는데, 그건 사실 여부가 확실하진 않았다.

나도 여전히 공작 부인이 무섭긴 .’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부인에게 접근하긴 했지만, 이유가 아니었다면 감히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인과 나는 불편한 사이였으니까. 엉금엉금 기어 다니지도 못하던 아기 때부터 저택에서 자라온 나였다. 그런 내게는 당연히 공작 부인에 관한 기억이 있었다. 감기에라도 걸렸던 걸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렸던 나는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고, 주변에는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공작 부인 외에는. 누워서 울고 있는 나를 공작 부인이 바라보았다. 마치 무생물을 보는 것처럼. 그게 다였다. 기억은 이따금 떠오르곤 했다. 그렇다고 공작 부인이 나를 냉대하거나 대놓고 무안을 적은 없었다. 그저 가문에 손님을 대하듯 표면적으로 대할 뿐이었다. 혹시라도 마주치면 짧게 인사하고, 식사 자리에서 형식적인 안부를 나누는 정도로. 최근처럼 길게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쨌든 마치 내가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구는 마사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괜찮아, 마사. 이제 독에는 당하거든.”

독을파괴하는 권능 말씀이죠?”

, 그거.”

마사가 거짓말을 순순히 믿어 줘서 다행이었다.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그녀에게 따로 일을 맡긴 나는 곧바로 공작 부인의 온실로 향했다. 온실로 향하는 길에 내리쬐는 햇볕은 아주 따가웠다. 잠깐만 나와 있는데도 후덥지근해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얼른 온실에 들어가자 바깥보다는 나았지만 아예 시원하지는 않았다.

어디 가셨지?”

부인의 연구 책상이 있는 곳으로 왔지만 아무도 없었다. 연구 일지와 연구물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기도 하고,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 연구실 옆쪽 화단을 구경했다.

, 예쁘다.’

그중에서 오색 빛을 화려하고 커다란 송이를 보았다. 마치 만져 보라는 살랑거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홀린 손을 뻗었을 때였다.

조금만 손을 뻗었다간 전체를 잡아 뜯기고 거란다.”

……!”

나는 얼른 손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공작 부인이 그곳에 있었다.

식인 할카리아. 화려한 외양과 미혹 가루로 사람을 홀려 유인한 다음에 먹어 치우지. 조심하는 좋아, 엘로디.”

몰랐어요.”

모르는 당연하단다. 최근 드베이 왕국의 미개척 무인도에서 발견된 녀석이거든.”

후후. 공작 부인이 사랑스럽다는 식인 꽃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하핫.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연히 본론부터 말할 알았지만, 부인은 손님인 나를 위해 차를 내주었다. 장미 모양의 얼음이 띄워진 시원한 냉차였다.

마시렴.”

마시겠습니다!”

마침 찌는 듯한 더위에 목이 말랐던 나는 순식간에 냉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아주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맛있는 냉차였다. 그런데 공작 부인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말도 되는 것을 보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 마신 거니, 지금?”

마시면 되나요……?”

마셔 버렸는데. 방울도 남김없이. 나는 당황하며 찻잔과 공작 부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마시라고 하기에 마셨을 뿐인데, 마셨냐고 물어보시면…….

내가 내어준 차를 그렇게 거리낌 없이 마시는 사람은 드물거든.”

. 그제야 부인이 놀란 이유를 있었다.

부인이 독을 다루니까. 혹시나 차에 독이 들어 있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건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어떤 극독을 먹어도 세베레스 가문의 정화 권능이 독을 전부 해독해 버릴 테니까. 하지만 내가 음독하여 해독제를 만든다는 방법은 공작 부인도 몰랐다. 나는 이마에 약간 맺혀 있는 땀을 괜히 닦으며 대수롭지 않은 둘러대었다.

마침 더웠기도 하고……?”

더위보다 목숨이 중하지 않지.”

향기가 좋아서요……?”

향기가 나지 않는 차란다.”

무슨 말이든 번번이 가로막혔다. 어쭙잖은 말로는 공작 부인을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쩔까. 잠깐 고민하던 나는 냅다 질러 버렸다.

부인과 저는 좋은 파트너니까요! 같이 일할 파트너한테 독을 먹일 사람은 없잖아요…….”

파트너?”

. 분명 능력이 마음에 드셨을 거예요. 이번에 해독제도 통과된 아닌가요? 그것 때문에 부르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뒤늦게 혹시나 버릇없어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몰려왔지만 이미 일을 저지른 후였다. 나는 바짝 긴장한 부인의 말을 기다렸다.

파트너, 그래. 파트너지. 말이 맞단다, 엘로디.”

다행히 태도에 언짢은 기색은 없었다. 속으로 안도할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차에 독은 넣지 않았어. 정말 독을 넣을 생각이었다면 너와 내가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닌, 다른 상황에서 넣었겠지. 의심을 피해야 하니까 말이야.”

…….”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해칠 있지 않겠니?”

공작 부인의 말이 내게는 이런 식으로 들렸다. 해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 제거했을 테니 안심해도 좋다, .

부인 말씀이 옳아요.”

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부인이 입술을 달싹이다 피식 미소 지었다.

너의 추측대로 이번에 네가 만든 해독제의 판매 허가가 났단다. 준비된 물량은 전부 유통을 시작하여 선수금을 받았지. 해독제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소소한 금액이지만, , 받으렴.”

감사합니다.”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돈주머니를 챙겨 넣었다. 부인은 소소한 금액이라고 했지만 무게와 짤랑이는 소리를 들으니 예상했던 것보다 많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열어 보고 싶었지만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았다.

자세한 금전 출납 기록은 문서를 확인하렴.”

.”

남부러울 없는 재력을 가진 공작 부인이 나를 상대로 금전 사기를 쳤을 리는 없으니 대충 훑어보는 도로 덮었다.

그리고 요청할 사항이 있단다.”

, 말씀하세요.”

추가 해독제를 발주하려고 하는데, 기간이 얼마나 걸릴까.”

이틀 정도면 준비될 거예요. 이번에도 양은 많지 않을 텐데, 괜찮을까요?”

그래. 기왕이면 해독제 조제 방법을 사고 싶은데, 그건 어려울까?”

……. . 영업비밀이에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섣불리 해독제를 만드는 방법을 밝혔다가는 내가 세베레스 가문의 권능을 사용했다는 들킬 가능성이 컸다. 당연히 예상했는지 공작 부인은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대기 중인 다른 극독도 제법 있는데, 혹시 이것들의 해독제도 만들 있는지 궁금하구나.”

가능해요. 하지만 독성이 강할수록 까다로워서 시간이 오래 걸려요.”

까다롭다기보단 오랫동안 고통스러울 테니까 웬만하면 맡고 싶지 않았다. 번에 만들 있는 양이 제한적이기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문득 저번의 식사 자리를 떠올렸다. 새로 알게 약제사의 뒷조사를 하겠다는 얀시를 공작 부인은 단호하게 차단했었다.

부인. 전에 얀시 오라버니한테 비밀 지켜 주셔서 감사해요.”

약속했으니 당연히 지켜야지. 우리는 파트너니까.”

우리…….’

페르디아지만 페르디아가 아니었던 내게는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물론 공작 부인은 아무 없이 말한 거겠지만. *** 내가 머무는 별채로 가기 위해서는 서편 회랑을 통해서 가야 했다. 온실을 빠져나온 나는 서편 회랑 쪽을 향해 걸었다. 회랑의 옆쪽에는 가문의 지하 감옥이 있었는데, 마침 앞을 지나던 때였다.

이자를 가둬라.”

, 각하. 억울합니다. 저는 페르디아와 각하를 위해 바쳐 충성을 맹세했는데, 어째서-!”

닥쳐라.”

! 둔탁한 발길질 소리에 걸음이 우뚝, 멎었다. 지하 감옥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살풍경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얻어터져 엉망이 되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사내와 앞에 있는 페르디아 공작. 그리고 주변을 가문의 사병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얼굴이 곤죽이 되어 있어 확인하는 어렵긴 했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페르디아 공작의 보좌관인 헥토르 아롤드였다.

네놈이 2황자와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는 이미 수집해 두었다.”

아닙니다. 음모입니다! 이는 2황자 전하께서 페르디아 가문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벌이신 흉계임이 분명합니다!”

아롤드 경의 주장에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내통하고 있는 진짜 주군마저도 팔아넘기는 팔랑팔랑 종잇장 같은 지조를 보라.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페르디아 공작이 보좌관을 신임했다면 그럴지도 모른다며 처분을 재고해 보았을 법한 주장이었다.

흉계, …….”

, 공작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직후였다. ! 페르디아 공작의 칼날이 서슴없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악, 아아아아악!”

보좌관의 손등이 있었다. 그는 검에 꿰뚫린 자신의 손을 보며 괴성을 내질렀지만, 공작은 검을 치워 주지 않았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

한참을 울부짖던 보좌관이 이내 실신하자 그제야 공작이 검을 뽑아내었다. , ……. 끝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본의 아니게 끔찍한 장면을 목격해 버린 나는 숨을 죽이고 슬그머니 근처의 나무 뒤로 숨기 위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실패했다.

엘로디 페르디아.”

나직한 호명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금색 서늘한 시선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흠칫, 절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친딸이 아니라는 들키면, 끝이 나한테 향할지도 몰라.’

결말만큼은 피하고 싶어 이렇게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는데, 과연 생각대로 잘될까.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들었다. 이윽고 공작이 걸음을 떼며 곁을 스쳐 갔다.

말이 있으니 따라와라.”

스쳐 가는 공작에게서는 피비린내가 났다.

“……!”

나는 군말 없이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9. 골라

6–7 minutes


  당연히 집무실로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페르디아 공작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공작의 개인 침실 앞이었다.

여기로 거지?’

친모가 나를 데리고 페르디아에 왔을 때부터 나는 별채에서 자랐다. 그렇다고 본채 출입을 금하거나 하는 눈에 띄는 차별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들어갈 없는 공간이 군데 있었다. 번째는 공작 부인의 온실이었고, 번째는 7 죄악 페르디아가 봉인한 식탐이 봉인되어 있다는 저택의 지하였으며, 번째가 바로 공작의 침실이었다. 내가 사생아인 줄로만 알았을 때는, 공작이 어려워서 감히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친딸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더욱 공작과 거리를 둬야 했고. 공작은 거침없이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떡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공작이 나를 돌아보았다.

들어와라.”

……!”

나는 얼른 침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와 보는 공작의 침실은 공작과 어울리는 묵직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침실 자체는 넓었지만 가구가 최소한으로 놓여 있어 다소 휑해 보였다. 아직 낮인데도 대부분에 두터운 커튼이 쳐져 있어 햇빛이 드는 창은 작은 하나가 전부였다. 너무나도 페르디아 공작 자체인 침실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힐끔힐끔 침실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공작이 셔츠를 벗기 시작하는 아닌가.

.’

나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아마 보좌관을 추궁하며 옷에 피가 튀어 갈아입으려는 같았다.

진짜 좋다.’

아들 명이 있는 아버지의 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몸의 근육은 마치 예술작품 같았다. 검술의 경지에 이르러 육체의 노화가 더디니만큼 외모도 아직 20대에서 멈춰 있었기 때문에 역시 아빠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러니 페르디아 공작을 흠모하는 부인들이 많다고 하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있었다. 그런 공작의 상체에는 크고 작은 무수한 흉터들이 있었다. 음지의 권력가 페르디아 가문의 가주로서 자리를 공고히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고난을 거쳤음을 보여 주는 일면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공작이 옷을 갈아입기를 기다렸다. , 묻은 검을 벗은 위로 대충 내던진 공작이 나를 쳐다보았다.

앉아라.”

어정쩡하게 있던 내가 소파에 앉자 공작이 맞은편에 앉았다. 공작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떻게 알았지?”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지만 무엇을 묻는지 이해하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보좌관이 2황자와 내통하고 있다는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이겠지.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사실을 섞어 말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폐하의 탄신 파티 얼마 전에 복도에서 아롤드 경이랑 마주친 적이 있어요.”

“…….”

아무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페르디아 공작은 진중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질책하거나 추궁하는 눈빛이 아닌데도 괜히 목이 탔다.

그때 아롤드 경이 이상한 오해를 하고 갔거든요.”

오해?”

. 제가 2황자를 좋아한다는-.”

우지끈-. 엄청난 소리에 말을 하다가 멈춰 슬쩍 눈을 아래로 내리자 공작의 손에 일그러진 책상이 보였다.

“……?”

나를 책상처럼 부숴 버리겠다는 뜻일까. 식겁한 나는 열과 성을 다해 사실을 부정했다.

물론 아니죠! 제가 난봉꾼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내가 극구 부인하자 공작이 책상에서 손을 떼고 약간 풀어진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공작이 순간 이성을 잃을 줄이야.

‘1황자와 결속을 유지할 수단인 내가 2황자한테 붙으면 일이 어그러지니까 그런 거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 과하지 않나……? 어쨌든 공작은 말을 믿는 눈치였다. 나는 작게 심호흡한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아롤드 경이 착각하는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는데, 파티에서 2황자가 제게 접근했어요. 아버지가 보셨다시피.”

공작이 말없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나는 내게 경고하던 발코니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래서 조심하는 좋겠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거짓을 말한 아니다. 일부러 공작의 보좌관에게 내가 2황자를 좋아한다는 가짜 정보를 흘렸다는 사실만 뺐을 이후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래. 그렇게 거였군.”

공작도 그런 말에 딱히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나로선 다행인 일이지만, 이렇게 말을 순순히 믿어 줄은 몰라서 얼떨떨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앞에 차라도 있었다면 뭐라도 마시면서 딴청이라도 피울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눈치를 보던 나는 물을까 말까 고민하던 질문을 했다.

, 아롤드 경은 이제 어떻게 되나요?”

글쎄……. 배반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감히 페르디아를 배반한 대가가 가벼울 없었다. 배신자인 것이 발각되면 가문의 방식대로 처단한다고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떻게 벌을 내리는지는 나도 몰랐다.

죽이는 건가요?”

아니.”

그럼요?”

죽음은 너무 관대한 형벌이지 않으냐.”

분명 표정이나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마주 앉아 있는 나는 순간 오싹해졌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선사할 얼굴이 무서워서. 과거의 나였다면 공작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이것저것 물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있는 가장 낫다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공작이 이름을 불렀다.

엘로디.”

, 말씀하세요.”

당분간 되도록 회랑을 지나치지 말도록 해라. 가문에 숨어든 쥐새끼가 이토록 많으니 대대적으로 숙청해야겠으니.”

, 명심할게요.”

방긋 웃으며 대답하면서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나도 가문에 숨어든 , 쥐새낀데.’

친딸도 아니면서 사생아라는 명분으로 가문에 붙어 있는 . 이번 일로 더욱 강하게 다짐했다.

절대 들키지 말자.’

들키게 된다면 나도 보좌관처럼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르니까. 친부인 세베레스의 가주가 혼수상태에 빠진 지금, 나를 지킬 있는 수단은 없었다. 거기다 세베레스 공작이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페르디아 공작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역시 되도록 얌전하게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독립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어쨌든 이제 용건이 끝난 같으니 이만 나가 보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슬쩍 고개를 순간이었다.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오묘한 금색 눈동자가 마치 나를 옭아매는 듯했다.

엘로디.”

“…….”

이번 배신자 색출에 공이 크니, 바라는 가지 들어주도록 하마.”

뜻밖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보상이 따라올 줄은 몰랐는데.

사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지만…….’

. 나는 전생에 산전수전을 겪은 대한민국 인간. 애초에 구두계약에 많은 바라면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괜히 그런 부탁을 섣불리 했다가 부탁은커녕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독립의 시작 단계에 있는 지금, 내가 해야 부탁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 근신 처분을 풀어 주세요.”

이렇게 별채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슬슬 바깥 활동을 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고 있었다. 마사를 통해서 부탁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직접 움직이면서 독립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런 부탁이 뜻밖이었던 걸까. 공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정녕 그게 전부더냐.”

. 그거면 돼요.”

애초에 근신하게 원인인 파혼은 1황자 때문에 흐지부지 넘어가 버린 상태였다. 거기다 최근 별채에서만 두문불출하며 얌전히 지냈으니 당연히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요즘의 나는 정말 조용했으니까. 잠시 공작이 선선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좋다. 근신을 풀어 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겉으로는 의젓하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됐다!’

하나 그것도 잠시, 공작이 짐짓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건 운운에 나는 멀거니 공작을 바라보았다. 부탁을 들어주면 들어주었지, 난데없이 조건을 붙이다니 공작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내가 당황하건 말건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공작이 이내 ,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골라 .”

“……?”

얀시 혹은 카를로트.”

이렇게 다짜고짜……?’

아들놈 하나를 고르라는 말에 나는 더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시장 매대 앞에서 물건을 골라 보라는 것처럼 여상한 어조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람은 왜요?”

근신을 해제하면 저택 밖으로 나갈 아니더냐.”

. 당연히 밖에 나가야죠.”

그러니 하나를 호위로 대동해라.”

도대체 공작이 이러는 걸까. 지금까지 내가 어딜 돌아다니든 신경도 쓰지 않았으면서? 그것도 아들들을 고작 호위로 쓰겠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들리는지 본인은 모르는 걸까, 진심으로? 어쨌든 얀시와 카를로트를 달고 다니라니, 말도 된다. 벌써 인간들의 눈치를 보다가 기껏 외출했지만 아무 성과도 보지 못하고 터덜터덜 저택으로 돌아올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막아야만 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공작의 조건을 철회하기 위해 온갖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얀시 오라버니는 아버지 도와서 일하느라 바쁘고, 카를은 검술 연습하느라 바쁘잖아요. 사람 외출에 동행할 시간은 없을 거예요. 부탁해도 당연히 거절할 같으니까-.”

감히?”

치의 망설임도 없는 오만한 되물음에 나는 잠자코 수긍했다. 암요, 그렇죠. 감히 아들 주제에 가주이자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없겠죠……. 하지만 페르디아 공작도 눈이 있다면 텐데. 얀시와 카를로트가 나를 싫어한다는 . 아들들의 감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아주 사악하고 배려심 없는 아버지가 아닐 없었다. 애초에 사람을 생각했다면 호위로 고르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럼 사람 말고 가문에 속한 기사를 데리고 갈게요.”

된다.”

굳이 사람을 고집하는 거지?

혼자라도 조용히 다녀올 있어요. 지금까지도 하녀와 같이 다녔는걸요…….”

언뜻 투정 부리는 어투 같아 슬며시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공작의 눈길이 얼굴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성가시다는 눈가를 찌푸린 공작이 눈가를 쓸어내리더니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자칫 2황자가 접근할 수도 있다. 고작 가문의 기사가 그자의 접근을 막을 없겠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한테 2황자는 보좌관을 떠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수작질을 부릴 거라고 예상 했으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나는 1황자를 견제하기 위한 더없이 훌륭한 수단일 테고, 저택 밖이야말로 언제든 접근할 있는 최적의 장소였으니까. 얀시와 카를로트 명을 데리고 나가라고 말한 이유도 납득할 있었다. 제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페르디아의 직계를 상대로 내게 쉬이 접근할 없겠지. 머리로는 알지만 역시 얀시와 카를로트와 동행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완곡하게 거절하려던 바로 그때, 인내심이 다한 건지 공작이 눈가를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그냥 데려가라.”

말에 나는 질색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고르겠습니다.”

고르게 주세요……! 어차피 골라야 한다면 놈보단 놈이 낫다.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단호하게 대답하자 한층 누그러진 공작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누구로 것이냐.”

얀시 혹은 카를로트. 도대체 누굴 호위로 삼아야 하는 걸까. 어느 쪽을 고르든 지뢰임이 확실한 선택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저는…….”


 

10. 페르디아식 금전 교육

6–7 minutes


. 나직한 한숨 입을 열었다.

카를로트로 할게요.”

이유는 간단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얀시보다 카를로트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다루기 쉬우니까. 그래 봤자 최악과 최악 중에 그나마 나은 최악을 고른 셈이지만.

그래. 카를로트에게 일러두마.”

, 아버지.”

다른 필요한 없느냐.”

괜찮아요.”

괜찮긴. 절실히 필요한 있었다. 쓸모없는 호위를 떼어 놓는 ! 하지만 그것만큼은 봐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또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집사에게 듣기로, 최근 물건 구입을 하지 않았다던데.”

, 그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의상실 주인과 상인들을 별채로 불러들여 온갖 드레스와 물건을 사들이던 나였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는 그것들을 모두 그만두었다. 내가 페르디아 가문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돈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가진 물건조차 것이 아니고, 있는 또한 돈이 아니다. 그러니 차마 가문의 돈을 흥청망청 수는 없지.

돈을 과하게 쓰는 것도 좋지 않잖아요. 줄이려고요.”

.”

?”

페르디아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돈을 쓰겠다는데 갑자기 추궁을 받는 상황, 뭘까. 차마 대답을 하고 얼떨떨한 채로 굳어 있자 공작이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고작 드레스 값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한미한 가문이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집사에게 말해 엘로디 앞으로 매달 10 라리트를 할당하도록 일러 두지.”

“10 라리트요?!”

10 라리트. 1라리트가 2 정도의 가치를 지녔으니, 10 라리트라면…… 무려 2 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쓰듯 있는데 10 라리트를 추가로 할당하다니.

아무리 페르디아라지만, 금전 교육은 하는 거야?’

딸내미 버릇 나빠진다고요? 경악한 나를 보며 공작이 무시무시한 질문을 했다.

부족한 것이냐?”

아니, 아니에요!”

이러다 앞으로 돈을 추가로 할당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얼마를 쓰든 전부 공작의 감시망에 들어가는 , 늘어 봤자 곳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사고 싶은 있다면 사라. 매달 집사에게 보고받을 테니 그리 알도록 하고.”

“…….”

보고까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소하게 살겠다는 말에 오히려 돈을 쥐여 주며 써야 한다고 강요하는 . 이게 바로페르디아식 금전 교육 아닐까 하고……. 영혼이 탈탈 털린 나는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났다.

바쁘신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 더는 용건이 없는 같으니 얼른 인사하자 공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침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휴우우.”

이상 공작과 공간에 있지 않다는 생각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 공작 부인을 만나고 오는 길에 뜻하지 않게 공작까지 만난 나는 잔뜩 지친 드디어 별채로 돌아왔다. 침실 앞을 서성이던 마사가 나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살아 계시는 맞죠?”

불순하게 들린다, 마사?”

그럴 리가요. 제가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 걱정했다구요.”

마사는 부산하게 이곳저곳을 확인하더니 다친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확인하고 나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공작 부인과 단둘이 만난다는 사실이 걱정이 되기는 모양이었다.

사실 부인보다는 공작이 무서웠는데.’

오히려 공작 부인과는 이야기가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야기를 나누기는커녕 피하기에 급급했던 상대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처지를 잊은 아니었다. 부인은 능력이 유용하기 때문에 잘해 주는 것뿐, 나를 좋아하지 않는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남의 아이라도 울고 있던 물건 보듯 바라보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부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사생아니까. 그러니까 정도로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지내다가 떠나자. 다시금 다짐하며 소중히 들고 왔던 주머니를 침실 바닥 카펫 위로 와르르 쏟았다. 차르르-. 반짝반짝한 금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예요?”

마사가 놀란 얼굴을 돈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뭐냐면, 돈이지.”

돈인 알죠. 저도 눈이 있으니까.”

마사는 돈의 출처가 궁금한 듯했지만 나는 척하며 카펫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나, ……. !”

1 라리트 짜리 금화 . 주머니에 들어 있던 돈은 무려 1 라리트였다. 금방까지 페르디아 공작에게 달에 10 라리트 어쩌고 소리를 듣고 나였지만, 손에 잡힌 돈이 오히려 현실감 있었다. 어쨌든 나는 감격했다.

……!”

돈을 벌었다. 혹시라도 사용하더라도 가문의 추적에 걸리지 않는, 온전히 나만의 개인 자금을! 소중한 돈을 가지고 내가 가장 처음 일은, 마사에게 2 라리트를 쥐여 것이었다.

? 주시는 거예요?”

. 이번에 대신 구해 줬잖아. 답례야.”

당연히 해야 일을 것뿐이지만…… 받아 둘게요!”

하녀 월급이니만큼 마사는 헤벌쭉 웃으며 금화를 챙겼다. 나는 그런 속물적인 마사가 좋았다. 괜히 앞에서는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며 충성스러운 척하다가 뒤에서 큰돈을 받고 변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내가 확실한 보상을 하는 마사는 편일 테니까. 애초에 배신하지도 않을 테고. 어쨌든 제법 많은 돈을 벌긴 했지만, 정도로는 집을 사는 꿈도 없었다. 앞으로 해독제를 팔아서 돈을 있을 테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그때 마침 마사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여기 아가씨가 말씀하셨던 마탑 발행 투자 홍보 전단이에요.”

고마워, 마사.”

내가 마사에게 부탁해서 받아오라고 했던 투자 관련 정보들이었다. 발행처는 바로 마탑이니 공신력 있는 투자 정보라 있었다. 위험하긴 하지만 단기간에 독립 자금을 벌기 위해선 투자만 없었다. 조만간 직접 마탑에 방문해야겠는데, 카를로트를 어떡하면 좋지? 힘들게 나의 소중한 돈을 다시 주머니에 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자, 기웃거리던 마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 요즘 이상하세요.”

?”

뜨끔.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지 과거의 나도 나니까 이상한 점을 느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마사는 언제나 나를 보필하는 전속 하녀니만큼 무언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짝 긴장한 마사의 다음 말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혹시 아가씨…….”

유심히 나를 보는 눈길이 이렇게 집요하지? 이내 마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철드셨죠?”

말에 맥이 풀렸다. 그럼 그렇지. 역시 마사는 마사다. *** 지금 나에게는 당장 눈앞에 닥친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번째, 페르디아 공작이 내준 매달 10 라리트 쓰기 숙제. 대망의 번째, 재수 없기로 이길 사람 없는 카를로트 페르디아에게 외출하자고 말하기. 번째 숙제는 비교적 쉬웠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기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트와네트 거리의 의상실과 보석상을 쓸어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죄책감은 몫이겠지.’

만원도 벌벌 떨면서 쓰던 윤가을의 기억이 떠오른 이상 완전히 과거의 내가 아니었으니까. 특히 금전 감각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나는 엘로디다. 사치를 즐기는 엘로디 페르디아. 페르디아 가문의 사생아고, 10 라리트? . 껌이지. 아주 그냥 간단하게 버리겠어……!’

나는 자기최면을 열심히 하며 양산을 고쳐 쥐었다. 체력이 그렇게 좋지 않은데, 바깥에서 햇볕을 오래 쐬면 쓰러질지도 모르니 더운 여름에 양산은 필수였다. 이윽고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바로 가문 연무장의 입구였다. 아침 훈련 중인지 금속이 맞부딪히고 모래가 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관심도 없는 연무장에 이유는 바로-.

카를로트는 대개 연무장에 있으니까.’

귀한 호위님을 모시러 오기 위해서였다. 페르디아 공작과 호위에 관해 합의한 벌써 며칠이 흐른 지금, 카를로트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공작 부인의 추가 의뢰 수행을 위해서 별채에 틀어박혀 열심히 해독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공작에게 호위를 맡으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극도로 분노한 카를로트가 찾아오리라 생각했건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면 혹시 들었나?’

어찌 되었든 카를로트가 나를 찾아오지 않으니 내가 직접 만나러 수밖에.

오늘은 외출해야 한다고.’

다시금 결연하게 다짐한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 -! 병장기들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카를로트 자식, 어디 있지?”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연무장을 크게 둘러보았다. 기사들은 저들끼리 훈련하는 바빠 내가 있는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히익!”

기사의 괴성을 시작으로 연무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중에는 신나게 검을 휘두르고 있던 카를로트도 있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카를로트를 향해 한가롭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카를. 좋은 아침이야.”

뭐야. 네가 여길 ?”

카를로트가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인상을 걸어왔다. 괜히 쓸데없는 안부로 시간 없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께 들었지?”

듣긴 들어?”

, 호위.”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씨익, 웃었다.

“……!”

챙그랑……. 기사가 목숨처럼 여겨야 한다는 검을 힘없이 떨어트린 카를로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 그거. 아버지께서 농담하신 아니었다고?”

공작에게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믿고 싶은 대로 믿은 모양이었다.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내가 카를로트를 찾는 일은 없었으니까. 처음 며칠만 신경 쓰다가 나중에는 아예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보지. 하지만 카를로트의 사정이 어떻든 내게는 카를로트가 필요했다.

. 그래서 오늘 외출할 거니까 따라와, 카를. 바빠.”

, 내가 ?”

그래? 그럼 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다. 괜찮지?”

말씀드리든가!”

버럭! 잔뜩 뿔이 얼굴로 카를로트가 괜히 소리 질렀다. 이렇게 나오면 평소의 나라면 같이 소리치고 싸웠을 테고, 그럼 소동이 벌어지겠지. 그러다가 사실이 공작의 귀에 들어가면 전부 탓으로 후에 호위는 없던 일로 하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래서 나는 카를로트를 상대하는 대신 산뜻하게 인사하고 뒤돌았다.

알겠어. 훈련 열심히 .”

거침없이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는데, 빠르게 걸어온 카를로트가 앞을 가로막았다.

말씀드리기만 . 가만 테니까.”

짐짓 내리깐 목소리로 무섭게 경고하는 듯한데, 하나도 무서웠다. 성난 고양이가 그르릉 화내는 같달까. 어찌 되었든 가주의 명령이 있는 , 승기를 잡은 쪽이었다. 나는 일부러 올리듯 활짝 웃으며 카를로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나갈 거야?”

! 간다고!”

버럭버럭! 소리란 소리는 카를로트가 떨어트린 검을 주워 들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기다려. 씻고 갈아입고 테니까!”

하여간 성질 하고는.

빨리 다녀와.”

다시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주니까 카를로트가 씩씩대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다루기 쉽다니까…….”

으이구, 단순한 . 얀시 대신 멍청한 카를로트를 선택한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11. 기대란 했을지도 모르지

6–8 minutes


  카를로트와 나를 태운 마차는 수도 솜니아의 대로를 가로지르며 달렸다. 나는 턱을 괴고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수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애초에 카를로트와 살갑게 대화를 나눌 사이도 아닌지라 딱히 침묵이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카를로트가 나를 불렀다.

“…….”

말해, 카를.”

하녀는 데리고 ? 매일 달고 다니던 하녀 있잖아. 미사인가 뭔가 하는.”

아무리 카를로트가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태어날 때부터 나와 붙어 다녔던 하녀인 마사의 이름을 모를 없었다.

유치한 …….’

일부러 이름을 틀리게 말해서 약이라도 올릴 셈인 듯했다. 물론 예전의 나였다면 카를로트의 의도대로 굳이 이름을 정정하며 언성을 높였겠지만, 지금의 나는 제법 이성적이란 말이지. 나는 방긋 웃으며 카를로트에게 대답해 주었다.

. 미사는 다른 일로 바빠서.”

…….”

허탈하게 웃으며 카를로트가 어이없다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 얼굴이었다. 맞은 듯한 얼굴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반대로 기분이 나빠진 카를로트에게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그리고 카를 네가 있으니까 굳이 다른 사람은 없어도 괜찮잖아.”

그건 무슨 의민데?”

그대로의 의미.”

얀시보다는 강하지 않지만, 카를로트 또한 페르디아 가문의 직계로서 파괴 속성 권능을 발휘할 있었다. 카를로트의 권능은지반 붕괴’. 좁은 범위에서부터 상당히 넓은 범위에 이르는 지반을 붕괴할 있는 대단위 파괴 권능이었다. 대규모 전투에서나 쓰일 법한 권능이라, 최근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시대에는 두각을 드러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카를로트는 권능을 제법 마음에 들어 했고, 가문의 기사단에 소속되어 검술을 단련하며 권능을 함께 훈련했다. 심지어 검술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 웬만한 성인 기사와의 대련에서도 우위를 점할 정도라고 들었다. 결론적으로 카를로트는 호위로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강하다는 의미였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게 칭찬인 알았는지 녀석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 내가, , 강하긴, 하지만. , 크흠.”

“…….”

가문의 차남의 지능이 의심스럽다. 페르디아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얀시가 후계자라서 다행이었다. 귀를 붉히고 한참 헛기침을 하던 카를로트가 문득 내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건데?”

트와네트 거리. 있거든.”

트와네트 거리는 초대 황제가 지극히 사랑했다는 앙트와네트 황후의 이름이 붙여진 장소였다.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의상실, 보석점 들이 모여 있는 고급 상업 거리였다.

, 그래.”

보통 내가 외출하면 가는 곳이 트와네트 거리였기 때문에 카를로트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 듯했다. 나로선 잘된 일이었다. 카를로트가 방심하면 방심할수록 속이기 쉬우니까. 이윽고 마차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어느새 도착한 모양이었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카를로트였다. 보통 남녀가 마차에 함께 타면 남자가 먼저 내려 뒤에 내리는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상식이었다. 나를 가족 취급도 하지 않는 카를로트도 상식이 있는지 마차 앞에 서서 내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문득 어릴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아홉 , 카를로트가 일곱 되던 어느 , 우리 둘만 신전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저택에 도착한 그때, 먼저 내린 카를로트가 뒤이어 내리려는 나를 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손잡기 싫어. 알아서 내리든가.”

  그러고는 휑하니 사라지는 뒷모습. 카를로트의 명백한 거부는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애초에 나를 잡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아니, 속상했던 보면 기대라는 했을지도 모르지. 바보같이.  

아가씨. 잡고 내리세요.”

…….”

  그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먼저 나서는 마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었다. 그때는 혼자 내려가기 무서웠던 마차의 높이는,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되었다.

“……!”

나는 손을 내밀려는 카를로트의 행동을 혼자 훌쩍 마차에서 내렸다. 내뻗은 카를로트의 손이 허공을 허무하게 쥐는 보였지만, 외면하고 도리어 카를로트를 재촉했다.

? 빨리 .”

? .”

멍청한 얼굴로 뒤를 따르고 있을 카를로트의 표정을 떠올리며 피식, 쓰게 웃었다.

언제 에스코트 같은 줬다고.’

그런 카를로트와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 내게 주어진 번째 과제. 10 라리트 이상을 써라. 공작이 말한 기존에 쓰던 금액에서추가로 10 라리트였으니 13 라리트 정도는 줘야 문제없을 듯했다. 막중한 사명을 안은 내가 번째로 들른 곳은 최근 레이디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의상실이었다. 말이 사실인지 의상실에는 옷을 맞추러 레이디들이 상당히 많았다.

저기 봐요, 페르디아 둘째 공자님이 오셨어요!”

어디요? 어머, 진짜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얀시와 카를로트는 사교계에서 손꼽히는 신랑감이라고 했다. 정말로 레이디들이 얼굴을 붉힌 카를로트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들의 시선이 불편한지 예민해진 카를로트가 툴툴거리며 뒤를 따랐다.

저택으로 부르든가, 직접 거야.”

이유가 있어.”

이유?”

나는 설명해 주는 대신 몸소 행동으로 실천했다. 의상실에 들어서자마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기성 옷들을 쭈욱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

“……!”

경악하는 카를로트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러려고.”

, , 미쳤어?”

익숙해져, 카를.”

페르디아라면 마땅히 겪어야 인생의 과정이란다, 가짜 동생아. 공작과 사이에 오고 대화를 모르는 카를로트는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없이 댄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정도일 줄이야…….”

이내 심각한 얼굴로 카를로트가 물었다.

아버지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떡하려고?”

아버지가 명령한 일인데. 가당찮은 카를로트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다시 사치에 열중했다.

저쪽 옷들 전부 .”

, 아가씨.”

질린 표정의 카를로트가 옷들을 살피더니 나에게 물었다.

저건 남성용 연회복이잖아. 저건 대체 사는 건데?”

말마따나 정말로 남성용 연회복도 있었다. 무턱대고여기부터 저기까지 했더니 미처 그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제대로 보지도 않고 사는 마당에 남성용이라고 제외할 이유는 딱히 없어서, 카를로트에게 물었다.

……. 입을래?”

나한테 지금, 선물…… 그딴 한다는-.”

그럼 저건 빼지, .”

!”

사냐고 딴지 걸어서 뺀다고 했더니 갑자기 화를 낸다. 이상한 녀석.

갖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알았어, 뺄게.”

뜻이 아니잖아!”

버럭버럭 화내는 카를로트를 무시하고, 의상실 점원에게 페르디아의 인장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고위 귀족들이 대금을 치르는 방식 중의 하나였다. 마법진이 새겨진 인장 목걸이는 도용이 불가하므로 자체로 신분증 혹은 백지수표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물건을 고르고 인장을 보여 주면 대금을 공작가로 청구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러니 개인 자금을 만들 수가 없지.’

샀는지, 얼마나 썼는지 기록되니까.

그것들 전부 페르디아 저택으로 보내 .”

, 레이디.”

시간이 없었다. 계산을 끝낸 나는 곧바로 근처의 보석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매대 하나를 가리켰다.

매대 통째로 살게.”

진짜…….”

어김없이 카를로트가 질겁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만 놀라, 카를.”

얘는 아직 페르디아의 금전 교육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전생의 윤가을처럼 굴다니. 기겁하는 카를로트가 옆에 있으니 오히려 쓰는 쉬웠다.

귀금속까지 샀으니까 이제 됐겠지.’

얼추 14 라리트를 채웠으니 번째 과제는 빠르게 끝냈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인 용건을 해치우러 차례였다. 목적지는 트와네트 거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서마탑이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끝났지? 이제 가자.”

바로 카를로트를 데리고 수는 없다는 . 이래서 호위 같은 필요 없다고 건데. 움직이기가 너무 불편했다. 나는 보석상을 나오며 카를로트를 올려다보았다.

케이크 먹고 싶어.”

케이크? 집에 가서 먹어.”

듣기만 해도 성가시다는 카를로트가 정색했지만 나도 쉬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블랑 블랑> 파티세리의 퐁당 쇼콜라가 먹고 싶단 말이야.”

? 거기 사람 미어터지잖아. 사려면 인간들 틈에서 시간이나 기다려야 되는데.”

나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그렇지.’

그럼 따돌리기 쉬울 아냐.

아무 케이크나 먹으면 되지, 굳이…….”

호위의 본분을 망각한 아냐?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그래, 가자, !”

결국 고집을 꺾지 못한 카를로트가 포기를 선언함으로써 내가 승리했다.

빨리 , 카를.”

진짜 시간 낭비야. 시간 낭비라고…….”

앞서 걸으며 재촉하자 귀찮다는 한숨을 내쉬는 카를로트의 얼굴이 보였다. <블랑 블랑> 솜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파티세리로 황실 파티시에가 은퇴하여 차린 가게라는 특이점이 있어 매일같이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선황제의 총애를 받던 파티시에의 꼬장꼬장한 성격 덕분에 신분을 막론하고 줄을 서서 기다려서 사야만 했다. 보통은 파티세리의 케이크가 먹고 싶으면 하녀를 시켜 기다렸다 오게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파티세리에 도착하자 예상했던 대로 이미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카를로트와 나는 끝에 섰다.

케이크 맛이 거기서 거기지, 여기 케이크를 먹어야겠냐?”

카를. 검도 똑같은 검인데 그냥 값싼 철검을 쓰지 그래?”

그거랑 그게 어떻게 같냐고!”

나한텐 같은데…….”

됐다, 너랑 .”

삐친 건지 카를로트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도 딱히 카를로트와 오붓하게 대화할 생각은 없어서 조용히 줄이 줄어드는 기다렸다. 정오의 햇볕은 아주 뜨거웠다. 양산을 쓰고 있어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지열 탓에 더위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카를. 어지러워.”

가지가지 한다. 그냥 돌아가자.”

이만큼이나 기다렸는데, 그냥 돌아가면 아깝잖아.”

참다 참다 결국 카를로트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렇게 멍청하냐? 이깟 파티세리 그냥 버리면 되지 미련하게 기다리기나 하고!”

페르디아식 금전 교육을 받은 아니라, 뼛속부터 페르디아라 받을 필요가 없었던 거구나…….

가게를 버리면 된다니.’

사고방식이 가히 범접할 없는 수준이 아닌가. 너무 엄청난 발상에 놀란 얼굴로 카를로트를 올려다보자 순간 정신이 건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 내일 하녀더러 오라고 하면 되잖아.”

“…….”

나는 바닥에 시선을 내린 입을 다물고 무언의 시위를 했다. . 이내 억누른 한숨이 들려오더니 카를로트의 손이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럼 저쪽 그늘에서 쉬고 있어. 내가 테니까. , 뭐라고?”

퐁당 쇼콜라.”

그래. 망할 퐁당 쇼콜라.”

카를로트는 잔뜩 성난 것처럼 중얼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줄어드는 줄에 섰다. 나는 카를로트가 가리킨 그늘로 향하다가 문득 뒤돌아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내가 사라지면 쟤가 곤란하겠지.’

조금,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어쩔 없었다. ***

, 저분 페르디아 작은 공자님 아니야?”

말도 . 그분이 여기에 있겠어.”

진짜야! 저기 !”

! 카를 ?”

진짜 카를로트 님이셔!”

여기저기서 자신을 알아보며 꺅꺅대는 통에 카를로트의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내가 이딴 케이크 심부름을…….”

생각하면 할수록 엘로디 페르디아에게 말렸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줄에서 이탈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벌써 절이나 줄도록 기다린 시간이 아까웠다. 아까 엘로디가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기어코 기다린 끝에 드디어 카를로트는 파티세리 안에 입성할 있었다. 계산대에 카를로트가 외운 그대로 주문했다.

망할 퐁당 쇼콜라, 하나.”

, 아니, 퐁당 쇼콜라, 하나. 주문하셨습니다. 필요한 없으실까요?”

-.”

없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종류별로 하나씩 전부, 페르디아 저택으로. 배달도 되지?”

배달은 됩니다만. 전부…… 말씀입니까?”

.”

, 알겠습니다.”

계산까지 마친 카를로트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파티세리를 나섰다.

내가 이렇게나 시간 낭비를 했는데, 고작 케이크 하나만 사는 말도 되지.’

물론 전부 엘로디에게 떠넘길 생각이었다. 산더미 같은 디저트를 보고 놀랄 얼굴을 상상하니 기분이 풀리는 같았다. 그렇게나 먹고 싶은 케이크, 터지게 먹어 보라지.

! 카를로트 ?!”

카를로트 님이잖아?”

여전히 자신을 보며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지나친 카를로트는 엘로디에게 기다리고 있으라 말했던 골목으로 향했다. 거리 끝의 골목 안에 접어든 카를로트는 순간 멍청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양산 하나.

.”

골목.

엘로디 페르디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엘로디 페르디아가 사라졌다.

12. 전생을 아는 남자

6–7 minutes


카를로트 페르디아가 다섯 살이던 때였다. 카를로트에게는 , 누이 명이 있었다. 그중에서 많은 누이인 엘로디 페르디아는 가문 내에서 조금 특이한 존재였다. 특별이 아닌 특이. 누이라면서 카를로트가 다섯 살이 되는 해까지 엘로디의 얼굴을 날은 손에 꼽았다. 카를로트와 얀시, 그리고 페르디아 공작 부부는 저택에서 머물렀지만 엘로디는 별채에서 지냈기 때문에. 어릴 때는 달에 식사하는 자리를 가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욱이 일이 없었다. 카를로트는 누이가 궁금했다. 페르디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짙어서 엘로디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니까. 카를로트는 친구가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런 카를로트의 바람을 이뤄 주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기만 뿐인 부모와 상냥하지만 미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 깍듯이 자신을 모시는 가문의 사용인들. 가끔 또래 영식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한 카를로트는 그런 자신의 가정환경이 평범하지 않다는 알게 되었다. 아이가 소곤소곤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만날 뽀뽀해.”

! 우리 엄마 아빠두!”

다들 자기가 봤다며 난리를 피우는 사이, 카를로트는 멀뚱히 앉은 대화를 듣기만 했다. 뽀뽀는커녕 부모님이 나란히 앉은 적도 없었다. 티타임 때도 분은 대개 마주 보고 앉아 있었으니까. 아이가 줄곧 조용한 카를로트에게 물었다.

카를, 너희 엄마 아빠는 어때?”

우리 엄마 아빠는…… 그래.”

그래? 뽀뽀도 ? 손도 잡아?”

. 잡아.”

4 가문의 직계인 카를로트는 모임 아이들에게 대단한 존재였다. 그들의 부모가 카를로트에게 보여야 한다며 입이 닳도록 말했으니까. 그러나 알게 모르게 카를로트를 질투하던 아이들은 깎아내릴 구석을 발견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카를네 엄마 아빠 그래?”

이상하다!”

아하하하!”

평소에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던 아이들이 짜기라도 일제히 비웃자, 카를로트는 무척 분했다. 하지만 어째서 분한지 이유는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혼자 저택을 탐험하며 놀던 카를로트는 사용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정말 징그럽기도 하지. 엄마 닮아서 생긴 예쁜데 울지를 않는다니까요.”

사생아 주제에 자기가 정말 페르디아라고 생각하는 아니겠죠?”

권능도 발휘하지 하는 페르디아는 무슨 페르디아야?”

엿듣던 카를로트가 눈매를 좁혔다.

누님이, 페르디아가 아니야?’

사이에도 사용인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원래도 각하와 마님 사이가 그렇게 살가운 아니었지만요, 사생아가 들어온 이후로 소원해진 같지 않나요.”

그런가? 그런 같기도 하고…….”

하여간 사생아가 문제라니까. 페르디아의 오점이야.”

사생아. 태어나서 처음 듣는 단어였다.

부모님 사이가 좋은 누님 때문이라구……?’

누님이라고 불러 적도 없는 누이였다. 관심 없던 때에는 전혀 들리지 않던 사용인들의 말소리가 그날 이후로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카를로트는 엘로디가 어째서 별채에서 지내는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아닌 여자가 밖에서 낳아 아이라 별채에서 지내는 거라고 했다. 엘로디가 페르디아에 이후에 부모님의 사이가 나빠졌다는 말도 들었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렸던 카를로트는 사용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고스란히 믿었다. 교육과 훈련 시간만 제외하면 저택의 사람들은 카를로트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저택을 돌아다니던 카를로트는 충동적으로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뜻밖에도 별채 정원에 나와 있던 엘로디를 마주했다. 옅은 백금발에 화사한 분홍 눈동자를 지닌 사랑스러운 소녀가 카를로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누이는 인사는커녕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감히 피해?’

카를로트의 마음속에 치기 어린 감정이 샘솟았다. 그는 엘로디를 삿대질하며 입을 열었다.

사생아.”

……?”

다들 그러던데. 사생아라구.”

엘로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깜빡였다. 그게 마치 자신을 무시하는 같아 카를로트의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사생아는 더러운 거래. 그럼 엄청 더럽겠네!”

더러워. 깨끗이 씻는단 말이야.”

하지만 사생아잖아?”

“…….”

저리 , 사생아.”

카를로트의 작은 손이 엘로디의 어깨를 떠밀었다.

!”

그리 세게 것도 아니었는데 엘로디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야? 약한 척하지 ! 사생아야!”

약한 척한 아니야. 그냥 놀라서-.”

도련님!”

사라진 카를로트를 찾고 있던 하녀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아유, 도련님. 갑자기 사라지시면 어떡해요. 어서 돌아가요. 여긴 오면 된답니다.”

사생아가 여기 있다고 해서 건데.”

, 그런 말씀 하시면 돼요.”

유모는 쓰러진 엘로디를 힐긋 그대로 내버려 카를로트를 챙겨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카를로트는 종종 별채를 찾아가 엘로디에게 말을 퍼부었다. 엘로디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를로트를 무시할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로디에게 폭언을 내뱉으면 사용인들은 카를로트를 과하게 보듬어 주었다. 오히려 못되게 자신인데, 안쓰럽다는 동정의 시선을 받는 것도 그였다.

나는 불쌍해. 사생아 때문에 부모님 사이가 좋잖아.’

사람들의 관심이 좋았다. 비록 부모님의 사이는 여전히 삭막했고, 카를로트에게는 형식적인 의무만 다했지만. 어린 카를로트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 어김없이 충동적으로 별채로 향한 카를로트는 훌쩍이는 울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엘로디 페르디아가 울고 있었다.

죽고 싶어, 유모. 나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아니란 말이야.”

그런 하시면 돼요, 아가씨…….”

엘로디의 유모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이를 끌어안았지만 여전히 엘로디의 어깨는 가늘게 떨렸다.

유모도 사실 같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잖아. 더러운 사생아라구…….”

아이구, 대체 누가 그런 말을……!”

엄마는 정말로 죽었어? 나도 데려가라고 하면 ?”

맙소사! 그분에 대해서는 밖에 꺼내선 돼요. 각하께서 경을 치실 거예요. 아셨죠?”

매번 자신을 무시하던 엘로디가 죽고 싶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은 카를로트에게 충격이었다. 대화를 엿들은 이후로 카를로트는 이상 엘로디를 사생아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진 사이는 돌이킬 없었다. 사람은 서로를 할퀴며 상처 주기에 급급했다. 어쩌면 증오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일지도.

  . . . 하필 지금, 어릴 일이 떠오르는 왜일까. 카를로트는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이를 악물었다.

어딜 거야, 멍청이가…….”

대단하다고 칭송받는 페르디아의 권능도 사라진 사람을 찾는 데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아버지께 알려야 하나? 아니, 그랬다가 나를 무능하다고 생각하시면-.’

무능한 자식이 되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니 엘로디의 실종을 알릴 수는 없었다. 카를로트는 다시 근방을 돌아다니며 엘로디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 멀리 까마득히 높이 솟은 마탑의 모습이 보였다. 대륙에 존재하는 마탑은 개로 각각 사방위를 맡고 있는데, 그중 내가 찾은 곳은 서마탑의 솜니아 지부였다. 문득 햇살이 부시고 손이 가볍다는 깨달았다.

, 양산 두고 왔네.”

마음에 드는 양산이었는데. 양산을 찾으러 다시 돌아갔다가 기껏 따돌린 카를로트와 마주치면 곤란했다. 결국 나는 양산을 포기하고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애초에 오늘 외출 나가기로 생각했을 때부터 카를로트를 따돌리고 혼자 행동하는 계획된 일이었다. 검술 준마스터에 이르는 카를로트의 감각을 속이기 위해선 많은 인파 사이에 숨어드는 좋으므로 일부러 사람이 많은 파티세리로 유도했다. 계획에는 여러 계산이 깔려 있었다.

카를로트는 공작한테 바로 알리겠지.’

자존심 강한 카를로트의 성격상 호위 대상이 사라졌다는 곧바로 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 아마 내가 사라졌다는 알아챈다면 혼자 주변을 수색하며 찾아다닐 것이다. 공작의 귀에 들어가는 또한 예상하지 않은 아니지만 최대한 단계까지는 가지 않기를 바랐다. 카를로트를 따돌리고 어딘가에 다녀왔다는 들키면 근신 처분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전에 파티세리 앞에 도착하는 목표였다.

목말라서 잠깐 근처 카페에 다녀왔다고 둘러대야지.’

핑계까지 생각하며 나는 서마탑 내부로 발을 들였다. 나선형의 계단이 탑의 꼭대기까지 뻗은, 독특한 실내 구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접수처로 향하자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나를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찾으십니까?”

마탑 사업에 투자하려고요.”

최근에는 금광 투자가 활발한데, 그곳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물론 금광 투자도 좋지만 투자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수익을 내기에는 어려웠다. 내가 투자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지명 후원 형식의 투자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 . 물론입니다. 지명하고자 하는 마법사가 있습니까?”

마법사 엘비에게 전액 투자하겠습니다.”

그러자 직원이 믿을 없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

“8 라리트예요.”

직원이 얼떨떨한 얼굴로 돈이 주머니를 들고 갔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법사 엘비는, 투자 홍보 전단에도 나와 있지 않은 신입 말단 마법사였으니까.

정말 8 라리트 전부를 투자하십니까?”

.”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어떠십니까? 좋은 투자 상품이 있습니다만.”

아니요. 전액 투자할게요.”

마법사 엘비에게 투자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투자한 마법사가 조만간 발명할 마도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서 어마어마한 떼돈을 벌어들인다고 속에 나와 있었으니까. 태도가 단호하자 직원도 이상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마법 계약서를 내밀었다. 변장과 위조를 막기 위해 마법으로 당사자임을 증명할 있는 계약서였다.

성함을 말씀해 주시지요.”

어차피 마법 계약서기 때문에 본명을 사용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혹시라도 본명을 썼다가 돈이 어디에서 났는지 추적당하고 결국 권능이 탄로 날지도 모르니, 가명을 쓰는 좋을 듯했다. 그런데 하필 엄마의 이름이 떠오르는 왜일까.

아르셀리아…….’

이름을 곱씹던 나는 기다리는 직원에게 답했다.

리리 아르셀.”

애칭이 리리였지만 리리라는 애칭은 흔했다. 그러니 리리라는 이름을 듣고 나를 연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리리 아르셀 . 접수되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용건까지 훌륭히 완수한 나는 곧바로 마탑을 빠져나왔다. 다시 파티세리로 돌아가면 카를로트가 있을까? 아니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야 하나.

혹시 몰라. 돌아가면 한바탕 난리가 있을지도.’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파티세리를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다급히 달려와 어깨를 붙들어 세웠다.

카를……?’

카를로트인 알았는데, 아니었다. 두드러지게 키에 건장한 체격. 어둠보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과 시선을 사로잡는 붉은색 눈동자.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았다.”

뭐라고 하는 거야?’

제대로 들리지 않아 눈가를 찌푸리며 집중하는 귀로, 한마디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윤가을.”

“……!”

기이한 경험이었다. 마치 목소리가 고막에 아로새기듯 각인되는 감각은.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나를 응시하는 처연한 붉은 눈동자. 나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당신…… 뭐야.”

남자, 전생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13. 내가 죽든 말든 너랑 상관없잖아

6–7 minutes


맹세하건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남자였다. 이렇게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사람을 기억에서 지울 없으니 확실했다. 질문에도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붉은 눈동자에 어른거렸다.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전생의 이름을 알고 있는 남자를 내버려 수는 없었다.

뭐냐고 물었어.”

“…….”

입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자를 본격적으로 추궁하려던 그때였다.

“- 페르디아!”

익숙한 음성이 멀찍이서 들려왔다.

카를로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카를로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근처 골목에 있는 듯했다.

돌아가야겠어. 전에 남자 정체를 알아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찰나였다. 코끝에 낯선 향기가 스치더니-.

머지않아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낮고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을 ,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나는 바로 전까지 남자가 있던 자리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대체 뭐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정말 찰나의 만남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듯한 감각. 그러나 그런 감상에 한가로이 빠져 있을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나를 발견한 카를로트가 보폭으로 다가와 어깨를 붙들었으니까.

, ……! 갑자기 사라지면 어떡해? 대체 어딜 다녀온 거야?”

미간을 좁힌 카를로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붙잡힌 어깨에 압박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호위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아무리 트와네트 거리라도 혼자 돌아다니면-.”

?”

짧은 물음에 카를로트가 멈칫하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멍하니 반문했다.

?”

이해가 돼서.”

뭐가 이해가-.”

내가 죽든 말든 너랑 상관없잖아.”

……. 어깨를 붙잡고 있던 카를로트의 손에 힘이 풀리더니 이내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놀란 반응을 보이는 카를로트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호위도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나쁜 일을 당해도, 그러다 설사 정말로 죽어 버린다고 해도 카를로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애에게 가족이 아닌 그냥 사생아일 뿐이니까, 죽음이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한다는 알았다. 누구보다 내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

그게 너잖아, 카를로트.’

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어렸을 더러운 사생아는 죽어 버리라던 카를로트의 말을. 나보다 어렸던 카를로트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색이 카를로트를 올려다보았다. 저러는 이유를 완전히 짐작 하는 것도 아니었다. 카를로트는 페르디아의 사람 중에서 가장 페르디아답지 않은 아이였다. 공작 부인에게도 공작에게도 끊임없이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니 공작에게서 나를 호위하라는 명을 직접 받아 놓고서 한순간 놓친 자존심 상해서 그러는 것일 . 내가 사라진 상황에도 결국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찾아다닌 것만 봐도 그랬다.

진짜로 납치라도 당한 거였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한가로이 하며 카를로트를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아무 없이 돌아왔으니까 됐잖아.”

혹시나 어딜 다녀왔는지 물어볼까 조금 걱정했지만, 의아하게도 카를로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모를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 혹시 호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멋대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없으니 카를로트를 달래듯 한마디 덧붙였다.

아버지께는 아무 거니까 너도 괜히 책임감 느낄 필요 없어. 괜한 소란 피우지 .”

외출하고 한번에 많은 일을 해서인지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집에 돌아가서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게 들었다.

돌아가자, 카를.”

“…….”

나는 주먹을 있는 카를로트를 지나쳤다. 그의 다른 손에는 내가 잃어버린 양산이 세게 쥐어진 들려 있었다. *** 돌아오는 내내 마차 속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카를로트는 입을 다문 창밖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가 단독행동을 했다고 화가 나기라도 모양이었다. 그런데 의외인 불같이 날뛸 알았던 카를로트가 얌전하다는 것이었다.

철들었나?’

그럴 리가. 카를로트가 어떻든 내게는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나를 붙잡았던 붉은 눈의 남자.  

윤가을.”

  잘못 들은 아니었다. 정말로 남자는 전생의 이름을 불렀다. 엘로디 페르디아가 아니라 윤가을을. 그냥 넘어가기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에 잠긴 나는 이런저런 가설을 세웠다.

남자도 속에 환생한 걸까.’

가장 유력한 , 남자도 나와 같이 속에 환생한 처지라는 거였다. 혼자만 환생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이름을 아는 보면, 전생의 나를 알고 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본 거지?’

전생에 척진 사람이라도 되나. 그렇게 적을 만들고 다니진 않았던 같은데……. 혹시나 원작에 흑발에 적안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어쨌든 남자의 등장이 과연 내게 득일지 실일지 없었다.

이제 겨우 독립자금 모을 준비를 시작했는데, 방해꾼이 생기면 곤란해.’

먼저 나를 찾아오겠다고 남자가 말하긴 했는데,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고 찾아온다는 걸까. 하여간 너무 베일에 싸인 남자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마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에 마차에서 내려 별채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돌자 여전히 굳은 카를로트가 있었다.

?”

들어와서 가져가. 케이큰가 뭔가.”

, 맞다.”

카를로트를 떼어 놓기 위한 핑계라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연히 퐁당 쇼콜라만 있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저택에 들어간 나는 눈을 휘둥그레 수밖에 없었다. 디저트 상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렇게 많이 건데……?”

물음에 카를로트가 당연하다는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했다.

기껏 기다린 받고 아까워서.”

그래, 그렇구나…….”

다행이었다. 페르디아의 둘째 아들놈이 그나마 가게를 통째로 사지는 않았으니까……. *** 별채 계단 앞에 온갖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공작의 숙제로 내가 트와네트 거리의 의상실과 보석상에서 쓸어 담은 쇼핑 품목들과 카를로트가 파티세리에서 종류별로 왔다는 디저트 상자였다. 나는 물건들을 옮기고 있는 사용인에게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연회복은 카를로트에게 전해 .”

나한테 필요 없는 남성용 연회복을 카를로트에게 떠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 계단을 내려온 마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가씨, 상자들은 뭐예요?”

디저트. 가져가서 별채 사용인들이랑 나눠 먹어.”

세상에! 신난다! 감사해요, 아가씨!”

마사가 디저트 상자들을 열어 보며 꺅꺅 소리 질렀다. 워낙 단것을 좋아하는 마사는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거라면 사족을 쓰는 소녀 취향이었다. 그러고 보니 젊고 잘생긴 남자도 좋아해서 귀족 영식들을 줄줄이 외우고 있었지.

붉은 남자, 기품이 흐르는 평민 같지는 않았는데.’

마사가 수도 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마사. 혹시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 가진 20 초반? 정도 되는 남자에 대해서 알아?”

“20 초반 영식들은 웬만큼 꿰고 있는데…… 그런 외모 특징 가진 사람은 없네요. 왜요?”

아니야.”

아닌 아닌 같은데요. 혹시 반했다거나?”

마사가 은근하게 물었지만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단호하게 대화를 끊어 냈다.

목욕물 준비해 .”

네에.”

마사가 입술을 삐쭉이며 계단을 올랐다.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위험해.’

남자가 나를 찾아오기 전에 내가 남자를 찾아내서 정체가 뭔지 알아내야겠다. . . . 목욕을 끝내고 나오자 테이블 위에 황실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 있었다.

아가씨. 1황자 전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어요.”

그래.”

저번 황제 탄신 연회에서 신나게 발을 밟은 이후로 처음 연락이었다. 소파에 앉아 서신을 펼쳐 나는 눈매를 좁혔다.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떤 날짜가 좋겠냐는 용건이었다. 하지도 않던 약혼자 행세라도 하려는 걸까. 이상 1황자에 대한 일말의 미련도 없는 내게는 귀찮은 용건일 . 나는 곧바로 펜을 들어 답신을 썼다. 축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 무례를 용서하시길.] 격식만 겨우 차린 답신을 봉인한 나는 곧바로 사용인을 불러 서신을 보냈다.

오라 가라야?’

사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1황자도 파혼하고 싶어질 거라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

몰래 사라졌다고…….”

검은 장갑을 얀시의 가는 손가락이 수하에게 받은 보고서를 가만히 쓸었다. 보고 대상은 엘로디 페르디아. 최근 달라진 행동이 신경 쓰여서 사람을 붙여 두었다. 그동안은 별채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아 특이점이 없었는데, 오늘 외출에서 돌발 행동을 벌였다. 보좌관의 변절을 알아채 페르디아 공작에게 알려 일로 근신 해제를 받은 엘로디가 카를로트를 호위로 삼아 외출한 것까지는 알았는데.

.”

카를로트가 파티세리에 들른 사이 엘로디가 몰래 향한 곳이 제법 흥미로웠다. 마탑이라. 밀착 감시가 아니라서 갔는지까지는 보고로 올라오지 않았지만 알아내고자 한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알아낼 있었다.

일단 그건 두고.’

흥미로운 내용은 따로 있었다. 카를로트가 엘로디를 찾아내기 직전, 엘로디가 마주쳤다는 어떤 남자에 대한 보고였다. 남자가 누구인지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 정말로 의외의 존재였다.

내가 알기로 자와 엘로디는 접전이 전혀 없는데.’

있을 리가 없었다. 그자와 페르디아의 영애, 사는 세계가 아예 달랐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집무실 밖으로 나온 얀시는 복도에서 카를로트와 마주쳤다.

카를. 외출은 즐거웠니?”

보고를 받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연기하는 얀시의 태도는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수상함을 느끼지 못한 카를로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

힘들었나 보네. 다음 외출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내가 같이 나갈까?”

선심 쓰는 말하지만 얀시에게는 의도가 있었다. 엘로디의 호위로 외출하게 되면 가까이에서 관찰할 있을 테니. 그런데 카를로트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다. 카를로트는 흠칫, 몸을 굳히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어. 싫어하잖아.”

엘로디를 싫어하는 카를 아니었어?”

“…….”

원래라면 당연한 물어보냐고 카를로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먼저 잘게. 하던 호위 했더니 피곤해서.”

얀시는 카를로트가 질문의 답을 나게 피하는 알았지만 모른 넘어갔다.

그래. 자렴, 카를.”

동생에게 인사하는 얀시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미소는 카를로트가 뒤돌아 사라지자마자 사라졌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무감한 얼굴. 어느 날을 기점으로 엘로디 페르디아가 바뀌었다. 행보가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의 보좌관이 2황자와 내통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채 색출해 것부터 이상하지 않은가. 그가 아는 엘로디 페르디아는 그렇게 비상한 눈치를 가진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최근 들어 가문 분위기도 이전과 사뭇 달랐다. 가문 식사 시간에도 엘로디와 대화조차 하지 않던 어머니와 종종 티타임을 가지고. 엘로디에게 관심 없던 아버지는 굳이 아들 하나를 호위로 붙여 주었고. 오늘 보인 카를로트의 행동도 수상했다. 모든 것이 통제 안에 있어야만 하는 얀시에게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처 없이 걷던 얀시의 발길이 닿은 곳은 정원이었다. 얀시의 손길이 무심코 장미 송이에 닿았다. 사아아-. 저도 모르게 발현된 소멸의 권능 탓에 장미가 시들더니 이내 불어온 바람에 흩어졌다. 얀시의 표정이 이내 허물어졌다.

‘…….’

능력이 제멋대로 발현되었다. 순간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올랐다. 얀시는 입가를 눌렀다. 속이 좋지 않았다.


 

14. 해결사 엘로디?

6–7 minutes


  어쩌다 이렇게 걸까. 나는 예정에도 없던 식사 자리에서 그저 머쓱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페르디아 저택의 만찬실. 페르디아의 모든 일원이 참석한 이곳에는 약혼자랍시고 옆에 앉아 있는 1황자까지 있었다.

급작스러운 방문이었을 텐데도 이리 맞아 주다니. 페르디아의 환대에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

1황자의 말에 공작 부인이 고아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황자 전하를 모시게 되어 오히려 영광입니다. 부디 식사가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황성 만찬 못지않군.”

과찬이십니다.”

하하호호. 공작 부인과 1황자가 주고받는 가식적인 인사에 넌더리가 정도였다. 얀시와 카를로트도 대화에 참여해서 한마디씩 거드는 가운데, 나는 눈앞의 음식만 깨작거렸다.

별채로 돌아가고 싶다…….’

분명 이런 식사 자리는 예정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런데 어쩌다 불편한 만찬이 열리게 되었는가? 시간은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 . 어제 외출을 다녀와서인지 눈을 시간은 정오를 넘긴 느지막한 시각이었다. 작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자 마침 마사가 침실에 들어섰다.

아가씨, 오늘은 하실 거예요?”

오늘은 권능 연습이나 하려고.”

마사에게 말하는 권능 연습은 공작 부인에게 납품할 해독제를 만드는 일이었다. 독을 파괴하는 권능이라고 둘러댄 정말 잘할 일이었다. 다행히 아무런 의심도 사지 않았으니까. 한번 시작하면 며칠 내내 체내에 남아 있는 독성 때문에 침실 밖으로 나갈 없기 때문에 마음먹고 시작해야 했다. 간단하게 씻은 책상에 앉은 나는 공작 부인에게서 받아온 독들을 늘어놓았다.

이번에도 내가 부르기 전에는 들어오지 .”

, 아가씨. 다른 별채 사용인들도 침실 근처에 오지 말라고 할게요. 필요하시면 설렁줄 당겨 주세요.”

해독제를 만드는 동안 익숙해졌다고 마사가 든든하게 당부 사항을 밖으로 나갔다. 번째로 집어 독은 방울만 먹어도 호흡기관을 마비시켜 숨을 쉬지 못하다가 질식사로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극독이었다.

이건…… 최소 3, 아니 4일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을 독성이다.”

하지만 독립자금을 벌기 위해서는 별수 없는 . 심호흡하며 뚜껑을 열었을 바로 그때였다. 똑똑-. 난데없는 노크 소리에 문가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자연히 나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부르기 전에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러자 마사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게…… 1황자 전하께서 방문하셔서요.”

‘1황자?’

1황자라면 어제 만찬 초대에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 서신을 보냈었는데. 성가시긴 했지만 그렇다고 직접 발걸음한 황족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으니 얼굴을 비추긴 해야 했다.

응접실에 모셔라.”

그러려고 했는데요.”

마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공녀. 몸은 괜찮은가?”

‘…… 인간이 침실 앞에 있어?’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아무리 약혼한 관계라고 한들 침실 앞까지 들어오다니. 하지만 상대는 황족, 그것도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니 불만을 내비칠 없었다. 감히 황족의 초대를 거절한 나야말로 먼저 무례를 저질렀기 때문에, 1황자에게 뭐라 없는 처지기도 했다. 어휴. 외출복이 아니라 단출한 실내복 차림이라 격식에 맞지 않겠지만, 어때. 정도는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쳐들어온 사람이 이해해야지. 문을 열자마자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자연스럽게 있는 1황자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도 눈부신 외모였다. 살짝 흐트러진 은색의 머리칼이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와 어울렸다. 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몸이 좋은가?”

덕분에 많이 나아졌답니다.”

1황자가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독을 마시고 골골대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겠지. 이미 눈앞에서 쓰러진 전적이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괜한 수작 부린다고 착각하면 받으니까.’

그보다 1황자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정말로 상태가 어떤지 알고 싶어서 왔을 리는 없을 테고.

아버지를 뵈러 오셨나요?”

그렇게 묻자 1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생겨서 공작과 논의하러 김에, 공녀가 몸이 좋다고 기억나서.”

괜찮은 보셨으니 이제 그만 보세요.”

이만 사라지라는 말을 완곡하게 돌려 말했건만 1황자는 뻔뻔하게도 안으로 걸음 내디뎠다.

공녀와 마실 시간은 충분한데.”

어쩌죠. 찻잎이 떨어져서.”

그럼 물이라도 상관없어.”

인간이 대체 이러는 걸까. 기어코 안으로 밀고 들어온 1황자는 당당하게 소파를 차지했다. 트레이를 끌고 마사가 차를 끓여 내놓았다. 찻잔을 들어 모금 마신 아덴미르가 , 미소 지었다.

찻잎이 없다더니, 크룬델 특상품 찻잎이군.”

있었나 봐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해도 1황자는 아주 조금도 기분 나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차를 마시던 1황자의 시선이 마사에게 향했다. 그것도 제법 오랫동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마사한테 반한 건가?’

안타깝게도 마사 이상형은 예쁘게 생긴 남잔데. 이윽고 마사가 트레이를 끌고 나가자 1황자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주인도 제대로 모실 모르는 사용인은 해고하는 좋겠어, 공녀.”

반하긴커녕 뜻밖의 해고 권유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전속 하녀가 전하께 무례를 범하기라도 했나요?”

그러자 1황자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미간을 좁혔다.

일전에 그대가 쓰러졌을 , 하녀는 놀라지도 않더군. 주인이 쓰러졌는데 그렇게 덤덤할 수가 있나?”

아아…….”

충격받은 모양이지. 이해해.”

하하.”

나라도 신뢰하던 자가 그리 행동했다면 충격이었을 테니.”

1황자가 내게 공감을 시도했지만,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조언하니 웃겼다.

아니, 웃겨.’

우리 불쌍한 마사……. 이상 안쓰러운 마사에 대한 화제로 대화할 없으니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께서 전하를 기다리실 듯한데요.”

약혼녀를 만나는데, 공작도 이해해 주겠지.”

아닐 같은데……. 떨떠름한 얼굴로 차를 모금 마실 때였다. 1황자의 시선이 어깨너머 책상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독약 병들이 있었다. 본다고 단번에 독인 알아보진 않을 테지만 혹시 몰라 은근슬쩍 몸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우려와 달리 1황자는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몸도 괜찮아 보이니 공녀도 함께 참석하지.”

참석해요?”

저녁 만찬. 공작에게 초대받았거든. 가족들이 참석한다던데.”

갑자기 이게 날벼락일까. 달에 가족 식사도 귀찮은데, 1황자까지 가족 식사라니.

몸이 좋지 않아서-.”

괜찮아 보이는데. 혹시 그대, 꾀병은 아닌가?”

그게 아니라-.”

공작에겐 내가 말해 놓지. 저녁까진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준비하도록.”

잠깐만요, 전하!”

. 1황자는 답도 듣지 않고는 훌쩍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마치 본인이 만찬 주최자인 듯한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누가 황족 아니랄까 …….”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마음속으로 중지를 올렸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사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아가씨. 전하께서 뭐라고 하셔요?”

해고하래, 마사.”

? 왜요? 나만큼 아가씨 생각하는 하녀가 어디 있다고. , , ?”

이제부터 1황자와 파혼을 강력히 밀어 주겠다는 마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만찬.

가기 싫다!’

  *** ……라고 격렬히 생각했지만 공작이 직접 집사를 보내는 바람에 결국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기왕 만찬에 김에 끝내주게 맛있는 식사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본격적으로 스푼을 들었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의 대화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다. 공작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1황자가 여기까지 친히 방문한 이유기도 했다.

그래. 앙겔로스에서 군수물자 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더군.”

말에 얀시가 웃으며 대답했다.

남마탑과 최근 교류가 잦더니, 아무래도 마도구 제작도 이미 들어간 듯하네요.”

그냥 흘려들으려고 했지만,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 그럴 수가 없었다. 속에 나와 있던 사건이었으니,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았다. 사건의 원흉은 앙겔로스 가문. 재생의 권능을 부여 받은 4 가문 하나이며, 명예를 드높이고 재산을 부풀리는 혈안이 자가 그곳의 가주였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지 1황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마도 갑옷 부재료인 마석 광산을 전부 낙찰받고 있다고 하는군요.”

문제는 바로 이거였다.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앙겔로스의 사업 수법이 가히 더러웠다. 주로 들어가는 재료를 독점한다는 , 노골적으로 페르디아의 사업 하나를 망하게 하려는 속셈이 아니던가. 물론 페르디아에서도 보유한 광산이 있어서 당장 문제는 없겠지만, 장기간으로 가면 재료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힘들 것이다.

큰일이네요.”

공작 부인이 가소롭다는 웃으며 말했다. 큰일이라는 사람치고 너무 여유로운 아닌가.

그럼 우리도 마석 광산을 매입하는 어떤가요. 조금이라도 확보해 두는 좋을 듯합니다.”

얀시가 해결책을 냈지만 금세 1황자에 의해 기각당했다.

한발 늦었어. 이미 앙겔로스에서 대부분 마석 광산 낙찰을 마친 상태다. 지금 나서는 의미가 없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나는 한가롭게 식사를 즐겼다. 이미 미래를 알고 있는 나는 딱히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망하니까.’

바로 앙겔로스가. 얼마간 고전하던 페르디아는 이내 해결책을 떠올린다. 바로 얀시가 꾀를 것이다. 물론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손해를 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페르디아가 승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풀리기도 하고, 내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관심을 껐다. 그리고, 그때.

엘로디.”

“……?!”

갑자기 불린 이름에 고기를 우물거리다 말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공작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먹고 대답하거라.”

입에 음식이 있어서 대답도 하고 씹는 동안에도 공작은 나를 기다려 주었다. 꿀꺽. 얼른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공작에게 물었다.

부르셨어요?”

생각이 궁금하구나.”

의외의 말에 만찬실의 모든 이가 놀랐다. 물론 나도 놀랐다. 의견을 물어본 적이라곤 번도 없는 공작이, 굳이 생각을 물어본다고?

공작이 이상하다……!’

나를 호출하거나, 호위를 붙이거나, 하물며 의견을 묻기까지. 이렇게 하던 짓을 하는 거지? 그것도 내가 전생을 깨달은 기점 이후로. 얀시가 난처하게 웃으며 공작을 만류했다.

아버지. 리리가 대답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는 당연했다. 그간 나는 가문의 대소사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혹시라도 관심을 가지면 공작 부인이 견제할까 조심했던 거였지만.’

카를은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고, 공작 부인은 그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들 얀시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분명했다. 하지만 공작은 뜻을 꺾지 않았다.

얀시 의견을 묻지 않았다.”

서늘한 시선에 얀시의 미소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엘로디.”

공작은 얀시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이름을 불렀다. 나는 갈등에 빠졌다. 난관을 해결할 해결책을 알고 있지만, 그건 미래의 얀시가 떠올릴 방법이었다. 지금 내가 말하면 얀시의 공적을 뺏게 되니까 껄끄러웠다. 하지만 지금 개입한다면 무의미한 시행착오를 막을 있는데…….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방법이 있어요.”

  그럴 알았다는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얀시가 내게 물었다.

무슨 방법이니?”

그건…….”


 

15. 감히 페르디아를 건드린 대가

6–7 minutes


나는 얀시를 흘끔 말을 이었다.

아무리 앙겔로스라고 해도 마석 광산을 사들였다면 재정적으로 상당히 무리했을 거예요.”

마석 광산의 수가 그렇게 많은 아니라지만 윌렌티아 제국 내의 웬만한 마석 광산을 사들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앙겔로스로서도 한계까지 자금을 끌어 썼을 . 페르디아 가문은 앙겔로스의 독점에도 향후 년은 충분히 버틸 있겠지만, 군소 상단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군수물자 사업을 모조리 앙겔로스가 먹겠다는 포부가 보이는 부분이었다.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페르디아 공작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페르디아도 똑같이 독점하면 되죠.”

아까 말했잖아, 리리. 마석 광산은 이미 앙겔로스에서 대부분 낙찰을 끝마쳤어.”

얀시가 마치 타이르듯 다정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독점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마석 광산은 필요 없어요.”

?”

군수물자를 만드는 사용되는 재료는 마석뿐만이 아니잖아요?”

“……!”

다른 재료들을 모조리 사들이면 돼요.”

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말에 줄곧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1황자마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도로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지다니, 새삼 이전의 평판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어쨌든 제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는 앙겔로스라도 축적된 보유 재화는 페르디아와 비교할 없었다. 페르디아 공작은 암흑가의 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뒷세계를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황가도 접을 정도의 권력이었다.

앙겔로스 가문은 군수물자 사업에 뛰어든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다른 재료들의 거래처가 많지 않을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결국 페르디아에 손을 뻗게 거고, 그때 앙겔로스에게 비싼 값으로 재료를 파는 거죠.”

그렇게만 되면 게임은 이미 끝난 셈이었다.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에 동조했다.

그래, 당장 사업을 유지하려면 우리 가문의 물자를 수밖에 없겠지. 얼마를 부르든.”

하지만 결국 손해만 테니, 군수물자 사업에서 손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앙겔로스의 가주도 머리가 있다면 패배를 인정할 것이다. 막대한 손해를 안고도 군수물자 사업을 고집할 머저리라면 가문의 가주 자리를 꿰차고 있을 없으니. 어차피 페르디아는 군수 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으니 재료 수급처를 늘린다고 해도 크게 손해 일은 없었다.

얀시. 앙겔로스의 재정 상황에 대해 파악해 보아라.”

, 아버지.”

카를로트. 너도 얀시를 도와라.”

. 제가 다른 재료들 입찰을 맡겠습니다.”

아들에게 명령을 내린 페르디아 공작이 비스듬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논의는 끝났군.”

시선의 끝에는 내가 있었다. 마치 그럴 알았다는 당연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저 어색하기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후 계획에 관해 토론하는 공작과 1황자의 대화를 듣다가 문득 얀시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수가 없었다.

그래, 리리?”

아니야.”

미래에 얀시가 생각해 계책을 것인 미리 말한 양심이 조금 아팠다.

대단하구나, 엘로디.”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이 요요하게 웃으며 칭찬해 주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나댔나……?’

분명 주제를 안다고, 아들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면서 마치 기다렸다는 해결책을 제시해 버리다니.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앙겔로스의 횡포에 애꿎은 군소 상단들이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만 빠져야지. 부디 공작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길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속이 좋아서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다음부턴 적당히 나대야지……!’

그런 다짐을 하면서. *** 엘로디가 황급히 식당을 빠져나가자 공작 부인이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 저리 급히 나가다니, 몸이 그렇게나 좋은 걸까. 카를로트, 따라가 보겠니?”

, 내가 !”

흐음?”

알아서 하겠지. !”

카를로트가 버럭버럭 소리치자 공작 부인도 재차 권하진 않았다.

아들이지만, 정말 못났구나.”

, 가볍게 혀를 찼을 .

황자 전하께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하네요.”

부인의 말에 아덴미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모습이라고 것까지야. 그보다 놀랍군요. 약혼녀가 상황을 해결할 거라고는 상상도 했습니다.”

최근 우리 리리가 부쩍 생각이 깊어졌답니다. 성인식이니 딴에 어른스럽게 구는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아덴미르는 손안의 약병을 가만히 굴려보았다.

생각이 깊어졌다라.’

그것은 엘로디의 침실 책상 위에 있던 약병 하나였다. 아덴미르는 자신이 약병을 향해 시선을 주자 엘로디가 은근슬쩍 몸으로 가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숨기는 거지?’

생각이 깊어졌다거나 어른스러워졌다는 것으로 설명할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것처럼 정반대로 달라진 태도. 페르디아 가문 내의 미묘한 위치. 오늘 보인 의외의 면모까지. 약병에 것이 무엇인지 알아낸다면, 엘로디가 숨기고 있는 것에 조금쯤은 접근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아덴미르의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 로드리고 앙겔로스. 앙겔로스 공작가의 가주인 그는 야망이 가득한 사내였다. 태생부터 남들과 다른 4 가문 출신이었으며, 후계자였고, 제법 눈치가 빨랐다. 로드리고 앙겔로스의 목표는 하나였다. 모든 가문을 짓누르고 앙겔로스가 최고가 되는 . 계획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없이 실베스터 페르디아였다.

재수 없는 새끼.’

앙겔로스 공작은 페르디아 공작을 극도로 증오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번째, 본인이 뭐라도 되는 사람을 깔아 보는 오만함이 싫었고. 번째, 같은 4 가문 출신이며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비교당하며 왔던 세월을 떠올리면 이가 갈렸고. 번째, 같은 나이임에도 경지에 올라 나이 같지 않은 젊고 수려한 외양을 가져 사람들의 찬탄을 받는 것이 보기 싫었으며. 번째, 그자의 아들인 얀시 페르디아가 재수 없었고. 다섯 번째, 음지를 장악하여 사업에 번번이 걸림돌이 되는 페르디아가 방해였다. 외에도 페르디아 공작이 싫은 이유를 대라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연설할 있을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는 페르디아의 사업 하나를 철수시킬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런 생각을 해내다니, 그자도 범상치 않은 인간이야.”

자신을 찾아와 조언해 자를 떠올리며 앙겔로스 공작은 가장 좋아하는 술을 여유로이 즐겼다. 마석 광산을 모조리 사들였으니 아무리 페르디아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자급자족도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매장된 자원은 결국 끝을 드러낼 테니까. 마도 갑옷을 제작하는 들어가는 마석의 양은 상당히 많았으므로 페르디아 소유의 광산에서 채굴되는 양으로는 감당할 없을 것이다. 황실에 납품하기 위해서는 일정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데,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외의 무역로를 뚫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외국에서 오는 동안 매겨질 관세를 생각하면 결국 손해였다. 마침 보좌관이 집무실에 들어와 상황을 보고했다.

각하. 낙찰을 끝마쳤습니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어음을 발행하여 대금도 치렀습니다.”

, 그렇다면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이건 고작 시작이었다. 암흑가의 지배자인 페르디아가 대외적으로 벌이는 사업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군수물자 납품. 고작 사업 하나를 철수한다 해도 페르디아는 끄떡없을 것이다. 하지만 앙겔로스 공작의 계획은 보다 미래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바라는 것은 확실했다. 페르디아의 몰락. 앞으로 하나하나 무너뜨리다가 결국 페르디아를 집어삼킬 것이다. *** 페르디아 공작의 집무실. 집무 책상 앞에 앉은 공작의 앞으로 아들이 보고를 위해 있었다.

보고하거라.”

. 리리가 말했던 그대로입니다. 앙겔로스에서는 모든 자금을 끌어모아 마석 광산을 매수했다고 하네요.”

얀시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카를로트도 입을 열었다.

브루만 일대의 광산과 다른 재료 수급처를 모두 매수했습니다.”

앙겔로스에서는 거래처가 원활하지 않은 재료들입니다. 또한 리리의 예상대로입니다.”

보고를 들은 공작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라.”

감히 페르디아를 건드린 대가를 치를 때였다. . . . 며칠 , 앙겔로스 수도 저택. 공작의 집무실로 보좌관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공작 각하, 페르디아가……!”

, 페르디아! 드디어 군수물자 사업을 철수한다더냐?”

오매불망 페르디아의 실패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앙겔로스 공작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보좌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 아닙니다.”

그러면?”

페르디아에서 브루만 일대 광산을 모조리 사들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재료들의 수급처가 막혔습니다. 페르디아가 아니면 거래할 곳이 없습니다!”

“……!”

앙겔로스 공작은 눈을 홉떴다. 젠장.

당했다.’

곧바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가 사용한 수법을 페르디아 공작이 고스란히 돌려준 것이다. 전혀 예상 했다.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시간을 끌어봤자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다른 재료를 페르디아에서 독점하고 있다면, 분명 비싼 값으로 팔아치우려 것이리라. 그러니 손실이 커지기 전에 사업을 철수하는 옳은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분노가 차오르는 것은 막을 없었다. 앙겔로스 공작이 씨근거리며 화를 가라앉히려 애를 쓰고 있을 그때였다. 똑똑-. 열려 있는 집무실의 문을 굳이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알맞게 찾아왔나 보군.”

실베스터…….”

소리소문없는 방문은 아마 저택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실베스터 페르디아의 기척을 알아차릴 실력자가 저택에 있을 만무하므로. 페르디아 공작이 물었다.

선물은 어떤가.”

, 치졸하기 짝이 없군. 이따위로 나올 줄이야.”

페르디아에게 정의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고. 그보다 로드리고 자네 입에서 치졸이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자기소개인가?”

“……정정당당하게 사업을 경쟁하려고 했을 뿐이네.”

정정당당. 안타깝지만 나와는 거리가 단어군.”

일부러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다분한 페르디아 공작의 도발에 앙겔로스 공작은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혔다.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예상할 있었다. 실베스터 페르디아의 첫째 아들인 얀시의 머리가 그런 쪽으로 돌아가는 알았지만, 이렇게 단번에 해결책을 찾아낼 줄이야.

보나 마나 얀시 페르디아 그놈이 꾀를 것이겠지…….”

예상이 틀렸군, 로드리고.”

? 얀시 페르디아가 아니라면-.”

글쎄.”

아니라고? 그렇다면 누구지?

알아봐야겠다.’

이것은 쉬이 무시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페르디아 가문에 견제할 인재가 생겼다는 의미가 아닌가. 페르디아 공작은 앙겔로스가 궁금한 표정을 짓건 말건 뒤돌아 밖으로 나섰다. 말쑥한 얼굴이 구겨지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딸에게 상이라도 주어야겠군.”

누가 뭐래도 이번 사건 해결의 주역은 그의 막내딸 엘로디 페르디아였다. 공작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16. 잘했다, 엘로디

6–7 minutes


  [앙겔로스 가문, 돌연 군수 사업 철수 선언!] [마석 광산 팔기 위해 내놓았지만, 사는 사람이 없어…….] [브루만 일대 광산, 페르디아의 손아귀에 들어가다!] 제국의 여러 신문사에서 앞다투어 앙겔로스 가문의 변심에 대해 떠들었다. 동시에 페르디아가 브루만 일대 광산을 매수한 것을 대서특필했다. 대놓고는 아니지만, 페르디아를 띄워 주며 앙겔로스를 풍자하는 기사들이었다. 완벽한 페르디아의 승리였다.

아저씨, 지금쯤 되게 화가 났겠는데.”

원작에서 앙겔로스 공작은 악역인 도로테아 앙겔로스의 아버지로 나왔다. 욕심이 많고 페르디아 공작가를 견제하며 사사건건 방해하는 인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접점이 없어서 대화를 나눠 적은 번도 없지만, 겉으로는 제법 멀끔하게 생겨 신사처럼 구는 그런 아저씨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기사가 나오는 훨씬 시간이 지난 이후겠지만 내가 개입함으로써 금세 해결되어 버렸다.

좋은 좋은 거겠지.’

나이가 때까지 나를 키워 은혜를 갚는 치면 되니까. 그렇게 트와네트 주간지를 뒤적거리며 뭔가 나올 구석이 없는지 골몰히 생각했지만 역시 사업 밑천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수가 없다는 깨달았다.

해독제나 만들어야겠다.”

얼마 전에 만들려고 했을 , 하필 1황자가 오는 바람에 마시려다 말고 만찬실에 가야만 했었지. 다시 책상에 앉은 나는 독약 병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줄어든 같지?’

굳이 독약 병의 개수를 일일이 세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느낌이 이상했다. 나중에 부인께 여쭤봐야지. 독약 하나를 쥐었을 ,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나는 직감했다.

오늘도 텄다…….”

오늘도 해독제를 하나도 만들 없다는 것을. 출입을 허락하자 깐깐한 얼굴의 집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가주께서 부르십니다. 서두르시지요, 아가씨.”

나를? ?”

제가 감히 주인님의 뜻을 헤아릴 없지만, 아무래도 이번 앙겔로스 가문과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심이 아닐는지요.”

페르디아 공작의 성격상, 저번에 보좌관이 배신자인 것을 알아냈을 때처럼 이번에도 보상을 주려는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해결은 사실 미래에 얀시가 해결책을 훔친 것과 다름없으므로 내가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하면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오라면 가야지. 잠시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선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이번 일의 해결을 아들에게 맡긴 만큼 당연히 얀시와 카를로트도 있을 알았는데, 공작과 단둘이일 줄이야. 내가 쭈뼛거리며 주춤주춤 다가가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보던 공작이 시선을 들었다. 선명한 금안이 나를 응시했다.

긴장 풀거라. 잡아먹을 테니.”

“……!”

공작 딴에는 긴장을 풀어 주려고 농담이겠지만, 심장은 오히려 더욱 오그라들었다.

그런 진지한 얼굴로 말하면 전혀 농담 같지 않다고요.’

여전히 긴장한 나를 보던 공작이 이내 , 웃었다. 마치 귀엽다는 .

귀여워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착각은 금물이다. 방심하지 , 엘로디!

앉거라.”

공작의 명령에 그가 보던 신문을 흘끔 보았다. 아까 내가 보던 트와네트 주간지였다. 앙겔로스의 패배와 페르디아의 승리를 대서특필했던. 시선이 신문에 있다는 공작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나른하게 말했다.

편집국장이 눈치가 제법 빠르더군.”

설마 아버지께서 신문사에 압박을……?”

글쎄. 강요한 아니다만.”

강요했네. 얼굴, 분위기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협박이나 다름없었겠지. 무려 상대가 페르디아의 가주 실베스터 페르디아니까. 존재 자체가 무기인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공작과 단둘이 마주 보고 앉은 상황이 불편한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방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먼저 입을 열었다.

부르신 거예요?”

공작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시-.”

오기 싫으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작이 뜬금없이 물었다. 오기 싫냐고.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그렇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아도 호감도 낮은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다행히 내가 대답하기 전에 공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을 주려고 불렀다. 엘로디 덕분에 번이나 도움을 받았으니.”

어쩌다 그렇게 되었네요. 운이 좋았어요.”

운일 리가.”

무슨 의미일까. 표정으로 속마음을 읽어 보려 해도 페르디아 공작을 상대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내가 기억이란 있을 때부터 공작은 무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으니까. 하지만 최근의 공작은 상당히 이상했다. 원래라면 부르지 않을 용건으로 나를 불렀고, 내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으면서 물건 구입을 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용돈을 주었다. 아들 명을 호위를 붙인 것도, 공작답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어디서 무얼 하든 관심을 가진 없었으니까.

보기 싫으니까, 별채에 두고 들여다보지도 않은 아니겠어.’

그중 가장 신경 쓰이는 ,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이후 공작을 만날 때마다 보이는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마치 나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보는 듯한 그런 .

엄마일까?’

하지만 물음만큼은 밖으로 없었다. 페르디아에서 엄마의 이름은 금지와도 같았으므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던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궁금한 있어요.”

무엇이지?”

“…… 저한테 의견을 물어보셨어요?”

1황자와의 만찬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곳에 있되, 그곳에 있지 않은 태도를 유지했다. 페르디아의 성을 쓰고 있지만, 가족이 되지는 못하는 이방인이었으니까. 울타리 밖에 있던 나를 가족의 대화에 끌어들인 공작이었다.  

엘로디.”

생각이 궁금하구나.”

  그곳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공작의 물음 번에 이방인을 자처하던 나는 대화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의 태도 중에 이해가 가지 않는 많았지만, 가장 납득할 없는 바로 물음이었다. 페르디아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놀랄 정도로 뜬금없는 물음이지 않은가. 먼저 의견을 번도 물어본 없었으면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 그러니 이유만큼은 알고 싶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공작이 선선히 대답했다.

지금의 너라면 해결할 있을 알았으니까.”

지금의 ?’

패악질을 부리던 예전의 나와 비교한 걸까. 생각에 빠질 새도 없이 공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언제나 지켜봤다.”

“……!”

최근 들어 이전과 달라졌지 않으냐. 생각이 깊어진 듯하니 네게 의견을 구한 것이다.”

나를 지켜봐 왔다니. 정말로, 꿈에도 상상해 없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는 원치 않게 생긴 사생아였으니까…….’

하지만 공작의 말은, 마치 나를 친딸로 생각해 왔다는 것처럼 들렸다.

저한테 관심이 없으신 알았어요.”

알다시피 성격이 이래서.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

특히 어린아이들은, 나만 보면 무섭다며 빽빽 울어 대니 가까이 가지 않는 편이고.”

공작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어린 나를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무서워할까 ?’

공작이 거짓말을 이유가 없으니 지금 말이 진심이라는 건데,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너무 꿈같은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 멍한 얼굴로 손만 내려다보는 내게 공작이 말했다.

바라는 말해 보거라.”

바라는 거라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지 않을 . 지금 내가 무엇보다 간절히 원하는 생존이었으니까. 내가 딸이 아니라는 밝혀져도 죽이지 않을 정도의 관대한 아량. 아니, 사실 내가 제일 바랐던 -.

그럼, 칭찬해 주세요.”

순간이라도 사랑받는 기분을 느껴 보고 싶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도 괜찮았다. 가족이 되었다는 기억으로 만족할 있을 테니까.

그래, 맞아. 나는 주제를 알고 있어.’

정말로 공작이 나를 친딸로 생각하고, 지켜봐 왔다고 해도 나는 진짜 딸이 아니었다. 사실을 공작이 알게 된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나를 대할까? 일렁이는 감정을 추스르는 내게 공작이 손을 뻗었다.

이리 와라.”

쭈뼛쭈뼛 다가가자 공작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익숙지 않은 서툰 손길이었다.

잘했다.”

“…….”

잘했다, 엘로디.”

.”

눈물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울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 하필 지금이야.’

이야기 상대라곤 유모의 딸인 마사밖에 없던 3살의 엘로디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남동생에게 더러운 사생아라는 말을 듣고 웅크려 울던 10살의 엘로디가, 친절하면서 친절하지 않은 사교계의 분위기에 상처받았던 14살의 엘로디가……. 아니, 언제나의 엘로디가 받고 싶었던 관심이었는데. 내가 공작의 친딸이라고 믿고 있던 과거였더라면 순수하게 기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출생의 비밀을 알게 지금도, 공작의 칭찬이 기뻤다. 가족이 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으니까.

‘…… 정도는 괜찮아.’

친딸인 공작을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없었다. 그러니까 독립할 준비가 끝나면 지체하지 않고 가문에서 떠나자. 그게 나의 유일한 목표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를 공작은 여전히 무심한 다정했다.

하지만 상으로는 충분치 않군.”

괜찮아요.”

아니, 아비가 딸을 칭찬하는 상이 없지 않으냐.”

“…….”

고민해 보아라.”

  *** 훌쩍……. 눌러 참았던 울음은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터졌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리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일부러 사람이 없는 길을 걷고 있는데, 하필 맞은편에서 카를로트가 걸어오는 중이었다. 상대하고 싶지 않아 말없이 카를로트를 지나치는데, 카를로트가 그런 앞을 가로막았다.

이젠 아예 없는 사람 취급-.”

카를로트의 말이 끊겼다. 고개를 숙인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 , 울어? ?”

카를로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는 사람 처음 보나.’

카를로트를 살짝 흘겨본 길을 가려고 했지만, 녀석은 앞을 가로막고는 비켜 주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벌이라도 내린 거야? 잘못했는데?”

그런 아니야.”

아니긴. 파혼한다고 나댄 거야?”

요즘 말도 걸지 않더니 갑자기 알짱대는 심히 부담스럽고 귀찮았다.

그냥 지나가, 카를. 그랬던 것처럼.”

아직 고여 있는 눈물을 옷자락으로 닦아 고개를 들자 눈가를 찌푸린 카를로트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왜인지 나를 빤히 쳐다보는 카를로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 있어?”

그게…… 아니. 없어.”

진짜 없어?”

, 없다고! 그리고 그렇게 울면서 돌아다니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러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페르디아면 페르디아답게 체통 지키라고!”

내가 우는 너밖에 -.”

몰라! 바빠. 거라고!”

……. 나는 쾅쾅 걸으며 사라지는 카를로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참나. 없다면서 하고 싶은 하네…….”

덕분에 눈물이 들어갔다.


 

17. 얀시의 진짜 얼굴

6–8 minutes


앙겔로스의 수도 저택. 앙겔로스 공작의 보좌관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은 공작이 보좌관에게 물었다.

그래서, 알아보았느냐.”

, 각하. 페르디아에 심어 놓은 세작에게 들은 확실한 정보입니다.”

이번 군수물자 사건을 페르디아의 승리로 이끈 주역, 그것이 바로 누구인가.

그래. 누구라든?”

공작의 질문에 보좌관이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페르디아 공작의 막내딸, 엘로디 페르디아랍니다.”

?”

앙겔로스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엘로디 페르디아?’

밖으로 꺼낸 적이 드물어서인지 입에 붙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러다 이내 존재를 떠올렸다. 확실히 실베스터 페르디아에게는 막내딸이 있었다. 밖에서 낳아 사생아라 했던가. 워낙 아름답고 천사처럼 사랑스럽게 생겨 유명했지만, 어울리지 않게 포악한 성격으로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앙겔로스 공작은 페르디아의 막내딸에게 관심이 없었다.

‘1황자와 결탁할 구실이자 수단으로 여겼더랬지.’

가문의 애물단지이자 그저 성격 더러운 영애일 뿐이라면 신경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4 가문이면서도 권능이 없다는데, 얼마나 무능한가. 권능이야말로 타고난 신의 축복이거늘. 하지만 이렇게 예기치 않은 곳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곤란했다. 그는 예외의 상황을 견디는 원칙주의자였으므로.

꼴에 페르디아라 이건가.”

반쪽짜리 피도 피라고. 그때였다. 기막힌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권능도 사용하지 못하는 페르디아라면 제거하기 쉽지 않은가. 1황자와 페르디아가 동맹을 맺게 계기는 약혼이었다. 그런데 엘로디가 죽는다면 대외적인 명분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동맹이 깨지지는 않겠지만, 일말의 균열이라도 생긴다면 충분했다. 애초에 앙겔로스 공작은 엘로디라는 존재 가치를 그리 크게 평가하지도 않았으므로. 앙겔로스 공작은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안경을 썼다.

싹을 짓밟아야겠군.”

영영 잎을 틔우지 못하도록.

  *** 3년에 , 달이 어둠에 잡아먹히는 월식의 밤이 지상에 도래했다. 월식의 밤은 저승의 여신 이르칼라의 힘이 강대해지는 시기였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 밤이 되어 옅은 달빛 하나 없는 지상에는 여신 이슈타르의 수호가 닿지 못했고, 탓에 4 가문과 황실의 일족들은 자신의 권능을 그날만큼은 쉬이 제어할 없었다. 특히 아직 권능을 개화한 얼마 되지 않아 나이가 어리거나 혹은 능력이 주체할 없을 정도로 강대할수록 제어 난도는 높아졌다. 물론 모든 권능을 가진 이들에 해당하는 아니었다. 가문의 속성에 따라 제어할 있는 정도의 폭이 판이하게 달랐다. 독을 정화하는 능력을 갖춘 나는 월식의 밤의 폭주와 관련이 없었다. 폭주해 봤자 정화를 너무 많이 하거나 아예 하거나 테니까. 음독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도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월식의 밤에도 아무 없이 지나갈 있었던 것일 . 다만변이속성인 크룬델 가문과파괴속성인 페르디아는 이야기가 달랐다.

“3 카를로트가 아주 가관이었지.”

나는 아련하게 카를로트가 페르디아를 박살 냈던 당시를 떠올렸다. 비유가 아니다. 진짜 박살. 저택을 박살 내놨다! 카를로트의 권능은 무려 지반 붕괴였으니까. 1 1 꺼짐이라 제발 가만히 계실 없냐고 고함치는 사용인들의 울부짖음이 별채까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별채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지켜봤었지. 그에 비해 얀시는 능력을 제어했다. 권능이 개화할 벌어진 사고를 제외하고는 번도 실수로 무언가를 소멸시킨 적이 없었다…… 알려져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말이지.’

얀시 페르디아가 얼마나 이미지 관리를 철저하게 했는지 있는 부분이었다. 얀시의 본색은 친부모인 페르디아 부부도 어렴풋이 예상만 진면목을 알지는 못했다. 그저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녀석이라고만 알고 있을 . 나도 6 전의 사건 원작 내용을 알고 있다는 메리트가 없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얀시 페르디아는 권능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 5 권능 개화 당시 전속 하인에게 권능을 발동해 혼수상태에 빠트린 이후로 얀시는 깊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장갑을 끼고 다니며 사람과 접촉하는 좋아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행동도 그에 기인한 것이었다. 탓에 얀시는 권능이 맘대로 제어가 되지 않을 때는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만일 먹는다고 해도 곧바로 게워 내는 거식증을 앓고 있었다. 심할 때는 폭주 직전에 몰려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의 통증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오늘 밤이 바로월식의 이었다. 해가 지며 하늘에는 주황색과 연분홍색 오묘한 색깔의 석양이 그림을 그렸다. 밤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별일 없겠지.”

5 이후부터 번의 월식의 밤이 있었지만 부모조차 모르게 대처해 왔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 얀시라면 알아서 잘할 테니까. 다만, 지금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굳이 오늘 가족 식사를 제안한 페르디아 공작의 결정이었다.

월식 따위에 굴하지 않고 강하게 자라라, 그런 뜻인가?”

하지만 아들놈의 권능에 새우 터질지도 모르는 생각은 주시나요……. 어쨌든 달에 있는 가족 식사니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저번에 카를 도련님이랑 나가서 샀던 드레스 입어 봐요.”

걸려 있는 그냥 건데……. 사이즈 맞아?”

……. 조금 크긴 한데 괜찮을 거예요. 우리 아가씨 아직 성장기니까!”

오늘 입을 건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에이, 정도는 괜찮아요.”

마사와 옥신각신하며 가족 식사에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되었다. 정말로 달이 뜨지 않은 창밖은 발을 디디기 두려울 정도로 새카맸다.

어서 가요, 아가씨. 밤길이 보여서 천천히 가야 해요.”

그래.”

등불을 마사를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서쪽 회랑을 지나 저택에 도착하는 동안 놀랍게도 명의 사용인도 만나지 않았다.

다들 죽기는 싫은가 보네. 코빼기도 보이는 보면.”

3 카를로트가 행했던 1 1 꺼짐의 기억이 아직도 사람들 머릿속에 선명한 분명했다. 중얼거림에 마사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도 숙소로 도망가 있으려고요.”

“……나는?”

즐거운 식사 하세요!”

마사!”

마침 만찬실 앞에 도착하자 마사는 부리나케 도망갔다. 나에 대한 충성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없는 광경이었다. 졸지에 전속 하녀에게 버림받은 나는 쓸쓸하게 만찬실에 입장했다. 홀로 별채에서 지내고 있는 내가 가장 늦게 도착하는 당연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단다, 엘로디. 오늘은 월식의 밤이니 어두웠을 텐데 넘어지지 않고 도착했구나.”

우아하게 나를 맞이하는 공작 부인에게 인사를 자리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아뮤즈부쉬가 나왔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페르디아 사람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공작 부인이야 4 가문이 아니라 권능이 없으니 패스. 공작은 강대한 권능을 가졌지만 제어력 또한 남다르니까 패스. 카를은…….

제어 실력이 제법 늘었군, 카를로트.”

감사합니다, 아버지. 저도 3 동안 놀지만은 않았습니다.”

올해는 3 전과 다르게 권능을 완벽하게 제어했는지 카를로트가 당당하게 말하며 웃었다. 공작은 빈정대거나 조롱할 의도 없이 무심하게 답했다.

그래. 침실만 박살 것만으로 충분히 장하다 있지.”

크흠.”

카를로트가 딴청을 부리며 괜히 음식 맛을 즐기는 연기를 했다. 잘난 뻐기더니 결국 침실 하나는 부쉈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얀시. 얀시는 평소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로 식사를 했다. 말수가 적긴 했지만 공작 부인과 카를로트의 말에는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얀시가 노력하고 있는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다소 버거워 보인다는 사실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잖아.’

와인을 모금 마신 공작 부인이 웃는 얼굴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얀시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좀처럼 음식이 줄지 않는구나, 얀시.”

, 사실 아까 티타임 간식을 많이 먹어서요. 입맛이 없네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먹었다니.”

그러게요.”

상냥하게 웃으며 공작 부인과 대화하던 얀시가 천천히 식기를 내려놓았다.

잠깐 씻고 올게요.”

그래.”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얀시가 만찬장 밖으로 나섰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빠져나가는 듯했지만 어딘지 급한 걸음이었다. 나는 물을 꼴깍꼴깍 마시면서 식사 중인 가족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웬만하면 대화를 나누지 않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다들 삭막한 얼굴로 요리된 음식을 입에 밀어 넣을 뿐이었다. 누구도 얀시의 이상한 기색을 알아채지 못했다.

하필 나만 알고 있어서!’

그냥 모른 넘어가기에는 나의 선량한 마음속 양심이 콕콕 찔렸다. 그렇다고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얀시의 일에 딱히 참견하고 싶지 않은데. 인상을 쓰며 고뇌하던 시선이 닿은 곳은 아까까지 얀시가 쥐고 있던 식기였다. 얼마나 힘을 주며 참았던 건지, 나이프가 미세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되겠다. 모르면 모를까 얀시의 고통을 알고 있는 이상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가 과연 얀시를 도울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저도 잠시 씻고 올게요.”

다녀와라.”

잠깐 나를 바라보던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찬장에서 나온 나는 얀시를 찾아 나섰다.

음침하고 이중인격 쩌는 얀시 페르디아 성격상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는 없을 거야.’

그렇다면 달빛도 들지 않는 지금 얀시가 있을 곳은 정해져 있었다. 6 , 월식의 밤에 있었던 정원이겠지. 거긴 별채 근처 후미진 곳이라 사람들이 오가지 않으니까. 등불을 챙긴 나는 곧바로 정원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내가 겉으로 가식 떨면서 나를 싫어하는 얀시를 찾아다니는 이유는 마음의 때문이었다. 일전의 앙겔로스 군수물자 사건 미래의 얀시가 내놓을 해결책을 홀랑 공으로 돌린 . 얀시는 모를지라도 그게 줄곧 마음에 걸렸으니까.

크윽…….”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게 누구의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확실했다. 어두운 정원의 수풀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커다란 인영. 권능이 폭주한 얀시는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웅크린 얀시의 등을 보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6 ,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정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얀시를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별채와 그리 멀지 않은 정원이었으니까. 달이 뜨지 않는 밤이라 신기한 마음에 밖으로 나왔던 어린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얀시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오라버니……?”

……. 허억…….”

얀시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꺼져.”

?”

꺼지라고!”

  왈칵 화내는 얀시의 모습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내가 들고 있던 등불에 비친 얀시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나는 내심 얀시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를 증오하는 카를로트와 다르게 가문 내에서 얀시만은 나를리리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동생처럼 대해 주었으니까.  

제발, 꺼져. 부탁이니까…….”

, 죄송해요!”

  꺼져 가는 음성에 나는 등불을 떨어트린 별채로 도망치듯 달렸다. 처음으로 보는 가식 없는 얀시의 민낯. 나는 그게 얀시의 본모습이라는 깨달았다. 놀라운 , 그날 이후 나를 대하는 얀시의 태도가 평소와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월식의 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 하는 것처럼. 원작의 내용까지 알게 지금, 얀시가 그랬던 건지도 깨닫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지.’

이제 얀시도 발견했으니 빚을 갚을 차례였다. 나는 원작에서 에스텔이 햇살 파워로 오라버니를 치유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폭주해서 권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얀시를 끌어안고 토닥토닥 위로해 줬었나?’

우웩. 그건 . 자신이 권능에 당할지도 모르는데도 얀시를 위해 몸을 내던진 에스텔의 진심에 마음의 문을 열였다는 묘사가 있었다.

마음의 문까지 필욘 없고.”

폭주 직전의 얀시를 진정시키는 타인의 토닥임이라면, 내가 에스텔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나는 혹시나 얀시가 폭주해서 내가 위험할지도 모르니 최대한 떨어진 팔만 힘껏 뻗어서 얀시의 등을 두드렸다.

, 허억…….”

괜찮아요.”

“……흐윽.”

괜찮다.”

“…….”

괜찮소.”

“…….”

괜찮을지도?”

나는 대충 괜찮다는 느낌의 말을 주며 얀시를 열심히 두드려 주었다. 사실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았다. 6 전의 일을 얀시가 까맣게 잊었듯, 어차피 오늘 일도 기억 테니까. 그러자 발작하던 얀시의 몸이 놀랍게도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18. 얀시 페르디아가 미쳤다

5–7 minutes


이게 바로 원작 여주의 힘인가? 원작에서 에스텔이 했던 위로의 반의반의 반도 했는데 진정이 되다니. 이윽고 얀시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점차 잦아들더니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

천천히 고개를 얀시의 흐리멍덩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얀시는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더니 지친 음성을 내뱉었다.

“……뭐야. 꺼져.”

말이 나오나 했다. 그래도 번째 겪는 거라고 가식을 떨지 않는 얀시의 원래 모습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라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겉과 속이 다른, 타인을 혐오해도 결코 내지 않는 인간.

사라져, ……제발.”

. 거예요.”

꺼지라고.”

네네. 있다 꺼질 거예요.”

어차피 기억도 테지만 얀시의 말에 대충 대꾸해 주며 계속 등을 토닥였다. 얀시는 입만 건지 꺼져, 사라져하며 중얼거릴 늘어진 몸을 가누지 못했다. 다행히도 권능 폭주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설마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나. 아침까지?’

얀시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뒤따라 나오긴 했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지 없었다. 식사 중에 잠깐 나온 건데. 혹시나 우리를 찾으면 어떡하지? 얀시는 이런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페르디아 가문의 후계자로서 언제나 완벽한 모습만 전시하고 싶어 하니까.

하여간 정말 피곤하게 산다니까.’

아무래도 대책이 서지 않아 하염없이 얀시의 등을 토닥이고 있을 때였다. 멍하게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얀시의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하더니, 잘생긴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엘로디?”

설마 정신을 차린 걸까?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음침하기로는 원작 1등인 얀시였다. 내가 자신의 약점을 보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내게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얀시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어떻게 거니?”

친절함을 가장한 얀시의 질문에 아주 약간 마음이 놓였다.

역시, 이성을 잃었을 때는 기억을 하는 같지?’

그게 아니라면 내게 다시 가식을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발짝 물러나 걱정스러운 말했다.

, 전에 답답해서 잠깐 나와 봤는데, 오라버니가 쓰러져 있었어요.”

그게 다야?”

. 그럼요. 괜찮으신 거죠?”

나는 얀시를 흘끔 보았다. 숨을 헐떡이거나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빛은 아직 흐린 상태였다.

괜찮아, 고마워.”

얀시가 습관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월식의 밤이었고 해가 밝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기 때문에 이대로 혼자 두는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을 부르는 -.”

아니.”

그럼…….”

괜찮으니까 이만 . 신경 필요 , 아니, 걱정하지 않아도 .”

알겠어요. 그럼 오라버니는 피곤해서 침실에 돌아갔다고 말씀드릴게요.”

그래.”

묘하게 넋이 나가 보이는 얀시였지만 대화가 통하니까 괜찮아 보였다.

,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신다면 충분한 수면과 운동이 필수랍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이만 돌아가 볼게요!”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 단연 최고인 충분한 수면과 운동을 대충 운운한 자리를 벗어났다. 본저택 쪽으로 황급히 가다가 앞을 밝힐 등불을 두고 왔다는 깨달았다. 6 전의 그때처럼. 다시 돌아가기도 귀찮아서 본저택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길잡이 삼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정도면 빚은 갚았다.’

  *** 얀시 페르디아. 남들은 직계의 강한 힘을 지닌 그의 권능을 부러워했다. 손에 닿는 것을 소멸시킬 있는 능력이라니 그보다 파괴의 속성에 어울리면서 강대한 힘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얀시에게 권능은, 저주였다. 처음 개화했을 그때부터. 소멸이라는 권능은 그릇에 비해 너무나 과분한 것이라 통제하기 매우 버거웠다. 조금이라도 정신력이 나약해지거나 주의가 흐트러지면 권능의 제어력이 약해져 쥐고 있는 것이 그대로 소멸했다. 물건이라면 다행이지만, 그것이 사람이라면 치명상을 입히게 되겠지. 얀시는 언제든 자신의 손이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살았다. 하지만 사실을 누구에게도 없었다.

나는 페르디아의 후계니까.’

식탐의 죄악을 봉인한 페르디아의 직계이며, 죄악의 봉인을 이어받을 차기 페르디아의 가주니까. 얀시는 자신의 의무를 한시도 잊은 없었다. 달이 완전히 여위는 월식의 밤을 제외하면. 월식의 밤이 돌아오는 날마다 얀시는 그럭저럭 버텨 내었다. 사람이 없는 곳에 은밀히 숨어들어 날뛰려는 권능을 힘겹게 잠재우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올해는 변수가 있었다. 원래라면 월식의 밤에는 어떤 일정도 잡지 않는 페르디아 공작이 가족 식사를 선언한 것이다. 얀시에게 아버지의 명을 거절하는 선택지는 없었기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식사가 이어질수록 얀시는 도무지 견딜 없었다. 하마터면 쥐고 있는 식기를 소멸시킬 뻔한 번인지 몰랐다.

잠깐 씻고 올게요.”

간신히 웃는 얼굴을 유지한 만찬장을 빠져나온 것이 온전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후로는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캄캄한 정원을 비척비척 걷다가 본능적으로 사람이 오가지 않는 구석에 주저앉아 날뛰는 권능을 억눌렀다. 마치 심장에 불을 지른 느낌이었다. 내장을 모조리 살라 먹는 고통에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뒤틀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웅크린 얀시의 손끝에 닿은 잡초들이 모조리 생기를 잃어 시들었다. 끼고 다니는 장갑은 가장 먼저 소멸하여 사라진 오래였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아득한 시간을 홀로 감내하고 있을 그때였다. 토닥토닥. 규칙적인 손길이 그의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뭐지?

괜찮아.”

혼탁했던 정신이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스미듯 서서히. 그러나 아직 얀시는 생각이란 하면서 말을 내뱉을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뭐야. 꺼져.”

모습을 보이면 된다는 위기감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사라져, ……제발. 꺼지라고.”

자신을 덧씌운 친절한 가면이 벗겨진 얀시의 입에서 말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와중에도 토닥이는 손길은 계속 이어졌고, 놀랍게도 서서히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날뛰던 권능이 잠잠해졌다.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치고 바다 위처럼. 비로소 얀시는 자신을 끊임없이 다독인 손길의 주인을 알아볼 있었다.

“……엘로디?”

엘로디 페르디아.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말간 눈을 깜빡이며. 모습을 보며 얀시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상기했다. 꺼지라고, 사라지라고 말했다. 말을 들은 엘로디의 얼굴은 어떻던가.

어떻게 그럴 있지?’

친절한 오라버니인 줄로만 알았던 자신이 폭언을 내뱉는데 , 상처받지 않는가. 마치 아무 기대도 없는 사람처럼. 그러면서도 헐떡이는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

괜찮아요.”

알지도 못하면서, 뭐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데 왜지. 엘로디의 말에 긴장이 풀렸다. 정말로 괜찮을 것만 같았다. 이해할 없었다. 엘로디에게 자신이 거라곤 마주칠 조금 다정하게 대한 전부였다. 그런데 아이는 자신이 폭언을 내뱉건 말건 담담한 얼굴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릴 뿐이었다. 손길이 이어질수록 얀시는 확신했다. 믿을 없게도, 정말 말도 되지만……. 엘로디의 손길이 제게 닿을 때마다 날뛰는 권능이 정말로 제어가 되었다.

“- 이만 돌아가 볼게요!”

엘로디가 후다닥 뒤돌아 달려갔다. 잠시 , 완전히 정신을 차린 얀시의 앞에는 밝은 등불 하나가 놓여 있었다. 데자뷔인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있었다. 6 월식의 , 태양이 떠오르는 후미진 정원에 웅크리고 있던 소년의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등불 하나. 엘로디.

‘……그것도 너였던 거야?’

,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나는 지금 노이로제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리리.”

“…….”

리리?”

바로 리리 노이로제에!

얀시 페르디아가 미쳤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나는 종일 침실에 죽치고 앉아 말을 걸어 대는 얀시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이러는 걸까?’

평소에 별채 쪽으로는 걸음도 하지 않던 인간이 갑자기 얼굴 보러 왔다면서 들어오더니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버리는 아닌가. 얀시가 가지 않으니 도무지 해독제를 만들 시간이 나지 않았다. 만들면 며칠을 앓아누워야 하는데, 혹시 의심을 수도 있으니까.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요,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동생 보러 오는 건데, 되니?”

.”

차가운 리리도 사랑스럽네.”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부담스러운 눈길을 외면했다. 대충 예상 가는 이유가 있긴 했다. 바로 월식의 밤에 있었던 일과 관련된 아닐까 하는 예측.

기억이 돌아온 틀림없어.’

그래서 입막음을 하려고 틈을 노리고 있는 거다. 나만 제거하면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원작 1 음침남이라면 충분히 그럴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모른 척해야만 했다.

오라버니. , 바쁘지 않나요?”

걱정해 주는 거야? 우리 리리, 다정하기도 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

순간 욱해서 한마디 하려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무시무시한 얀시에게 책잡힐 짓을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걱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서 가서 일하세요.”

말에 얀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거짓말.”

“…….”

걱정 하잖아, .”

친절하게 굴더니 이젠 스스럼없이 민낯을 드러낸다. 순간 확신했다.

기억하고 있네.’

나를 떠보는 틀림없었다. 그래서 슬쩍 본모습을 보여 주며 반응을 살피는 것일 .

망했다.’

도대체 나를 어쩌려는 꿍꿍이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얀시의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리자, 얀시가 다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있잖아, 리리. 부탁 하나만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뭔데요?”

볼래?”

갑작스러운 신체 공양 요구에 내심 당황했지만 겉으로 내지 않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얀시가 손을 덥석 붙잡는 아닌가.

“……!”

, 소멸시키려고?! 바짝 긴장한 나를 보며 얀시가 부드럽게 웃었다.

“……역시.”

, 역시, ! 역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야겠다는 뜻일까? 아무래도 얀시 페르디아에게 찍힌 같다. 손을 빼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그때였다.

, 뭐야. 사람, ……?”

느닷없이 찾아온 카를로트가 어째서인지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불륜 장면을 목도한 같은 얼굴을.

이럴까…….’


 

19. 손을 잡았어?

6–8 minutes


  지금까지 별채 안에 들어온 적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인 사람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들어와서는 공간을 침범하는 상당히 불편했다. 나는 얀시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고 카를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어머니가 부르셔서.”

아무래도 해독제 건으로 나를 찾는 듯했다. 예상했던 시일보다 훨씬 지체되었기 때문이겠지. 그건 그렇고,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따로 있었다. 나는 카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걸 카를 네가 전해 ?”

“……어머니랑 마주친 김에.”

번거롭게 여기까지 필요 없어. 다음부턴 그냥 사용인 통해서 전해 .”

카를로트도 딱히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테니 그게 서로에게 좋을 .

오라버니도 이만 보시는 좋겠어요.”

얀시에게도 완곡하게 가라는 말을 건넨 사람을 내버려 곧바로 공작 부인의 온실로 향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그렇단다. 어서 오렴, 엘로디.”

내가 알고 있었던 건지 테이블에는 이미 몫의 찻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은 대체 그러는 거야?’

괜스레 목이 차를 거침없이 마시자 맞은편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차. 남들은 부인과 차를 마실 때면 조심스러워하며 먼저 차를 마시는 법이 없다고 했었는데. 지금 와서 경계하는 척하기엔 이미 늦었다.

해독제 일로 부르신 거죠?”

겸사겸사. 그리 급할 없으니 천천히 해도 된단다.”

해독제 건이 아니라면 공작 부인이 나를 부를 이유가 없는데……. 그러다 문득 얼마 들었던 위화감을 떠올렸다.

부인. 제게 맡기셨던 해독제 종류가 11가지 맞나요?”

“12가지였는데?”

갸웃.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미간을 좁혔다. 반응에 부인이 물었다.

그러니?”

하나가 사라졌어요.”

하녀가 청소하다가 실수로 치운 아니겠니.”

“……그렇겠죠?”

하지만 내가 침실에 사용인이 들어오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 거의 전속 하녀인 마사가 전담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마사는 그런 실수를 성격이 아니었다.

페르디아에서 대체 누가 독을 빼돌리겠니?”

부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마치 화초인 곳곳에 심어진 독초를 꺾어 가면 테니 적어도 페르디아 내에선 독이 그리 희귀하지 않았다.

멋도 모르고 귀해 보여 훔쳤다면 본인이 대가를 치르겠지. 먹고 숨을 거두든, 암시장에 팔아 치웠다가 장물로 발각되어 되돌아오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구나.”

공작 부인은 담담한 어투로 무시무시한 가정을 늘어놓았다.

하하…….”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사라진 독이 뭔지 하녀 통해 알려 주렴. 다시 보내 주마.”

, 부인.”

조만간 판매 대금이 들어올 거야. 마사라는 아이 편으로 보내 주면 되겠니?”

. 해독제도 만드는 대로 바로 보내드릴게요.”

부인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찻잔이 비었다. 이만 돌아가려 입술을 떼었을 때였다. 부인의 말이 빨랐다.

요새 카를과 얀시가 엘로디 너를 귀찮게 한다지.”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내심 긴장했다. 나는 어렵지 않게 부인의 말뜻을 이해했다.

사람과 가까이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겠지.’

부인으로선 가문의 이물질인 내가 적통인 아들들과 가까워지는 달갑지 않을 테니까.

공작 부인의 염려, 마음에 접수.’

나는 안심하라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 절대 사람 귀찮게 할게요.”

“……?”

제가 피해 다닐게요. 카를도 밖에 나갈 때만 만나니까 괜찮을 거예요!”

“…….”

그럼 보겠습니다!”

나는 혹시나 책잡힐까 얼른 온실을 빠져나왔다. ***

독입니다.”

황실 약제사의 말에 아덴미르의 표정이 자못 어둡게 가라앉았다.

.”

그는 낮게 뇌까렸다. 독이라. 독은 아덴미르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었다. 언제든 독살당할 있는 위태로운 자리. 위험에 노출된 탓에 아주 어릴 때부터 내성 훈련을 했다. 극소량의 독부터 음독하며 서서히 내성을 기르는 훈련이었다. 그렇기에 아덴미르는 음독 시의 고통을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어째서 독만 뚜껑이 열린 채로 엘로디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냐는 것이었다. 분명 무언가 있다고, 직감이 말했다.

무슨 독이지? 음독 증상은?”

테미스 페르디아 공작 부인이 만든 독으로 보입니다. 방울만으로 호흡기관을 망가뜨리는 독성을 지니고 있으며, 양을 전부 마실 경우에는 사망에 이릅니다.”

과연 테미스 페르디아, 제국 최고의 독제사가 만든 극독다운 효과였다.

이만 나가도 좋아.”

황궁 약제사를 물린 아덴미르는 집무 책상 위에 독약 병을 올려놓고는 생각에 잠겼다. 방울만으로도 호흡기관을 마비시키는 극독의 뚜껑을 열어 두었단 말인가. 엘로디가 알고 그랬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작 부인이 제거를 시도한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방법이 너무 허술했다. 증거가 남지 않는가. 그가 아는 페르디아 공작 부인은 그런 허접한 수를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바로 그때였다. 불현듯 아덴미르의 머릿속에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붕대로 감겨 있던 엘로디의 손목과, 아래 선명하던 자상.

‘……설마.’

아니. 그럴 없었다. 저만 알던 이기적인 여자가 스스로 독을 마실 리가. 하지만 이미 쪽으로 흘러간 생각은 급류를 방향으로만 흘렀다. 순간에도 아덴미르는 깨닫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존재조차 신경 쓰지 않았던 약혼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 *** 덜컹.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마차 안에는 카를로트와 단둘이 앉아 있었다. 외출에 호위 역으로 따라온 카를로트는 제법 불만이 많은 눈치였다. 초조하게 다리를 떨다가 창밖을 보다가 반복하던 녀석은 정신이 사나운지 커튼을 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때문에 훈련할 시간 매번 빼앗기잖아.”

그럼 다음엔 그냥 얀시 오라버니한테 부탁할게. 명이면 아버지도 그냥 넘어가실-.”

, , …… 방해하지 !”

카를로트가 펄쩍 뛰며 말렸다. 언제 그렇게 얀시를 끔찍이 사랑했다고. 누가 보면 되게 우애로운 사이인 알겠다. 어깨를 으쓱하며 마차 등받이에 등을 기대는데, 카를로트가 물었다.

오늘은 어디 가는데?”

알아서 하려고.”

호위 대상 동선 정도는 알아 둬야지. ,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튀어.”

튀어야지.’

현재 내가 향하는 곳은 수도 외곽에 있는 남마탑이었다. 외곽이라 도심에 있지 않고 하나를 지나야 했기에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남마탑 마법사들의 성향이 대체로 고립된 것을 좋아하기에 그런 위치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예전에 갔던 서마탑과 같은 마탑이지만 방위의 마탑은 서로 독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에 다른 기관이라 봐도 무방했다. 이번에 공작 부인에게 받은 대금을 남마탑에 투자할 계획이었다. 자고로 투자는 분산 투자지. 내가 끝까지 카를로트에게 목적지를 말해 주지 않자 그는 오기가 생긴 건지 끈질기게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어딘데. 어디 가는데?”

보면 알아.”

이상한 가는 아니야? 어디냐고!”

호위면 그냥 조용히 따라와.”

지금 마차 세워서 마부한테 물어본다?”

진심으로 궁금한 건지 카를로트가 으름장을 놓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으휴. 유치한 . 나는 귀찮은 마음에 그냥 목적지를 알려 주었다.

남마탑.”

남마탑엔 ?”

그냥 마도구 구경하려고.”

대충 둘러대고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당연히 한두 마디쯤 덤빌 거라 생각했던 카를로트가 잠잠했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전과 달리 카를로트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 있었다.

잠깐.”

?”

“……나오지 . 안에 꼼짝 말고 있어.”

?”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힌 카를로트가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콰아앙! 엄청난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고, 반동에 마차도 거칠게 흔들렸다. 히히힝-! 놀란 말들이 투레질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마차에 있는 또한 여파를 피할 없었다.

……!”

! 사정없이 요동치는 마차 벽에 어깨를 강하게 부딪쳤다. 아릿한 둔통에 인상을 쓰며 어깨를 부여잡았다. 와중에도 마차 밖에선 굉음과 금속이 가열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습격인가?’

적이 많은 페르디아였다. 대부분 별채에서 나오지 않던 나는 지금까지 번도 습격당한 적이 없었지만, 공작이나 아들은 종종 암살자를 맞닥뜨리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이지만 강한 권능과 힘을 뒷받침해 무력을 갖춘 카를로트니까 금세 처치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난잡한 소음 틈바구니에서 소란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삽시간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끝난 건가?’

그런데 카를로트가 마차 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찰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카를.”

마차 커튼을 걷은 나는 말도 되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검을 바닥에 박은 카를로트가 피투성이가 겨우 버티고 있었다. 주변에 수많은 복면을 자객들이 쓰러져 있었지만 완전히 해치운 아니었다. 카를로트의 주변에는 여전히 멀쩡한 명의 암살자가 흉흉한 기세로 에워싸고 있었다.

말도 .”

다름 아닌 페르디아의 직계인 카를로트였다. 어쭙잖은 자객들에게 당할 실력이 아니었다. 상황을 부정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마차를 박차고 나간 나는 남아 있는 암살자를 향해 공작 부인의 독약을 내던졌다.

으악!”

, 뭐야!”

중에는 음독하지 않고 향만으로도 중독 효과를 일으키는 것들이 있었다. 바로 내가 던진 독이었다. 직접 마시는 것보다는 중독 효과가 세지 않지만, 당장 시간을 버는 데는 충분했다. 비틀거리는 카를로트를 부축하자 녀석이 씨근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놈들, 권능을 무효화하는 마도구를-.”

시끄럽고, 움직여!”

중독 효과가 세지 않은 만큼 언제 저들이 공격할지 몰랐다. 나는 카를로트를 힘겹게 부축하며 마부석으로 향했다. 마차가 흔들리며 부딪혔던 어깨가 불타는 고통스러웠지만 그딴 것에 신경 때가 아니었다. 마부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혼자, 도망가…….”

누구 꿈자리 망치려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카를로트의 이마에 꿀밤을 먹인 나는 서둘러 말과 마차를 분리했다.

, !”

간신히 올라탄 카를로트 뒤에 오른 나는 곧장 말을 몰았다.

쫓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명의 암살자 또한 우리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권능은 공격형이 아니라 암살자를 제거할 없었다. 카를로트는 지금 행동 불능 상태.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따돌리자.’

하지만 교양으로만 배웠던 승마 실력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지금도 시시각각 암살자들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중이었다. 나는 일부러 시야 확보가 어렵게 나무가 많은 방향으로 달렸다. 그때였다. 카를로트가 몸을 돌리더니 품속의 단검을 내던졌다. 쐐애애액! 쏘아지는 소리와 함께-.

-!”

암살자 명이 뒤로 쓰러졌다. 절명한 듯했다.

앞으로, , …….”

카를로트가 씹어뱉듯 말하며 검을 쥐었다. 하지만 이윽고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히힝! 말이 화들짝 놀라 뛰어올랐다. 숲을 통과하자마자 나타난 것이 아득한 절벽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퇴로조차 없었다. 말머리를 돌린 나는 바짝 쫓아오는 암살자와 마주했다.

아직 독약이 하나 남았으니까 어떻게든 거야.’

그렇게 품속에서 약병을 꺼냈지만, 카를로트가 빨랐다. 말에서 구르듯 뛰어내린 카를로트가 주저 없이 자객을 공격했다. -! 피투성이가 몰골로 카를로트는 자객과 또다시 격돌을 벌였다. 권능을 무효화하는 마도구가 있다더니 카를로트는 정말 힘을 쓰지 못했다.

젠장!”

고함을 내지르는 카를로트의 끝이 암살자의 급소를 정확히 찔렸다. 드디어 처치했다고 생각하는 그때, 예기치 못한 공격이 내게 날아들었다.

피해!”

카를로트의 말대로 몸을 비틀었지만, 그건 오히려 잘못된 판단이었다. 말이 발작하며 나를 떨어트렸다. 기우뚱한 몸은 균형을 잡을 새도 없이 뒤로 넘어갔다.

!”

카를로트가 황급히 손을 내미는 모습이 아주 천천히 재생되듯 눈에 들어왔다. 붙잡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한테 닿지 . 더러우니까.”

  벼락이 내리치듯 기억의 편린이 밀려들었다. 언젠가 카를로트가 손을 뿌리치며 했던 말이었다.

내게 닿는 소름 끼친다고 했었는데.’

……뿌리쳐질지도 몰라. 생각이 탓에 나는 무심코 손을 거둬들였다. 찰나의 머뭇거림이었으나 결과는 명확했다.

“-.”

나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

“……!”

후드득. 발길에 차인 돌무더기가 아래로 떨어졌다. 얼마나 까마득한지 절벽 아래는 온통 암흑일 ,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엘로디 페르디아!”

목에 핏대가 정도로 이름을 외쳤지만, 이미 상대는 절벽 아래로 추락한 이후였다. 카를로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 손을 잡았어?

“……?”

도움을 받을 바엔, 차라리 죽겠다는 건가? 정도로, 나를, 혐오한다고……?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내민 그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다가 체념하는 얼굴로 추락하던 모습이.


 

20. 당신을 찾아가겠다고 했으니까

6–8 minutes


바람이 부수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세차게 때렸다. 절벽 벽면에 돌출된 돌이나 나뭇가지 등이 살갗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한없이 추락하는 와중에도 실없는 웃음이 났다. 전생을 떠올린 이후로 미래에 내가 죽게 된다는 깨닫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독립 자금도 모으고, 투자도 하고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텐데. 그런 쓸모없는 상념에 빠진 중에도 죽음은 시시각각 앞으로 다가왔다. 까마득한 절벽에도 바닥은 존재했다. 크고 작은 바위와 돌부리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바닥이 나를 덮치는 것처럼 가까워져만 갔다. 이젠 정말 죽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

죽기 전이라 그런 걸까? 이상하게도 추락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같았다. , 당연히 지면에 곤두박질쳐질 거라 생각했건만,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나를 받쳐 들었다. 이윽고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불분명한 시야로 나를 안아 이의 얼굴이 보였다. 언젠가 있는 얼굴이었다.

……신은…….”

말을 끝마치지도 못하고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쉬어.”

적요한 암흑이 찾아들었다.

  *** 카를로트와 엘로디의 습격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디아 공작의 귀에 들어갔다. 또한 자객과 대치하던 중에 엘로디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 또한. 만신창이로 돌아온 카를로트의 보고를 들은 공작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침묵이 흘렀다. 털썩. 카를로트는 무릎을 꿇었다.

불찰입니다. 호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처분을 내려 주세요.”

페르디아 공작은 카를로트를 질책하는 대신 자못 냉정하게 물었다.

위치는?”

수도 외곽 남마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절벽입니다.”

앞장서라, 카를로트. 상처는 가면서 처치하도록.”

.”

카를로트는 주먹을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날에 난잡하게 베여 출혈이 심각한 데다 독까지 발려 있었는지 신체 일부분에서 마비 증상이 나타났지만 감히 상태 따위를 밖에 없었다. 그런 나약한 소리를 때가 아니었다. 위에 올라 습격 장소로 향하면서도 카를로트는 생각을 멈출 없었다. 끊임없이 떠올랐다. 가는 팔로 그를 기어코 끌어당기던 미약한 힘이. 체념하듯 손을 거둬들이던 얼굴이. 어둠에 먹히듯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마지막 모습이. 망막에 각인된 것처럼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자객을 상대하고 있을 , 혼자 도망쳤다면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로디는 저를 살리겠다고 무리한 도주를 감행하다가 절벽 아래로 낙상했다. 엘로디 페르디아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당연한 아닌가. 그러다 문득 카를로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나는 엘로디 페르디아라는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나?’

애초에 알려고 적도 없었다. 사생아. 가문의 이물질. 부모의 사이를 갈라지게 원인일지도 모르는 누이. 가문의 사고뭉치. 단지 그런 존재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웅크려 숨죽여 우는 모습을, 숙덕거리는 사용인들의 뒷말을 듣고도 무덤덤하게 길을 되돌아가는 모습을…… 줄곧 모른 척하지 않았던가. 손이 덜덜 떨렸다. 결국 닿지 못한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죽었겠지.’

험준한 절벽 아래로 추락했으니 살아남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엘로디는 페르디아면서 권능도 없으니 분명 죽었을 것이다. 또다시 치기 어린 마음이 치고 올라왔다.

바라지도 않았는데 구해 놓고, 제멋대로 죽어 버리면 누가 고마워할 알고?’

그러나 제멋대로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분명 살아 있을 거라고. 그래서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그를 탓하며 또다시 버럭버럭 화를 내라고. 이윽고 공작과 카를로트,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가문의 기사단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절벽으로 향하며 피습당한 장소에는 버려진 마차와 사망한 마부, 그리고 널브러진 자객들의 시신이 그대로였다. 공작은 뒤따르는 기사 몇에게 수습과 정보 수집을 명하며 절벽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그들은 절벽 위에 도착했다. 카를로트와 사투하다 죽은 자객이 그곳에 있었다. 공작은 절벽 끝에 섰다. 파스스-. 공작의 발에 작은 돌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역시나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까마득한 높이의 절벽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수색 명령을 내렸다.

“……수색대를 풀어라. 한시라도 빨리 찾아. 사소한 흔적이라도 발견하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 각하.”

가문의 기사단이 수색대를 꾸려 엘로디가 떨어진 절벽 근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시간 . 수색대는 침통한 얼굴로 귀환했다. 대기하고 있던 공작이 먼저 물었다.

아무 흔적도 없느냐?”

. 어떤 흔적도…… 없습니다.”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내포된 의미를 알아들을 있다. 시체조차 없다. 기사 명이 카를로트에게 물었다.

도련님. 장소가 맞습니까?”

“……틀림없어.”

절벽 아래에 물이 흐르는 것도 아니니 급류에 휩쓸려 갔으리란 가정도 없었다. 하면 엘로디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때였다.

각하. 이것을 주십시오.”

기사가 건넨 것은 찢어진 드레스 자락이었다. 얄팍한 조각에는 점점이 피가 묻어 있었다.

절벽 중간쯤 돌부리에 걸려 있었습니다.”

평민들이나 가난한 귀족들은 걸칠 없는 고급 옷감이었다. 그러니 엘로디의 것일 . 손에 증거로 엘로디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 사실은 확실했다. 조각을 내려다보던 공작이 이내 다시금 명령을 내렸다.

수색 반경을 확대한다. 근처에 민가가 있는가?”

. 근방 기슭에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거기도 수색 범위에 포함한다.”

!”

기사단은 다시 흩어져 수색을 재개했다. 개중 기사는 페르디아 공작을 흘끔 보며 감탄했다.

역시 공작 각하께서는 침착하시군.’

친딸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실종되었음에도 저렇게 이성을 잃지 않을 있다니. 하지만 자리의 누구도 몰랐다. 공작이 묻은 엘로디의 옷자락을 손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세게 쥐고 있다는 것을. 겉으로는 고요하나, 속은 그렇지 못했다.

엘로디.’

공작은 앞에만 서면 긴장하던 딸의 얼굴을 떠올리다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비보를 들은 얀시와 공작 부인이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얀시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카를로트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거침없는 발걸음에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얀시의 손이 카를로트의 어깨를 거칠게 붙들고 흔들었다.

카를로트 페르디아!”

“…….”

호위라면서, 도대체 !”

“…….”

네가 지금 무슨 짓을 건지 알기나 ?”

언성이 높아진 얀시의 눈이 카를로트를 죽일 노려보았다. 격앙된 눈빛에 카를로트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며 덜덜 떨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흥분하는 없는 얀시가 무려 화를 내다니. 그에게 붙들린 카를로트의 눈이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 나는…….”

얀시의 말에 억눌렀던 죄책감이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공작과 다른 기사들은 아무 하지 않았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엘로디가 절벽에 떨어진 자신 때문이라는 .

혼자라도, 도망치게 해야 했는데, 내가, 내가 등신같이…….”

고해성사라도 하듯 고개를 숙인 카를로트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얀시는 냉랭한 눈으로 카를로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은 공작 부인이었다.

얀시. 그쯤 두거라.”

어머니.”

얀시가 끼어들지 말라는 다소 날카롭게 부인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우아하게 웃으며 아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공작 부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카를로트를 위아래로 훑었다. 흐음.

중독되었구나, 카를.”

“…….”

이후 수색은 아버지께 맡기고 너는 돌아가 치료하렴.”

카를로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저도, 수색을 돕겠습니다. 모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이니, 부디 책임을 다할 있게 주세요.”

주먹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카를로트의 모습은 가련해 보았다. 엘로디라면 치를 떨던 카를로트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믿을 없는 반응이었다. 끝까지 수색에 동참하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카를로트에게 공작이 단호하게 한마디했다.

수색을 하고 싶거든 치료를 끝마치고 와라.”

괜찮-.”

괜찮다고 버티다가 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오히려 수색에 방해가 거다.”

, 알겠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카를로트가 절벽을 등졌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에 부질없게도 희망이 생겨났다. 살아 있을 수도 있다. 살아, 있을 수도…….

그래. 살아 있어.’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이 엘로디에게……. ***

…….”

전신에 느껴지는 근육통과 잔잔한 열감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런 나를 반기는 , 낯선 풍경이었다. 필요한 가구만 비치된 단출한 침실은 넓은 만큼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야?’

처음 보는 공간에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으윽…….”

어마어마한 격통이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퍼져나갔다. 습격 마차에 부딪힌 탓에 부상을 입은 듯했다. 왼손으로 어깨를 부여잡은 나는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남자였어.’

얼마 외출에서 홀연히 나타나 난데없이 전생의 이름을 중얼거린 사라졌던 남자. 암영보다 어두운 검은 머리칼과 붉디붉은 눈동자를 지닌, 놀랍도록 아름다운 남자. 마사를 시켜 수소문했지만 결국 정체를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죽기 직전에 나타나서 나를 구해 주다니.’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의심을 완전히 거둘 없었다. 정체나 속내를 없으니까. 어쨌든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서 오랫동안 체류할 생각은 없었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려는데, 문고리가 저절로 돌아갔다.

…….”

열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당황한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상대방 또한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뿐일까. 문고리에 손을 올린 자세 그대로 굳어서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저기.”

“…….”

저기요?”

.”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남자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다시 문을 닫았다. 달칵. 실내에 단둘만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다치셨습니다. 앉아 계시는 좋겠습니다.”

그래.”

사실 서서 멀쩡히 돌아다닐 정도의 상태가 아니었기에 남자의 말에 냉큼 침대에 가서 걸터앉았다. 약을 가지러 갔던 건지, 그의 반대편 손에는 약통이 들려 있었다.

치료해드려도 되겠습니까?”

.”

대충 내려다보아도 곳곳에 생채기가 없을 정도로 있었다. 내가 멀쩡한 왼팔부터 건네자 남자가 손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어째서인지 경건한 태도에 민망함은 몫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냉철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며칠 처음 얼굴인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나는 생채기에 약을 바르는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 마법사야?”

아닙니다.”

분명 빠르게 추락하던 속도가 점점 느려졌었는데. 마법이 아니면 불가능한 기적이었다. 그도 아니면 황가나 4 가문의 혈족으로서 권능을 쓰는 방법도 있었다. 직계가 아니더라도 방계라면 권능을 있으니까.

앙겔로스, 세베레스, 윌렌티아, 페르디아, 크룬델. 어디야?”

어느 곳도 아닙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기엔 목소리에 망설임이 없었다.

크흠.’

정정한다.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괜히 헛기침한 나는 다음 질문을 꺼냈다.

어떻게 상황에 나를 받았어?”

당신을 찾아가겠다고 했으니까.”

머지않아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홀연히 사라지기 남자가 했던 말이었다. 내가 바랐던 답은 분명히 아니었다. 사실은 아까부터 그랬다. 무슨 질문을 하든 남자는 내가 원하는 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애초에 알려 생각도 없어 보이고.’

그런 주제에 대답은 꼬박꼬박하니, 부분에 오기가 생겼다. 나는 다시 질문을 건넸다.

이름이라도 알려 . 계속 애매하게 부를 없잖아.”

그러자 팔에 시선을 고정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레이안.”

“…….”

레이안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21. 걱정해, 걱정한다고!

6–8 minutes


“……레이안?”

역시 원작에 나와 있지 않은 이름이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레이안이라는 이름을 읽은 기억이 없었다. 혹시 내게 이름을 속이는 아닐까. 나는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당신…… 아니, 레이안.”

말씀하십시오.”

윤가을. 나를 보며 그렇게 불렀잖아. 그랬어?”

이번에도 애매한 대답으로 내가 원하는 명확한 답을 들려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꿈을 꾸었습니다.”

“……?”

이곳과는 다른 세계. 반복되는 꿈속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내가 꿈에 나왔다고? 소설 인물이 전생의 내가 나오는 꿈을 꾸다니, 그렇다면 내가 소설에 빙의하게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라는 뜻일까?

보자마자 알아볼 있었습니다. 당신이 윤가을이라는 .”

자신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완고하리만치 단호한 어조와 눈빛.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깨달았다.

그게 전부야? 꿈속에서 윤가을이라는 사람이 계속 나왔고, 나를 보자마자 내가 사람이라는 알아봤다는 .”

“…….”

잠시 뜸을 들이고 대답하는 모습에 무언가 숨기고 있음을 확신했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테니까.

그나저나 거짓말 되게 못하네.’

거짓말이 저렇게 티가 나니, 외는 전부 진실이라 믿어도 듯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전생의 내가 남자를 알고 있었을까? 레이안도 나와 같은 환생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머리를 들었다. 내가현실이라고 믿는 전생의 삶이 남자에게는이고, 내가소설 이라고 믿는 지금의 삶이 남자에게현실이라면? 어느 쪽의 삶을 중점으로 두느냐에 따라 전생이 오히려 꿈이 있고, 반대가 수도 있으니까. 나는 윤가을의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얼굴을 차근히 떠올렸다. 하지만 사람이다, 하며 떠오르는 이는 없었다.

꿈속의 윤가을이 당신을 뭐라고 불렀어?”

저는 그저 당신을 바라볼 뿐입니다.”

번도, 내가 당신을 없어?”

남자는 대답하는 대신 침묵하며 시선을 피했다. 본인도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알고 있으니 대답을 회피하는 모양이었다.

불리한 질문인가 보네.’

남자가 나에게 접근한 의도가 무엇이든, 위협이 같지는 않았다. 그럴 거였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죽게 내버려 뒀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게 무언가를 바라는 거겠지? 그게 무엇인지는 지금부터 침착하게 알아내야 하는 문제였다. 그보다는 우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카를로트와 이동하던 중에 습격을 받아서 추락했었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솔직히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 수색을 하기나 할까?

‘……아니.’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죽었다 치고 수색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히려 가문의 눈엣가시인 사생아가 알아서 죽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특히 마지막을 봤던 , 카를로트니까…… 추락 장소를 은폐할 가능성이 있었다. 페르디아 가문 사람 중에서 나를 가장 싫어했던 바로 카를로트였으니까.

그럼, 이건 기회일지도 몰라.’

이대로 죽은 사람이 된다면, 홀연히 도망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결과적으로 내게 잘된 일이었다. 원작이 시작되기 , 사건의 배경이 되는 페르디아 저택을 벗어나면 죽을 걱정을 필요가 없었다. 이후에 언니가 입양되든 말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가슴 한가운데가 뚫린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는. 나는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에도 묵묵히 다른 팔에 약을 바르기 시작한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내리깐 붉은 위로 드리운 기다란 속눈썹, 그리고 절로 시선을 잡아끄는 외모까지.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머리칼을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레이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제가 거주하는 곳입니다.”

단출한 침실이 남자가 지내는 곳이구나.

혹시 내가 떨어진 절벽 위에 다른 사람은 없었어?”

마지막 자객을 처리한 직후에 내가 떨어졌으니 카를로트는 무사할 테지만, 혹시 미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다른 암살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없었다. 제법 깊은 상처 위로 붕대를 감던 남자의 손길이 느려졌다.

절벽 상황은 모릅니다. 다만…….”

다만?”

페르디아에서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수색을?”

전혀, 조금도, 하지 않았던 가정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색을 벌이다니. 그것도 가문 차원에서……? 하나 찾기 위해서 기사단을 움직일 리가 없었다. 나는 다른 가정을 떠올렸다.

혹시 내가 떨어지고 다른 남자애도 떨어졌어? , 붉은 곱슬머리 남자앤데…….”

뒤이어 카를로트가 떨어져서, 녀석을 찾기 위해 페르디아에서 수색을 시작했다는 가정. 하지만 그런 추측이 무색하게도 레이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정말 찾는다고?”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현실감각이 없어서 여전히 꿈속에 있는 같았다. 놀라운 것은 이어진 레이안의 말이었다.

. 당신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 이후로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심지어 반나절이나 지났단다. 그런데도 아직 수색을 벌이고 있다니, 놀라운 한편 또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색 중이라고는 하지만 절벽 아래로 떨어진 이상 있는 확률은 없다. 시체라도 찾기 위해서 수색하는 거겠지. 이렇게 나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은 비운의 공녀가 되어 사람들에게 잊힐 있었다. 완벽히 모습을 감추면 바라던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지켜봤다.”

잘했다, 엘로디.”

아비가 딸을 칭찬하는 상이 없지 않으냐.”

  하필 지금, 페르디아 공작의 목소리가 떠오르다니. 나는 얼굴의 생채기를 치료하려는 손을 뻗는 레이안을 보며 미소 지었다.

구해 줘서 고마워. 레이안.”

멈칫. 레이안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이내 그는 다소 무덤덤한 얼굴로 손을 거둬들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부담스러운지 레이안이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나는 아직도 약을 바르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는 몸을 한번 훑어본 침대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야겠어.”

나는 굳이 돌아갈 이유를 꾸역꾸역 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빈털터리는 곤란해요.’

무일푼의 여자가 살아남기에는 각박한 세계관이었다. 더군다나 내게는 충분히 몸을 지킬 만한 수단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했던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이대로 사라질 없었다. 튀더라도 값은 벌고 튀어야지.

  *** 엘로디 페르디아의 실종 소식은 이윽고 가문 사용인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집사장이 최대한 입단속을 시켰지만 떠드는 입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실종 소식은 걷잡을 없이 퍼져 갔다. 페르디아 공작의 집무실. 좀처럼 진척 없는 반나절의 수색 이후 우선 저택으로 돌아온 공작은 얀시의 보고를 들었다.

인근 마을을 전부 수색했지만, 리리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을 보았다는 증언은 없었어요.”

“……그래.”

혹시 모르니 수색을 이어 가겠습니다.”

공작은 대답 대신 피로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트는 부상을 대충 치료한 이후에 계속 절벽 부근 현장에서 수색하는 중이었다. 공작은 이번 수색대의 지휘 총괄을 맡은 기사단장 게이런을 불렀다.

게이런.”

, 공작 각하.”

습격의 배후는 알아냈나.”

카를로트가 처치했던 암살자들의 시신은 모두 페르디아 저택으로 운반해 한차례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들에 대한 게이런의 보고가 이어졌다.

카를로트 도련님께서 고전하셨으니 상당한 실력자로 이루어진 집단인 듯합니다.”

다음.”

사용한 무기나 육체에 어떤 표식도 남기지 않은 것을 보아 정체를 드러내면 곤란한 자가 배후라 추측됩니다.”

겁이 더럽게도 많은 놈인가 보군.”

공작의 신랄한 평에 얀시가 굳이 친절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대개 신중한 성격이라고 하죠.”

신중은 무슨.”

싸늘하게 대답한 공작이 다시금 게이런에게 시선을 주었다.

조사 결과, 배후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카를로트 도련님께서 말씀하시길 엘로디 아가씨를 노린 듯하다고 합니다.”

“……엘로디를?”

. 도련님께서 마차에서 내려 모습을 드러냈지만, 기어코 마차를 공격하려 했다더군요.”

엘로디의 이름이 또다시 나오자 분위기는 더욱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여유롭게 미소 짓던 얀시 또한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게이런이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듯 말했다.

살아 있는 놈이 놈이라도 있었다면 뭔가 알아낼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보다는 엘로디를 찾는 먼저다. 다시 현장에 가도록 하지.”

공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게이런과 얀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바로 그때였다. ! 돌연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누군가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감히 가주의 집무실에 인기척도 없이 쳐들어왔건만,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외침을 들은 직후 공작과 얀시가 동시에 집무실 밖으로 튀어 나갔기 때문에. 저택 밖에 나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 이곳저곳 잔뜩 긁힌 돌아온 엘로디였다.

-!”

엘로디를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내딛던 얀시는, 그를 추월하는 공작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엘로디.”

공작이 엘로디의 앞에 다가가 서자 그녀가 주춤 물러서며 고개를 들었다.

소란 일으켜서 죄송해요.”

몸은.”

괜찮아요. 조금 긁힌 말고는.”

엘로디가 씩씩하게 미소 지었지만 페르디아 공작의 날카로운 눈길을 피해갈 없었다. 상처투성이에다 붕대까지 감고 있는 모습을 공작의 눈에 순간 살의가 담겼다.

“……아버지?”

여파에 엘로디까지 몸을 떨자 기운을 거둬들인 공작이 엘로디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들어가서 치료받거라.”

, 그런데…….”

공작과 엘로디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그때.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으니 되었나…….’

어정쩡하게 얀시의 시선이 닿은 곳은 엘로디의 뒤편이었다. 엘로디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미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자가 그곳에 있었다. 얼굴을 확인한 얀시의 눈매가 설핏 구겨졌다.

, 사람이 저를 구해 줬어요.”

엘로디의 말에 남자의 시선이 뒤에 남자를 향했다. 얀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용병왕 이안.”

용병이 이후 단신으로 가장 높은 등급의 용병이 되어 세력을 이루었다는 남자.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저자가 일전에 엘로디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미행을 통해 알고 있던 얀시는 상황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할 없었다. *** 소득 없는 수색이 이어질수록 카를로트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젠장……!”

발길이 있지 않은 수풀 사이를 헤치며 시간을 뒤졌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 수풀에 긁혀 생채기가 났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사람만을 찾기 위해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근처를 수색하던 수색대가 철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수색에 집중하던 카를로트의 심기가 날카로워졌다.

지금 하는 거야.”

보고합니다. 철수하라는 공작 각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철수라니, 아직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는데-!”

당연히 실종된 엘로디가 죽었다고 간주하고 수색을 중단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가 아는 아버지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들려온 답은 카를로트가 상상도 말이었다.

엘로디 아가씨께서 귀환하셨다고 합니다.”

“…….”

또한 간절히 바라던 말이기도 했다. 보고를 들은 이후 카를로트는 미친놈처럼 말을 몰아 페르디아 저택에 당도했다. 상당히 거리였지만 쉴새 없이 달린 탓에 말도 되는 시간 안에 도착했다. 시간은 벌써 암흑이 내려앉은 . 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거침없이 별채로 향했다. 여전히 사용인들이라곤 돌아다니지 않는 별채의 복도는 인적없이 어두컴컴했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빠르게 걸으며 카를로트는 저도 모르게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거라면 어떡하지?’

이대로 엘로디의 침실에 갔는데, 아무도 없으면? 그런 생각을 하니 또다시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윽고 카를로트의 발걸음이 굳게 닫힌 엘로디의 방문 앞에 멈췄다. 끼익-. 문이 조금씩 열리며 침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정돈된 방에는 협탁 옅은 불빛만 깜빡였고, 침대에 엘로디가 걸터앉아 있었다. 비척비척……. 카를로트가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 손을 놓았어?”

카를?”

죽고 싶은 거야?”

잔뜩 씨근덕거리는 음성에 놀란 엘로디가 카를로트의 꼴을 살폈다. 무슨 짓을 하고 건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엉망이었다.

? 내가 죽어서 아쉽기라도 ?”

“……!”

씁쓸하게 웃는 엘로디의 얼굴을 보니 그만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카를로트는 도무지 넘쳐흐르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거침없이 엘로디의 앞으로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 . , 하는-.”

걱정해, 걱정한다고!”

. . 카를로트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주인을 잃은 짐승처럼 그는 쌓였던 감정을 토해 내며 오열했다.

그래, 걱정이었어.’

미칠 같은 기분은. 카를로트는 이상 감정을 속이지 않기로 했다.


 

22. 이제부터, 누님의 개가 거야

5–6 minutes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나는 졸지에 중증의 병자가 되어 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 생채기가 났을 움직이는 데는 아무 지장 없다는 의견은 가문 주치의의 진단에 손쉽게 묵살되었다.

외견상으로는 부상이 없으나 후유증이 남을 있으니-.”

위중하군. 일주일간은 외출을 삼가고 쉬어라.”

?

위중이요?’

으레 의사들이라면 법한 대충 쉬면 괜찮다는 진단에도 공작은 꼼짝 말고 쉬라는 엄명을 남겼다. 그걸로 모자라 무려 별채 안팎으로 경비 병력을 배치하기까지. 그뿐일까. 당일 밤에는 저택에 돌아온 카를로트가 갑자기 나를 부둥켜안더니 난데없이 오열하지 않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어이도 없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더니 아침에 방으로 공작 부인이 문병을 왔다. 무려 공작 부인이 문병이라니! 안부 정도는 물어올 수도 있겠거니 싶었지만 별채까지 직접 줄은 몰라서 조금 놀랐다.

별채는 아무래도 친모가 머물던 곳이니까. …… 역시 이대로 죽어버리기엔 능력이 쓸모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권능이 부인에게 도움이 되어 나를 미워할 이유를 조금이라도 덜어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했다. 그런데 …… 놈을 달고 걸까? 의아한 시선에 공작 부인이 뒤를 흘끔 보더니 후후 웃었다.

오는 길에 마주쳤단다. 마침 너에게 문병 가는 길이라기에.”

네에…….”

공작 부인이 있어서인지 나서서 말을 걸지는 않지만 뒤에서 버티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도 뚜렷한 존재감에 숨이 막히는 것만 같고……. 얀시는 평소처럼 방긋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카를로트는 나를 뚫어질 강렬하게 쳐다보았다. 마치 아는 척해 달라는 것처럼.

. 무시하자.’

공작 부인과 대화하느라 바쁜 사람까지 신경 겨를이 없었다. 부인이 안부를 물었다.

몸은 어떠니? 일주일은 쉬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괜찮아요. 아버지께서 괜히 그러시는 거예요.”

아니란다, 엘로디. 원체 몸이 약한 아이니 후에 탈이 생길 수도 있으니 쉬어 둬야지.”

몸이 약한 편이긴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후로 먹고 잤더니 훨씬 나아졌는데. 아무래도 약한 몸의 원인은 불규칙한 식습관과 수면 패턴, 그리고 스트레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예민해진 탓에 성격도 모양이었고.

그러고 보니 은인에게 인사도 했구나. 우연히 절벽 아래를 지나가던 이안이라는 용병이 구해 줬다지?”

맞아요. 레이, 아니 이안이 아니었으면 멀쩡히 살아남을 없었겠죠. 운이 좋았어요.”

말을 하기 무섭게 내게 향하는 시선이 더욱 강렬해져서 카를로트를 보니, 마치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쟤는 정말 대체 저러는 거야? 애써 무시한 나는 부인과의 대화에 다시 집중했다.

다행이구나. 용병에게는 사례를 해야겠어.”

조만간 저택에 들르기로 했어요.”

그래. 은인을 그냥 보내선 되지.”

마침 부인에게 해야 말이 있던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부인께서 주신…… 선물이요. 제가 실수로 버렸어요.”

내가 말하는선물 독이었다. 이번 암살자들의 피습에서 부인이 줬던 독을 던지는 바람에 해독제를 만들 견본이 사라지고 것이다. 대놓고 말하면 눈치 빠른 얀시가 우리의 은밀한 동업을 알아챌지도 모르니, 알아들을 없도록 돌려 말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암호 같은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부인이 우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들었단다, 엘로디. 요긴하게 사용한 듯하니 다행이구나. 필요하니?”

.”

그래. 보내 주마. 보고 괜찮은지 답을 들려주렴.”

답을 들려주라는 , 빨리 해독제를 만들라는 .

, 부인.”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봐야겠구나. 남매들끼리 우애로운 시간이 필요한 듯하니.”

……필요 없는데요! 불편한 공작 부인이지만 놈을 남기고 이대로 떠날 바에는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힘겹게 참았다.

주셔서 감사해요, 부인.”

배웅은 되었단다. 어서 쾌차하거라, 엘로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산뜻한 걸음걸이로 공작 부인이 침실을 나섰다. 이제 내게 남은 문제는 하나, 아니, 사람이었다.

인간들은 도대체 이러는 걸까.’

나는 이제야 눈에 들어온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사람은 여기까지 거예요?”

먼저 대답한 얀시였다.

리리 네가 걱정돼서. 큰일 겪었잖아. 오빠니까 당연히 봐야지.”

다정하게 웃는 얀시의 얼굴을 보며 나도 마주 보고 웃었다.

퍽이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가식적인 얼굴에 속지 않지. 속으로 죽었네, 목숨줄이 생각보다 질기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뻔했다. 음침한 성격상 어떤 상태인지 직접 확인하러 왔을 테고. 얀시야 원래 속과 겉이 다른 인간이니 그렇다 치고, 카를로트의 방문은 정말 이해할 없었다.

카를. 지금 훈련 시간 아니야?”

상관없어. 하루쯤 빠져도.”

세상에. 검에 미친 카를로트가 무려 하루나 훈련을 빼먹어도 상관없다는 말을 하다니. 깜짝 놀라 카를로트를 올려다보자 녀석이 시선을 피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딴 하나도 중요하니까.”

, 검술이 질렸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 소리를 치던 카를로트가 심호흡하며 앞에 다가와 섰다. 저돌적인 접근에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자 카를로트가 슬쩍 발짝 물러났다.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이윽고 카를로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중요한 있다는 뜻이야.”

그게 뭔데?”

누님.”

“……?”

누님. 리리 누님이 제일 중요하다고.”

지금 내가 들은 거지? 아무래도 절벽에서 떨어지느라 청력 손상이 같다. 손으로 귀를 막았다 뗐다를 반복하자 카를로트의 얼굴이 터질 붉어졌다.

, 지금 하는 거야?”

들려, 카를.”

“…….”

주치의를 만나야겠어. 사람 나가 줄래?”

진지하고 정중한 태도로 나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사람 미동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오히려 카를로트는 침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리리 누님.”

“……으악!”

소름이 돋았다. 나는 고함을 내지르며 또다시 귀를 틀어막았다. 질린 얼굴로 카를로트를 보다가 슬쩍 뒤를 보니 얀시가 주먹을 입가를 가리며 웃고 있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제정신이 아닌데 웃음이 나오냐고!

카를, 부상이 심각한 같아.”

하나도 다쳤어.”

그건 본인이 판단하는 아니야. 지금…… 심각해.”

뭐가?”

…….”

차마 미친 아니냐는 말을 밖으로 꺼낼 없어 입술을 달싹이자 녀석이 피식 웃었다.

미쳤어. 제정신이야.”

마음을 읽기라도 카를로트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있었다. 카를로트도 미쳤다. 얀시도 정상이 아닌 같더니, 이제 카를로트까지 미쳐 버릴 줄이야. 그도 그럴 , 바로 어제까지 나를 싫어하던 카를로트였다. 호위인 것조차 끔찍하게 싫어하던 녀석인데, 기어코 나갔다가 습격까지 당하지 않았나. 오히려 때문에 자기가 습격당했으니 책임지라고 고래고래 따지고들 녀석이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할 없으니 미쳤다는 결론이 타당했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분명했다.

혹시 새로운 복수 방법인가?’

그렇다기엔 너무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었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카를로트가 무려 싫어하는 사람을누님이라고 부르다니. 하지만 가만히 당하고 있을 나도 아니었다.

나한테 불만 있으면 이러지 말고 말로 , 카를로트.”

말에 카를로트의 표정이 언뜻 굳었다.

“……그런 아닌데.”

그럼 대체 이래?”

“……, 잠깐 나가 있어 . 누님이랑 있으니까.”

잠깐 들이던 카를로트가 진지하게 무려 얀시를 내쫓으려 했다. 그저 웃는 얼굴인 얀시는 어깨를 으쓱이며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 문이 닫혔다. 셋일 때도 어색했는데, 둘만 남으니 어색해서 미쳐버릴 같았다.

아니면 내가 기어코 살아 돌아온 불만인 건가?’

온갖 가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그때, 들려온 카를로트의 말은 매우 뜻밖이었다.

미안해.”

“……?”

미안. 내가 잘못했어. 그동안 막말하고 무시했던 , 사생아라고 불렀던 , 사사건건 시비 걸었던 , 내가 잘못했어…….”

고개를 숙이며 카를로트가 말을 하는 동안 나는 그저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트가, 나한테 사과를 했다.

사실 나는…… 누님이 어떤 사람인지 계속 궁금했는데…… 내가 너무 못된 자식이라 고집대로만 행동한 거야. 잘못했어. 다시는 그럴게.”

“…….”

내가 아무 없이 눈만 깜빡이자, 마치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눈을 카를로트가 나를 처연하게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역겨워?”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적이 있어?”

카를로트를 좋아한 아니지만, 그렇다고 역겹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할 이유는 없으니까 따라서 싫어했었지. 그래서 카를로트가 얼마나 나를 싫어했는지 아니까, 변화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머뭇거리던 카를로트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시선의 끝에는, 꼼지락거리는 손이 있었다.

“……누님이, 손을 잡았으니까.”

?”

절벽에서…… 손을…….”

카를 네가 더럽다고, 닿지 말라고 했잖아.”

말에 카를로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멍해졌다.

.”

무언가를 떠올리는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내가 기억하는 그때를 카를로트도 떠올리고 있는 걸까.

미안해. 더러워. 하나도 더러워.”

아까까지만 해도 장난스럽게 웃던 녀석이 표정을 바꾸고 눈시울을 붉혔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무엇이 카를로트의 마음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 나를 싫어하지 않다면 나쁠 이유도 없었다. 페르디아를 떠나기 전까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괜찮겠지.

알겠어. 알겠으니까-.”

용서해 거야?”

“…….”

그렇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테니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자 카를로트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용서해 달라고 할게. 밀어내지만 .”

그래.”

대답이 뭐라고 안심이 건지 카를로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 평생 누님 호위할 거야.”

아냐, 거절할게.”

누님은 내가 지켜.”

아니, 지켜도 .”

이제부터, 누님의 개가 거야.”

아냐, 사람이야…….”

정신 차려…….


23. 엘로디 쟁탈전

6–7 minutes


내가 카를로트의 직진 폭격에 정신을 차리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자 열린 문에 기대 있는 얀시가 보였다.

이야기 끝났어?”

아니, 조금만 -.”

카를로트가 뭐라 하기 전에 내가 얼른 말을 끊었다.

끝났어요. 들어와도 돼요!”

카를로트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보였지만 얀시에게 손짓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카를로트를 흘긋 얀시가 침대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그보다 리리.”

.”

용병왕 이안. 그자와 전부터 알던 사이였니?”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순간 혼돈에 빠졌다. 우연히 구해 줬다고 분명 말했는데 이런 질문을 하는 …….

뒤에 사람을 붙였네. 최소한 외출부터.’

감추려는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멍청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하나였다. 괜히 얀시에게 날을 세워 봤자 소용없단 아는 나는, 그냥 질문에 대답이나 했다.

. 전에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같더라구요.”

그래?”

그렇죠.”

그렇구나.”

미심쩍은 얀시의 미소가 진해졌지만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레이안이 용병왕 이안이었다니.’

그에 대해서는 나도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평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중 명이었으니까. 빈민가 출신의 평민. 혈혈단신의 몸으로 어린 나이에 용병판에 뛰어들어 이윽고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용병을 제압하여 그들의 위에 군림한 자였다. 용병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된다고 했었나? 그런 유명한 사람인데 내가 알아보지 못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마사를 통해 정보를 알아보려고 했던 귀족 한정이었으니, 평민인 레이안이 나올 리가 없지. 후보에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원작에 용병왕 같은 존재는 등장 했는데.’

여전히 레이안의 존재는 내게 의문이었다. 나를 저택에 데려다준 떠나가기 레이안이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조만간 제가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정확한 날짜를 알려 주지 않은 모호한 방문 알림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대방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마냥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먼저 찾아가 버릴까.’

생각을 하기 무섭게 얀시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자와 가까이하지 않는 좋겠어, 리리.”

얀시가 드물게 웃음기 없는 얼굴로 경고했다.

왜요?”

무려 얀시의 경고였다. 페르디아에서 음침하기로는 1등이니만큼 당연히 레이안에 대한 정보가 많을 테니,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얀시가 아무 이유도 없이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굳게 믿으며 물었는데…….

그냥.”

“……?”

그냥? 그냥이라고? 얀시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나는 벙찌고 말았다.

이유는 없어요?”

이유를 대자면 많지. 페르디아의 일원인 네가 일개 용병과 알고 지낼 이유가 없고, 불순하게 접근, 아니, 아니야. 뒷말은 들은 거로 .”

뭐야.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이유가 없다는 말이네. 물론 얀시의 말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레이안은 무언가 중요한 나에게 숨기고 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선 자주 접촉하며 정보를 얻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를 구해 주었으니 가문 차원에서 보상할 텐데, 우선은 핑계로 만날 생각이었다. 과정에서 뭔가 중요한 알아낼 있다면 좋겠는데…….

아니, 잠깐만. 그것보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턴가 얀시의 손이 손을 은근슬쩍 잡고 있다는 깨달았다. 장갑을 얀시의 손끝이 손등을 가볍게 덮더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들어 올렸다 내렸다 손장난을 치기도 했다. 얀시 페르디아. 인간이 어떤 인간이던가. 타인과 닿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웬만하면 접촉하지 않는 그런 캐릭터였다. 왜냐하면 권능 제어가 되니까, 실수로 접촉한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그런데 이렇게 거리낌 없이 나를 만진다는 -.

나는 다쳐도 상관없다는 ……?’

원래도 성격 나쁜 놈이라는 알고 있었지만, 정도까지 나를 함부로 대할 줄은 몰랐다. . 어처구니가 없어서 얀시를 쳐다보았지만 얀시는 손을 붙잡고 조물조물 장난치는 열중할 뿐이었다.

“……얀시 오라버니, 지금 하는 거예요?”

리리 네가 큰일을 당했잖아. 놀랐는데 이렇게 잡고 있으니 안심이 돼서. 계속 잡고 있어도 ? 불안해서 놓을 수가 없어.”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없었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모르겠고…….

카를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는데, 얀시도 미쳤었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손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어떻게 하면 음침한 얀시에게 추후 보복당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손을 빼낼 있을까 궁리할 때였다. 슬금슬금 가까워진 카를로트가 얀시에게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에 얀시가 여우처럼 웃으며 어째서인지 올리는 어조로 카를로트를 자극했다.

카를, 그거 알아? 리리 엄청 부드럽고 따뜻해.”

“……!”

말랑말랑하고…….”

얀시가 보란 듯이 손을 흔들어 보이자 카를로트가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다.

누님, 나도 .”

?”

나도 부드럽고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누님 잡고 싶어.”

언제는 스치기만 해도 더러운 것에 닿은 진저리치던 녀석이, 이제는 손을 잡고 싶단다. 이번에도 역시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자 눈치를 보던 카를로트가 슬금슬금 손을 붙잡았다. 조물조물. 주물주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누가 설명해 주실 ……? 졸지에 형제에게 각각 손씩 붙들린 나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건 역시, 새로 고안해 괴롭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고.  

  ***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엘로디의 얼굴이 이내 백지장처럼 질렸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표정 변화를 제법 흥미롭게 관찰하던 얀시는 웃으며 엘로디의 손을 놓아주었다.

자길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니까.’

오늘은 정도로만. 이유는 없지만, 엘로디는 지금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생이라며 말로는 친절한 굴었지만 사실은 들여다본 적이라곤 번도 없었으니. 얀시에게 엘로디는 특별한 존재였다. 가식적인 가면을 쓰지 않은 민낯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은 사람. 쏟아지는 폭언에도 오히려 등을 두드려 주던 그런 아이. 그런 주제에 누군가 다가오면 곧바로 밀어내려고 하지. 얀시는 엘로디의 일상에 스미고 싶었다. 자각하지 못하도록 아주, 천천히. 계기는 분명했다. 엘로디가 6 월식의 밤에 자신의 폭주를 지켜보았던 사람이라는 알게 되었다는 . 얼마 월식의 밤에 폭주하는 자신을 보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던 것이 증거였다. 얀시는 궁금해졌다. 정말로, 진짜 모습이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어디까지 나를 견딜 있을지. 그랬는데, 카를로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이유 모를 자극을 받았다. 엘로디의 실종 이후 태도를 바꾸고누님이라 부르며 시선 자락 받아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경쟁할 일이 아닌데도, 뒤처지지는 않을까 하는 치기 어린 생각이 머리를 드는 왜일까.

유치하긴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엘로디와의 접촉에 유독 집착하게 되는 이유도 명백히 존재했다. 엘로디와 접촉하게 되면 평소 날이 통제하던 권능이 놀랍게도 잠잠해졌다. 잔뜩 곤두세운 신경이 느슨해지고, 폭주할 걱정 따위 필요 없으니 절로 나른해졌다. 그러니 계속 닿고 싶을 수밖에. 너무나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보이는 엘로디를 위해 얀시는 가기 싫다는 카를로트를 잡아끌며 인사했다.

그럼 내일 , 리리. 쉬고.”

, 내일도 온다고요?”

그럼. 내일도 오고 모레도 오고 매일매일 올게.”

그래도 되는데……?”

마지막 엘로디의 말을 들은 얀시는 문을 닫았다. 엘로디의 손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던 영향인지, 권능을 다루는 평소보다 훨씬 수월했다.

이유가 뭘까.’

엘로디의 어떤 점이 통제력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걸까. 의문이 이상 그냥 뭉뚱그려 넘어가는 얀시가 아니었다. 그는 이유를 알아낼 끈질김의 소유자였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그래. 가족인 이상, 알아갈 시간은 충분했다. 미소 짓는 얀시를 돌아본 카를로트가 얼굴을 빤히 보더니 말했다.

, 기분 좋아 보이네.”

그래?”

얀시는 입가를 매만졌다. 웃고 있어서 지금 웃는 모습이 뭐가 다른 건지 스스로는 없었다. 그에 반해 졸지에 얀시를 따라 끌려 나온 카를로트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며칠만의 극명한 변화였다.

변했네, 카를. 이제 엘로디가 싫지 않은가 .”

그러는 형이야말로.”

엘로디가 앞에 있을 때는 물불 가리지 않고 들이댔지만, 막상 당사자가 없으니 행동이 어땠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카를로트는 얼굴을 붉히며 괜히 말을 돌렸다.

하던 짓을 ?”

리리는 동생이잖아.”

소리.”

카를로트가 진저리를 치자 얀시는 그저 웃었다. 그는 줄곧 엘로디를 동생이라고 말해 왔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카를로트가 의미까지는 이해하지 못한 듯하지만.

그러고 보니 조만간 연회 열리잖아. 누님은 누구랑 같이 입장하는 거지?”

이번에 열리는 황실 연회의 주최자는 2황자의 친모인 살바트리체 황비였다. 2황자와 황위를 놓고 경쟁하는 만큼 1황자 아덴미르와 황비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당연히 이번 황실 연회에 1황자는 불참했다. 하지만 페르디아 가문의 모든 구성원은 황비에게 초대장을 받았으니 불가피한 이유가 아니라면 연회에 참석하는 편이 좋았다. 그러니 엘로디도 참석하는 연회였다.

그랬던 대로 파트너 없이 입장하겠지.”

그래? 그럼…….”

형제는 동시에 생각했다.

내가 리리의 파트너로 참석해야겠네.’

리리 누님 파트너라니, 기대된다.’

물론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몰랐다. *** <창공의 용병단> 솜니아 지부. 단장실에 있던 레이안은 페르디아 가문으로부터 서신 통을 받았다. 일전의 일로 감사를 표하고 싶으니 방문해 달라는 내용의 서신. 레이안의 측근이자 부단장인 마리오가 질겁하며 물었다.

단장. 페르디아 가문과 대체 무슨 일로 엮인 겁니까?”

신경 꺼라.”

당연히 신경은 건데요, 궁금해서 그러죠.”

궁금해하지도 .”

단호한 대답으로 일관한 레이안은 곧바로 페르디아 가문으로 향했다. 미리 이야기해 건지 도착하자마자 레이안은 어딘가로 안내받았다. 들어선 응접실에는 페르디아 가문의 가주 실베스터 페르디아 공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앉지.”

레이안이 공작의 맞은편에 앉자 곧바로 사용인이 다과를 준비했다. 다과가 준비되는 동안 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준비를 마친 사용인이 응접실을 나선 이후에야 공작이 먼저 입을 뗐다.

딸을 구해 대가로 자네 용병단에 투자를 하려고 하는데, 어떤가.”

그런 대가를 바라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있는 대가는그런 대가뿐이라.”

레이안은 공작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금전적 대가를 충분히 치를 테니 먹고 떨어지라는 의미인가. 거기에는 엘로디에게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을 . 그러나 오로지 엘로디 페르디아에게만 관심이 있는 레이안으로서는 받아들일 없는 제안이었다. 레이안의 목적은, 엘로디뿐이었으니까.

엘로디 아가씨를 뵙고 싶습니다.”

.”

단호한 공작의 대답. 그러나 레이안도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제가 구한 것은 아가씨의 목숨입니다. 그러니 대가는 아가씨께 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딸이니 아비인 내가 대신 대가를 치르겠다.”

아가씨를 뵙겠습니다.”

된다고-.”

공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쿵쾅쿵! 누군가 성의 없이 문짝을 두들기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너머 있는 다름 아닌 엘로디였다. 응접실 안을 둘러보던 엘로디와 레이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레이안!”

저도 모르게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에 좀처럼 표정 변화 없기로 유명한 페르디아 공작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안?”


 

24. 저를 고용해 주십시오

6–7 minutes


아차.’

엘로디가 당황하며 레이안을 돌아보았다.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에이안 아닌 레이안이라고 불러 버렸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이안인 듯한데, 혹시 문제가 되는 걸까. 한편, 딸이 다른 남자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다는 사실에 아주 잠깐 심기가 불편했던 공작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레이안이라, 어디서 들어 같은 이름이군.’

그런데 정확히 어디서 들어 봤는지는 없었다. 그냥 그런 같다는 느낌만 들뿐. 공작이 생각에 잠긴 짧은 사이, 엘로디는 레이안과 눈빛 대화를 시도했다. 괜찮냐는 의미로 쳐다보았는데, 레이안은 그저 엘로디를 바라볼 뿐이었다.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가 보네.’

혹시나 실수했나 싶어 걱정한 엘로디는 막상 레이안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자 속으로 안도했다. 그보다는 지금 상황이 문제였다.

진짜 왔잖아. 마사가 줬으면 몰랐을 뻔했어.’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정신 나갈 것처럼 잘생긴 사람이 저택에 왔다는 마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레이안이 방문했다는 몰랐으리라.

저를 부르셨어요? 이안은 저를 구해 은인인데…….”

엘로디의 질문에 페르디아 공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부르려고 했다.”

“…….”

페르디아 공작은 자신을 응시하는 레이안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엘로디는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자리에 앉으려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자리에 앉으려던 때였다.

엘로디.”

?”

놀라 고개를 들자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 앉아라.”

공작이 가리킨 곳은 옆자리였다. 번도 공작과 나란히 앉아 없는 엘로디에게는 정말이지 낯선 명령이었다. 쭈뼛쭈뼛 공작의 옆자리에 앉은 엘로디는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레이안과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야, 이안.”

.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지난번에는 고마웠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늘로 레이안과 번째 만남이었다. 만남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짧았던 번째와 목숨을 구해 주었던 번째 만남. 그리고 지금. 이름조차 모르던 사내의 이름과 신분을 알게 되었지만 의도를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방심할 없는 상대였다.

만약, 정말로 혼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니라면 곤란하니까.’

레이안은 꿈속에서 윤가을을 보았다고 말했고, 장면을 보는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엘로디는 엄마의 유품이 깨어지는 순간 전생의 기억을 모두 떠올렸다. 그런 것처럼 레이안도 어떤 계기가 생긴다면 전생의 기억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어쨌든 레이안이라는 존재가 변수니만큼 근처에 두고 관찰해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엘로디는 어째선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페르디아 공작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 무슨 이야기하고 계셨어요?”

너를 구해 대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죠. 이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지 못했을 테니까.”

말에 페르디아 공작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

“……보상은 말했던 대로 이야기를 끝내는 걸로 알겠다.”

거절하겠습니다.”

공작과 레이안의 의견 충돌에 중간에 엘로디는 어리둥절해졌다.

대체 무슨 대가를 말했길래?’

무려 딸인 제게 돈을 쓰지 않는다며 10 라리트를 쓰라는 명을 내릴 정도의 공작이었다. 그러니 금전적으로는 섭섭한 대가를 말하지 않았을 . 공작과 대치하던 레이안이 이내 엘로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가 구한 것은 엘로디 아가씨니, 아가씨께 대가를 받고 싶습니다.”

? 무슨 대가를 받고 싶은데?”

말에 레이안이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저를 고용해 주십시오.”

자신을 고용해 달라니. 레이안은 창공의 용병단의 단장이며 용병왕이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런 실력자가 고용을 직접 청탁할 정도라면……!

혹시…… 이안의 용병단 자금 사정이 많이 어려운가……?”

이렇게 직접 영업해서 뛰어야 정도로? 조심스러운, 그러나 더없이 진지한 엘로디의 질문에 남자는 급격히 조용해졌다.

“…….”

“…….”

엘로디는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과 레이안의 눈빛에, 잘못 짚었다는 깨달았다. 흠흠, 헛기침한 엘로디가 레이안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안을 용병으로서 고용하라는 이야기야?”

.”

? 문제가 아니라면,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돼서.”

레이안이 페르디아 공작을 잠깐 다시 엘로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2황자가 저를 포섭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2황자가?”

. 황제의 인정을 받는 유일한 용병단이니, 저를 수하로 들이려 접촉하고 있습니다.”

엘로디는 어째서 레이안이 제게 고용되겠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있었다. 2황자가 그를 세력으로 포섭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황위 다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1황자의 세력과 연결되어 2황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나을 것이다.

나한테도 나쁘지 않아.’

엘로디는 마음속 저울을 이리저리 보았다. 창공의 용병단. 레이안이 소유한 용병단은 2 넬터 왕국과 전쟁을 치러 전공을 세운 전적이 있었다. 일로 황제의 인정을 받아 용병왕이라는 별칭과 함께 평민이지만 귀족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그런 레이안이 내게 고용된다면 가장 좋은 점은, 이상 외출 카를로트가 나를 호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레이안이 평민이라도, 황제의 인정을 받은 그를 2황자가 건드리지는 못할 테니까. 어차피 전생의 이름을 아는 레이안이니만큼 내가 독립 자금을 벌기 위해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그러려니 테고. 나쁠 없는 제안이다. 엘로디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그래!”

거절하지.”

페르디아 공작이 동시에 거절의 답을 내놓았다.

“……!”

공작과 엘로디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다.

저자를 신뢰하느냐?”

목숨을 구해 사람이에요.”

목적을 가지고 구해 주었을 수도 있지. 혹은 저자가 너와 카를로트를 습격한 자와 한패일 수도 있다.”

무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엘로디는 당황하며 레이안의 눈치를 보았지만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작의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반응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가 없다니까.’

어쨌든 독립 자금을 자유롭게 벌려면 레이안이 필요했다. 어차피 레이안을 근처에 두고 지켜볼 명분도 필요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이번 건은 페르디아로서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대외적으로 창공의 용병단이 페르디아와 긴밀한 관계로 비친다면, 1황자 전하의 영향력이 커질 테니까요.”

“…….”

말이 틀린가요?”

. 페르디아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반박할 수가 없군.’

엘로디가 습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낯선 사내가 아이를 구해 줬다는 사실도, 그자가 용병 이안이라는 사실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번이나 봤다고 제법 친밀해 보이는 것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용병으로 고용까지 한다니. 하지만 용병이 말한 것이 진실이라면,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옳았다. 짧은 고민 끝에 공작은 결론을 내었다.

그렇다면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지.”

계약서. 그가 말한 계약서는 계약 사항을 어긴 자에게 저주가 내리는 마법 계약서였다. 페르디아 가문의 방계 저주 권능을 가진 녀석이 제작하는 계약서였다. 사실을 알고 있던 레이안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동의했다. 어떤 허무맹랑한 저주가 조건으로 달려 있어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생은 반드시 지켜야 하니까. ……윤가을, 당신을.’

시선의 끝에는 엘로디가 있었다.

  ***

오늘은 기필코 해독제 만들고 만다.”

-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카를로트가 방에 쳐들어왔다.

누님……!”

……. 나는 체념하며 독약 병을 서랍 깊숙이 넣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해 놓고 부인께 해독제를 넘기지 못한 벌써 주가 흘렀다.

게으른 사람으로 생각할 아냐.’

공작 부인 얼굴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런 안타까운 사정도 모르는 카를로트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앞까지 척척 걸어왔다.

이안이라는 용병이 누님의 호위라니, 정말이야?”

맞아.”

? 내가, 내가 누님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그래서 그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카를로트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연신 질문을 퍼부었다.

그때 그건 내가 방심해서 그런 거고, 다시는 그런 겪게 할게. 계속 호위하면 ?”

사실 내게는 이런 카를로트의 태도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잘못했다고 사과했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이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내가 페르디아 공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바로 태도를 바꿀 수도 있었다. 이상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은 좋지만, 그렇다고 이상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데면데면한 누나 동생 관계, 정도가 좋은데.’

어쨌든 흥분한 카를로트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가 명령하신 일이야.”

호위로 지정한 것도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거였잖아.”

이럴 수가. 공작 핑계도 통하다니. 오만상 찌푸릴 언제고 이제 계속 호위를 하겠다며 부득불 우기는 카를로트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쩔 없어, 카를로트.”

“…….”

카를로트가 금방이라도 것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따라 우는 얼굴을 너무 많이 봤다. 울었다가는 달래는 일이라, 카를로트의 어깨를 토닥이며 타이르듯 말했다.

창공의 용병단과 거래하기 위한 명분으로 고용한 거야. 외출 시에만 호위하는 조건으로 계약했고.”

그럼 계속 누님의 호위야?”

.”

저택 안에서 호위가 필요할 일이 있다고. 카를로트가 멍청해서 다행이다. 어쨌든 계속 호위라는 말에 카를로트의 기분이 풀린 듯했다. 용건도 끝났겠다 이제 주었으면 싶은데, 카를로트가 우물쭈물하며 앞을 얼쩡거렸다.

누님, 이번 황실 연회 …….”

?”

누구랑 , 아니, 이게 아니라…….”

나는 말꼬리를 늘이며 답답하게 말하는 내용에서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유추했다.

황실 연회 누구랑 거냐고?”

, 혹시 사람 없으면-.”

이안이랑 같이 가기로 했는데.”

……?”

마치 나라 잃은 백성처럼 카를로트가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라니. 1황자 전하께서 불참하시고, 원래 혼자 참석했잖아.”

? 자식이야?”

이번에 용병으로 이안을 고용했으니까 호위 같이 가는 거지.”

2황자에게 창공의 용병단과 페르디아와의 관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함께 공식 행사에 참석할 필요가 있었다. 매번 파트너는 1황자였지만, 이번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으니 마침 좋은 기회였다. 그런 속사정을 설명해 주었지만 카를로트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아니, 자식 인정 . 역시 마음에 들어. 든다고!”

진정해, 카를.”

내가 그놈을 실력으로 무참히 꺾어 버리면? 그러면 ? 내가 강하다는 증명하면 되잖아? ?”

카를로트의 황금색 눈에 초점이 살짝 나갔다. 나는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누가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님의 호위는 나야. 그러니까 내가 누님의 파트너라고. 그러니까 내가 같이 참석하는 맞단 말이야! 어디서 굴러먹다 지도 모르는 그딴 자식이 아니라, 누님의 동생인 내가!”

급기야 카를로트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도 잔뜩 돌아 버린 눈으로.

25. 페르디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7–8 minutes


  카를로트의 생떼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평소에는 서로 날만 세웠기에 몰랐는데, 이제 보니 카를로트도 역시 제멋대로인 10 막내 자체였다.

이렇게 떼만 쓰는 철부지일 줄이야.’

이런 성격일 줄은 몰랐다. 그것만이라면 좋았겠지만 묘하게 광기가 느껴져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아마 페르디아 가문이 아이가 자라기에 정서적으로 훌륭한 가정환경이 아니니 기분을 저런 식으로밖에 표출하지 못하는 거겠지. 저러다 정말로 레이안을 찾아가 결투를 신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해.”

하지만, 누님.”

그만해, 카를로트 페르디아.”

카를로트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말하자 금방이라도 쳐들어갈 것처럼 굴던 녀석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새침한 눈매가 늘어지자 한층 시무룩해 보였다. 저런 얼굴을 때마다 영락없는 어린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를 살살 보던 카를로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화났어?”

아니. 딱히 화낼 일도 아니고.”

말에 카를로트의 표정이 아주 약간 밝아졌다. 하지만 카를로트가 그렇게 굴수록 기분은 반대로 저조해졌다. 화가 나는 것도 일말의 관심이 있어야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카를로트에게 관심을 여유가 없었다. 미래를 걱정하느라 바빴으니까. 카를로트가 난데없이 진짜 남동생처럼 구는 것도 사실 한때라 여겼다. 눈앞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봐서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겠지. 페르디아의 직계가 그렇게 심약한 의외이긴 하지만. 나는 며칠 동안 카를로트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카를, 부탁이 있는데.”

, 누님.”

뭐든 말하라는 카를로트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 별채에는 왔으면 좋겠어.”

“…….”

나는 선을 그었다.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카를로트와 세계는 달랐다. 페르디아의 직계이자 공작의 번째 아들인 카를로트. 언니가 나타나기 전에 저택에서 사라질, 사실 페르디아의 피가 방울도 섞여 있지 않은 . 어차피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이어지지도 못할 관계였다. 그러니 가까워지지 않는 옳았다. 카를로트는 아무 없이 그저 것만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죄책감이 드는 , 내가 외로웠기 때문일까. 고작 며칠 관심을 받았다고 내가 내뱉은 말에 도리어 내가 상처를 받을 정도로.

정신 차려.’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 . . 그리고 같은 시간. 엘로디의 침실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

적막한 복도에 고요히 있는 얀시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웃는 모습을 보여야 사람이 없으므로 미소 지을 필요가 없었다. 얀시 또한 엘로디의 근처에 심어 놓은 수하에게서 용병 이안을 호위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참이었다.

한발 늦었군.’

그래 왔듯 어차피 엘로디에게 파트너가 없을 테니 직전에 손을 내밀 생각이었다. 대개 인간이란 극적인 순간에 누군가 손을 내민다면, 그때를 잊지 못한다. 그래야 그에게 마음을 쉬이 테니, 얀시 딴에는 나름 계산을 것이었다. 한데 호위에 이어 연회의 파트너까지 용병 이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거슬려.”

공교롭게도 얀시가 엘로디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즈음부터 그녀 주변에 이안이라는 존재가 얼쩡거렸다. 누가 봐도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접근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엘로디는 무르게 군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생의 남자관계에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엘로디에게는 약혼자가 있지 않던가. 1황자인 아덴미르에게는 감정이 없었다. 애초에 엘로디가 원해서 성사된 약혼이었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아덴미르는 엘로디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지금 와서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용병왕 이안은 달랐다. 그자는 처음부터 엘로디를 노리고 접근했다.

단순히 페르디아를 등에 업기 위함인가?’

그런 목적이었다면 이미 달성했다고 있었다. 엘로디와 함께 황실 연회에 참석하게 되면 창공의 용병단이 페르디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사교계에 공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뿐이면 상관없을 텐데, 어째서인지 그자의 존재가 거슬렸다. 잠깐 마주쳤을 뿐이지만 순간의 기억이 강렬하기 때문일까. 찰나였지만 그자가 엘로디를 보는 시선을 잊지 못했다. 분명 가벼운 감정이 아니었다. 어떤 감정인지는 명확히 없지만 정의할 없을 정도로 깊은 감정임은 알았다. 마침 엘로디에게 다신 오지 말라며 내쫓김과 다름없는 말을 들은 카를로트가 힘없이 침실을 나섰다. 그는 어두운 복도에 가만히 있는 형을 발견했다.

-.”

.”

얀시가 다시금 얼굴에 가면 같은 미소를 띠며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들어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같으니까, 이만 돌아가려고.”

얀시로서는 엘로디가 카를로트에게 별채에 오지 말라고 말한 딱히 놀랍지 않았다. 엘로디가 그들 형제에게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 감흥이 없었기에. 본채로 돌아가는 . 카를로트가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실수한 건가…….”

카를로트는 아닌 듯했다. *** 가문 주치의의 완치 판정이 떨어지고 나서야 외출 허락을 받은 나는 곧바로 레이안을 호출했다. 그는 정말로 내가 단거리 통신 마도구로 연락을 보내기 무섭게 시간도 되지 않아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외출을 위해 페르디아의 마차에 올랐다. 둘만 남게 되자 곧바로 레이안에게 물었다.

대외적인 이름은 이안이던데, 레이안이라고 부르면 곤란한 거야?”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부르시든.”

그래도 질문을 받으면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남들 앞에선 이안이라고 부를게.”

.”

신분이 귀족이기 때문인지 나를 대하는 레이안의 태도는 정중했다. 처음부터 레이안은 내게 말을 놓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신분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일까. 하도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 정도 의문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차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턱을 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레이안이 나를 불렀다.

그런데 아가씨.”

아가씨는 무슨, 그냥 이름 불러. ?”

누군가 아까부터 우리를 쫓고 있습니다. 가문의 호위입니까?”

감시하는 사람을 붙였다는 막연히 짐작하고 있는 것과 진짜 있다는 확인하는 다른 문제였다. 감시당한다는 좋은 일은 아니니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안에게 감정을 내지 않으려 옅게 웃었다.

호위는 아니고…….”

오라버니가 붙인 감시? 아니면 그냥 호위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설명해도 이상하다. 뒷말을 고르며 말꼬리를 늘어뜨리자 레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거할까요.”

으응?”

농담인가 싶어 레이안을 쳐다봤지만 더없이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심인 듯했다. 전장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가진 레이안이니만큼 내게 붙어 있는 감시자를 충분히 제거할 있을 .

괜찮아. 그냥 내버려 . 얀시 오라버니가 붙인 사람들이거든.”

어째서?”

이해할 없다는 반응이었다. 레이안의 반응이 정상이었다. 아무리 다른 배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남매인데 사람을 붙였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다퉈야 있는 관계라면 모를까, 내가 가진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 내가 거슬리는 거겠지.”

통제벽이 있는 얀시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안심이 정도로.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내버려 두겠습니다.”

그래. 근데 당신은 뭐야.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아가씨에 이어 당신. 일부러 이름을 부르는 피하는 같은데, 착각일까. 집요하게 레이안을 쳐다보자 결국 그가 백기를 들었다.

, 엘로디 .”

?”

“……고용주잖습니까.”

그것만큼은 포기할 없다는 단호한 대답에 이번에는 내가 물러났다.

그래요, 레이안 .”

“…….”

농담이야.”

하핫. 가볍게 웃었지만 레이안은 웃지 않았다. 대신 의미 모를 시선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또다.’

레이안은 종종 이런 식으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누군가를 만난 사람처럼.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같아 괜히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면 민망한데.”

“……어딜 가는 겁니까?”

말을 돌리려는 건지 레이안이 창가에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하지만 마땅히 있는 답이 없었다.

……. 글쎄, 어디 갈까?”

?”

그냥, 방에만 있기 답답해서 나왔어.”

아무도 오지 않아 오로지 나만의 공간이던 별채는 이제 이상 안식처일 없었다. 혹시나 얀시나 카를로트가 찾아올까 , 불편했다. 언제 불쑥불쑥 올지 모르니 권능을 사용할 짬도 나지 않아 없기도 하고.

이젠 집에서도 편하게 있을 곳이 없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멍하게 창밖만 바라보는 뺨에 머무는 레이안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마차로 시내만 뱅뱅 돌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갔다. *** 살바트리체 황비가 주관한 황실 연회는 눈이 것처럼 화려하고 성대했다. 그녀는 권력을 과시하듯 연회에 참석한 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살바트리체 황비의 걸음이 멈춘 곳은 도로테아 앙겔로스의 앞이었다.

오늘따라 눈부시네요, 도로테아 .”

감사합니다, 황비 전하. 전하의 칭찬에 바를 모르겠어요. 전하야말로 오늘 연회 홀에서 가장 아름다우신걸요.”

후후, 겸손하기도 해라.”

4 가문 하나인 앙겔로스. 앙겔로스 공작의 하나뿐인 외동딸인 도로테아는 그가 애지중지 아끼는 금지옥엽이었다. 겉으로 공표하지는 않았으나 앙겔로스 공작이 2황자를 차기 황제로 밀고 있기에 살바트리체 황비와 앙겔로스 가문의 사이는 각별했다. 그래서 황비는 특히 남들이 보는 앞에서 도로테아를 치켜세워 주며 싸고돌았다. 특히 오늘 도로테아는 2황자와 함께 입장했기에 등장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입장과 동시에 2황자는 상석으로 올라갔지만, 그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그럼, 즐겁게 즐기다 가길 바라요, 도로테아 .”

, 황비 전하.”

황비의 눈에 보이는 총애에 도로테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레이디들이 남몰래 질시의 눈길을 보냈다. 도로테아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즐겼다. 도로테아 앙겔로스는 아름다웠다. 황비가 가장 아름답다며 칭찬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홀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에 띄는 존재라는 것을.

무려 라베루시크 의상실에서 맞춘 드레스라고.’

안타깝게도 다른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기고 의상 디자인에서 마담 라베루시크가 이번에 특별히 디자인하여 제작했다는 이번 분기의 역작 드레스는 손에 넣지 못했다. 영애가 눈치 없이 운을 떼었다.

도로테아 양께서 드레스를 입고 오실 알았는데요.”

“……그런가요?”

도로테아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묻자 다른 영애가 떠올랐다는 말했다.

드레스라면 레이디 페르디아께서 가셨다고 해요.”

아아, 그래요?”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엘로디 페르디아. 그녀만큼 아름다운 레이디기는 하지만 도로테아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명실상부 사교계의 꽃은 그녀 자신이었다. 외모 수준이 비슷하다고 한들, 처지가 달랐다. 앙겔로스 공작이 아끼는 외동딸인 자신. 그에 반해 엘로디는 페르디아 공작의 사생아였다. 드레스며 장신구며 물질적인 것은 부족함 없이 지원해 주지만 다만 그뿐이었다. 겉으로 화려하면 하나, 가문의 누구도 엘로디를 챙기지 않는데. 물론 페르디아의 누구도 엘로디를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냉랭한 태도가 증명했다. 거기다 성격까지 더러워서 주변에 사람도 없었다. 추근대는 영식을 사건은 아직도 몇몇 살롱에서 회자되곤 했다.

상대가 되지.’

그러니 오늘 연회의 꽃도 자신일 것이다. 도로테아는 자신에게 도취되어 부채질을 하며 후후 웃었다. 그렇게 한창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그때였다.

페르디아 가문의 레이디 페르디아와 창공의 용병단 단장 이안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입구 쪽으로 쏠렸다.

누구?”

이안? 설마 용병왕 이안?”

평민이면서 황제의 인정을 받은 용병단의 단장인 이안은 밑으로 들어오라는 여러 권세가의 러브콜에도 응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외모에 홀려 구애한 귀족가의 레이디들이 있었으나 차갑게 거절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용병왕 이안이 황실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것도…… 페르디아의 망나니와?! 경악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웅성거림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듯 천사처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엘로디, 그리고…… 황홀할 정도의 외모를 가진 용병왕 이안이 안에 걸음을 내디뎠다.  

  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허어…….”

믿을 없다는 누군가 내뱉은 탄식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그러나 놀라운 그뿐만이 아니었다.

페르디아 공작과 부인, 공자 드십니다!”

뒤이어 페르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번에 입장했다. 입장과 동시에 쪼르르 튀어나온 카를로트가 이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엘로디에게 달라붙었다.

누님, 누님이 선물해 입었는데…….”

눈길 자락 받아 보겠다고 눈치를 보며 아양을 떠는 카를로트.

, 그래?”

그에 반해 엘로디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리리, 춤은 나랑 추자.”

대외적으로 다정하게 굴긴 했지만 여동생에게 신청 하지 않던 얀시는 무려 춤을 신청했고.

춤은 …….”

엘로디는 떨떠름한 얼굴로 거절했다.

사람, 은인께 무례하지 않니? 엘로디 귀찮게 하지 말려무나.”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던 공작 부인이 더없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기까지 했다. 단연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엘로디. 이리 오거라.”

바로 묘하게 달라진 페르디아 공작의 태도였다! 홀의 모든 사람은 눈을 의심했다.

페르디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26. 약혼녀가 바람났다

6–8 minutes


  홀에 들어서자마자 아예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이 불편했다. 그뿐일까. 수군대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런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익숙했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면 어김없이 따라오는 반응이었다. 4 가문 하나인 페르디아. 대가문을 이끄는 페르디아 공작과 대륙에서 제일가는 독제사인 공작 부인, 그리고 가문의 권능을 강하게 물려받은 아들까지. 더구나 얀시와 카를로트는 부모의 장점을 빼다 박은 외모를 자랑했다. 누가 봐도 페르디아의 직계였다. 누구나 페르디아와 연이 닿기를 고대했고, 그들을 선망했다. 정말이지 완벽한 가족이었다. 반면 그사이에 나는, 이를테면 그런 존재였다. 이물질, , 결점, 미운 오리 새끼……. 전부 실제로 들어본 말이지만 이제는 딱히 상처받지도 않았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건지 고개를 들었다가 레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냐, 그냥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 그래.”

오늘따라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마 레이안이 등장했기 때문일까. 파트너로 같이 입장한 것만으로 창공의 용병단과 페르디아 가문의 결탁이 알려졌을 테니 충분했다. 지금부터 내가 일은 정해져 있었다.

벽에 붙어 있어야겠다. 인테리어처럼.’

매번 그래왔던 대로. 비단 혼자 입장할 때가 아니라 1황자와 참석한다고 해도 금세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혼자였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서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곤 했지만, 간혹 술에 취해 추근거리는 영식들이 있기 마련이다. 번은 참고, 번은 말로 팼지만 도무지 들어먹질 않아서 추파를 던질 때마다 놈들의 머리채를 쥐어뜯었더니 이후로는 접근하지 않았다.

덕분에 페르디아의 망나니라는 별명도 얻었지.’

강해 보여서 제법 마음에 드는 별명이었다. 당연히 오늘도 따분하게 음료나 홀짝댈 예정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그나마 레이안이 옆에 있으니 심심할 같다. 나는 나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레이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늘 연회를 위해 준비했는지 어두운 제복을 입은 레이안은 난반사하는 샹들리에 불빛 덕분인지 평소보다 잘생겨 보였다. 시선을 느낀 레이안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 그러십니까?”

잘생겨서.”

“…….”

진담이야.”

보통 농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잘생겼는걸.”

외모만큼은 취향에 가까웠다. 특히 사연 있어 보이는 붉은 눈이. 1황자 아덴미르도 잘생겼지만 서로 다른 분위기의 잘생김이라 각각의 매력이 있었다. 물론 좋은 아덴미르의 얼굴뿐이다. 남의 남자가 남자를 탐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말씀. 어쨌든 얼굴을 비추었으니 황비가 주최한 연회에 대한 예의는 다했으니 슬슬 구석으로 가려던 때였다. 아까부터 계속 주변을 기웃거리던 카를로트가 레이안을 견제하듯 흘긋 노려본 손을 내밀었다.

누님. 자식은 내버려 두고 나랑 같이 춤추자.”

카를 춤은 질색이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언제. 완전 좋아하는데?”

평소에 춤추는 적이 없는데, 거짓말은. 아까 얀시의 신청을 거절한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 춤을 추고 싶지 않았다.

춤을 그렇게 추고 싶다면야 추게 줘야겠지?’

그렇다고 하네요, 레이디 호멜튼.”

나는 카를로트의 옆에서 말을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레이디 명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의도를 간파한 카를로트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누님……!”

속상한 나를 부르는 카를로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녀와, 카를.”

“……알았어.”

말이 많은 얼굴로 카를로트가 댄스 플로어로 내려갔다. 듣는 남동생 노릇을 언제까지 하려는 걸까. 대체 언제쯤 카를로트의 인내심이 다할지 궁금해졌다. 카를로트의 불만 많은 태도에도 레이디 호멜튼은 환하게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카를로트의 빠른 걸음에 맞추었다. 함께 춤을 춘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얼굴이었다.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페르디아의 아들인 얀시와 카를로트는 사교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다들 레이디 호멜튼을 부럽다는 쳐다보고 난리 났다. 나는 사람들의 관심이 카를로트로 옮겨간 틈을 레이안의 팔을 끌어당겼다.

레이안. 사람 없는 쪽으로 가자.”

?”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당황한 레이안을 끌고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눈길이 닿는 기둥 뒤편으로 장소를 옮겼다. 여전히 이쪽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중앙에 있을 때보다는 나았다. 레이안이 시종에게 음료를 받아 내게 건네며 물었다.

다른 사람과 인사 나누지 않으셔도 됩니까?”

괜찮아. 친구 없어.”

그렇군요.”

비웃지도, 그렇다고 한심하게 여기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말을 들어 주는 레이안의 담백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2황자가 레이안을 봐야 했는데, 봤겠지?”

. 입장할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봐도 뻔했다. 소인배 같은 바람둥이 2황자 벨트란은 씨근덕거리며 얼굴을 붉혔겠지. 벨트란의 얼굴을 상상하며 레이안이 건네준 음료를 모금 마신 미묘한 단맛에 인상을 썼다.

.”

이건 대체 무슨 맛이람. 내가 질색하자 음료를 당사자 레이안이 손에 들린 잔을 바라보았다.

마셔 볼래?”

당연히 장난으로 잔을 내밀었을 뿐인데…… 레이안이 잔을 가져가 모금 마셨다.

정말 맛없네.”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레이안을 보며 나는 그만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건 농담이었는데…….’

정말로 잔을 가져가 마셔 줄이야.

보기와 다르게 되게 무던한 성격인가 보네. 정도는 남이 쓰던 써도 상관없는 유형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약간 놀랐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 그래. 음료 정도야 같이 마실 있지. 괜히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있는 힘껏 미소 짓고 있을 그때였다.

오랜만이에요, 엘로디 .”

옆에서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나는 굳어지려는 표정을 서둘러 관리했다.

, 오랜만이네요. 레이디 앙겔로스.”

어머, 서로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잖아요. 그렇게 거리 두시면 섭섭해요.”

그랬죠. 반가워요, 도로테아 .”

바로 도로테아 앙겔로스. 대망의 원작 악녀의 등장이었다. 금세 원작에서 퇴장하는 악역 조연인 나와 달리 도로테아는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에스텔을 괴롭히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4 가문의 직계라는 자긍심이 높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그녀는 감히 권능도 없는 고아 주제에 페르디아에 빌붙어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에스텔을 괴롭혔다. 나도 같은 처지인데 대놓고 내지 않는 내게 반쪽이라도 페르디아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마치 제비꽃 같은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가진 그녀는 예쁘지만 눈꼬리가 올라가 사나운 인상이었다.

옆에 분은 누구신가요? 소개해 주시겠어요?”

도로테아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수줍게 눈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레이안에게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잘생기긴 했지. 평민을 그렇게나 싫어하면서 예외는 있나 보다.

파트너인 용병 이안이에요.”

반가워요, 이안. 나는 엘로디 양의 친구예요. 잠깐, 이안이라면…… 맙소사! 당신이 용병왕 이안인가요?”

도로테아가 지금 알았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레이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마찬가지로 무뚝뚝하게 답했다.

.”

소문대로 과묵하네요.”

“…….”

이런 구석에서 엘로디 양과 있는 것보다는 저와 함께 저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재미있을 거예요. 당신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답니다.”

나와 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같이 가서 놀자는 말이었다. 의도를 대놓고 드러내는 도로테아의 행동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원래 이렇게 오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어차피 호위 파트너라 레이안은 곁을 떠날 없었다. 드라마라도 보는 느낌으로 흥미진진하게 사람의 대화를 지켜볼 때였다.

괜찮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

단호한 레이안의 태도에 도로테아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마치 승부욕이 들끓는 듯한 얼굴, 자주 보았다.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고자 때의 표정이었다. 주로 드레스나 보석류였는데, 이번에는 남자인 듯했다. 이마를 짚은 그녀가 살짝 비틀거리며 레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금 어지럽네요. 잠깐 저를 부축해 주시겠어요?”

그녀의 손을 잠깐 내려다보던 레이안이 그녀의 손을 잡아 부축해 주었다. 도로테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

어쩌라는 걸까. 부축 번으로 남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도로테아가 힘없이 웃으며 레이안의 손을 놓았다.

고마워요, 이안. 덕분에 어지럼증이 가셨네요.”

그렇습니까.”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네요.”

됐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한 레이안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더니 그걸로 손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

도로테아가 보는 앞에서 손수건을 버렸다.

  도로테아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 이런 무례한-!”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가 나와 레이안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멍해졌다.

내가 쓰던 잔은 아무렇지 않게 썼으면서, 고작 잡았다고 손수건을 버린다고?’

이상하지 않아?

레이안, 지금 거야?”

아가씨께서 친구가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까, 도로테아가 친구가 아니니까 그랬다는 뜻일까? 무슨 지키는 강아지 같은 발언인가. 무려 앙겔로스 가문을 건드려 놓고 무덤덤한 레이안을 올려다보며 크큭, 웃고 말았다.

친구가 아니긴 한데…….”

그것 보십시오.”

근데 도로테아 앙겔로스 가문인데, 괜찮겠어?”

그런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신경 써야 텐데. 아무래도 치졸한 전문인 앙겔로스가 창공의 용병단에 보복을 가할 같았다.

괜찮아. 나만 믿어. 내가 지켜 줄게.”

나는 레이안에게 호언장담했다. 페르디아의 비호라면 앙겔로스도 섣불리 건들지 못할 것이다. 무려 도로테아 앙겔로스를 먹이는 광경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여 대가 정도라고 치자. *** 1황자 아덴미르의 집무실. 한창 골머리를 썩이던 안건 하나를 해치운 아덴미르가 뻐근한 목을 붙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바깥에는 캄캄한 어둠이 내리깔린 후였다.

조금 쉬지.”

, 전하.”

그러고 보니, 오늘이 황비가 주최한 연회 날이었던가?”

.”

보좌관의 대답에 잠깐 무언가 고민하던 아덴미르가 연회가 벌어지고 있을 홀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며 말했다.

공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보고해라. 파트너 없이 입장했다고 말들이 많을 테니.”

아무래도 홀로 입장하게 되면 구설에 오르는 당연했다. 지금까지 엘로디의 처지에 대해 고려해 없으나, 최근 어째서인지 신경이 쓰였다. 원래라면 오늘 파트너로 참석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테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아덴미르는 이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만간 방문해서 선물이라도 줘야겠군. 액세서리를 좋아하던가.’

사치스럽던 엘로디의 취향을 떠올리던 바로 그때,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호명했다.

황자 전하.”

그래.”

보좌관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번 연회에서 아가씨께서 파트너와 동반 입장하셨다고 합니다.”

“……?”

벨트란인가.”

마음에 상대가 있다고 말하고는 황제 탄신 연회에서 2황자 벨트란에게 미소 짓던 엘로디를 떠올렸다.

아니요, 다른 남자였습니다.”

“……다른 남자?”

다른 남자는 뭐란 말인가. 아덴미르는 말을 곱씹으면서도 다시 서류를 펼쳤다. 시답잖은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분이나 지났을까……. 벌떡,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잠시 다녀오겠다.”

, 전하?!”

놀란 보좌관을 뒤로하고 아덴미르는 당장 연회가 무르익고 있을 홀로 향했다.

이번엔 어떤 놈인지 낯짝을 봐야겠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숨기려 들지도 않는 엘로디의 행동에 기가 찼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이 있기나 건가? 아무리 파혼을 바란다 한들 엄연히 약혼한 관계인데. 이윽고 아덴미르는 입구에 도착했다.

“1황자…….”

됐다.”

자신의 입장을 알리려는 시종을 만류한 아덴미르는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를 찾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눈에 띄지 않는 홀의 가장자리였다. 아덴미르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저건 뭐야.”

정말로 그의 약혼녀가 낯선 남자와 함께 있었다. 그것도 다정하게 서로 마주 보고, 심지어는 웃으면서. 저렇게 웃는 얼굴을 적이 없었다. 그래, 벨트란에게도 저런 얼굴을 적이 없었지. 이번에야말로 아덴미르는 확신했다. 약혼녀가 바람났다고.


 

27.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6–7 minutes


얼마나 있어야 하지?’

애초에 사람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슬슬 자리가 지겨워졌다. 일부러 구석에 있었지만,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언제 어디서 도로테아처럼 와서 괜히 시비를 걸고 가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웬만하면 페르디아의 망나니로 소문난 내게 말을 걸지 않겠지만, 오늘은 레이안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레이안에게 번이라도 말을 붙여 보고 싶어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레이안과 잠깐이라도 떨어진다면 저들은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말을 걸겠지. 하지만 레이안의 생각이 어떨지 모르니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레이안. 사람들이랑 대화하고 싶어?”

절대요.”

그럼 옆에 붙어 있어. 내가 퇴치해 테니까.”

“…….”

레이안만의 인간 퇴치기를 자처한 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레이안의 옆을 지키고 섰다. 웬만하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모습을 숨기고 싶었지만, 1황자의 약혼녀인 내가 레이안과 함께 발코니에 들어가는 괜한 구설수를 불러올 있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슬슬 돌아갈까 싶어서.”

워낙 넓은 홀이라 페르디아 가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적당히 있다가 중간에 혼자 돌아가곤 했으니 상관없겠지.

그럼 저택까지 동행하겠습니다.”

-.”

레이안에게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두리번거리던 2황자 벨트란이 나를 발견하곤 곧장 직진하는 보고 말았다.

‘……귀찮아!’

괜히 붙잡혀서 대화를 나누기 전에 튀어야만 한다. 나는 2황자를 레이안의 팔에 팔짱을 끼고 서둘러 그를 끌어당겼다. 레이안 또한 멀찍이서 사람들 사이를 걸어오고 있는 2황자를 보고 상황을 깨달은 건지 잠자코 걸음에 맞춰 주었다. 일부러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2황자를 따돌린 후에 연회 밖으로 나올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레이안이 내게 물었다.

도망치신 겁니까.”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알거든.”

“……좋아하십니까?”

인적이 드문 건물 바깥, 달빛이 어스름하게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어두워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굳은 것처럼 보인다면 착각일까.

아니. 좋아해.”

그렇습니까.”

.”

애초에 누군가를 좋아하기에는 처지가 그리 한가하지 않았다. 독립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좋아하긴 좋아해.

그럼 마차 쪽으로 가자.”

먼저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발짝 걸음을 떼었지만, 레이안은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의아함에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뒤의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공녀.”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흠칫,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덴미르 프레실 윌렌트. 1황자이자 약혼자인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갖춰 인사하자 그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아직 연회가 한창인데, 일찍 나왔군.”

원래 정도 머무르고 돌아가곤 해서요.”

파트너인 내버려 두고 연회 내내 파벌과 대화만 나누었던 당신은 모르겠지만.’

씁쓸한 속마음을 삼키며 외려 환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지금 이곳에 1황자가 있는 상황이 상당히 어색했다. 그도 그럴 , 오늘 연회는 황비 주최 연회라 2황자와 황비 모자를 적대하는 1황자는 결코 근처에도 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의아해하는지 알고 있을 텐데도, 그는 모른 옆에 있는 레이안을 눈짓했다.

보던 얼굴이군.”

호위인 용병 이안이라고 해요. 이안, 이분은 1황자 전하셔.”

이슈타르의 광휘가 드리우길. 이안이라 합니다.”

이안, 그대가 소문의 용병왕 이안이로군. 반가워.”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로 1황자가 레이안의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뭐지?’

나는 사람을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분위기가…… 어쩐지 삭막해졌다?

  *** 아덴미르 또한 용병왕 이안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최근 페르디아 공작을 통해 용병왕 이안과 접점이 생겼다는 사실을 전해 듣긴 했으나 엘로디 페르디아의 호위로 두는 형태일 줄은 몰랐다. 그는 이안이라는 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마찬가지지만, 엘로디를 때와 저를 때의 눈빛은 판이했다. 실력자로군. 누구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호위로 삼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심사가 뒤틀리는 거지? 삐딱하게 웃으며, 아덴미르가 레이안에게 말했다.

들었다. 벨트란이 자네를 탐낸다던데.”

관심 없습니다.”

그래, 계속 관심 없길 바라지.”

그래야 상대를 적으로 두지 않을 테니까. 용병왕 이안에 대해 개인적인 유감은 없었다. 오히려 페르디아와 접점이 생겼다는 말에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로 직전까지는. 아덴미르의 시선이 사람을 번갈아 보는 엘로디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홀에서 보았던 광경을 잊지 않았다. 친근한 호위를 올려다보며 웃던 약혼녀. 자연히 과거에 했던 대화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덴미르가 물었다.

그자가 일전에 말했던 사람인가?”

사람? …….”

같은 생각을 건지 엘로디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덴미르는 아픈 와중에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파혼을 청하던 그녀의 음성을 떠올렸다.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요.”

  상대가 2황자 벨트란인 알았다. 하지만 오늘 호위랍시고 파트너로 데려온 용병을 보는 눈빛을 보니 벨트란이 아니라는 있었다. 엘로디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간 눈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이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그렇다고 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이지만, 아덴미르가 판단하기에는 충분했다. 약혼녀가 다른 사내를 곁에 두고 마음을 나눈다. 그것도 보란 듯이. 그러나 엘로디 페르디아는 모르는 듯했다. 파혼하기를 바라는 굴수록 오히려 바라는 대로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애초에 그가 엘로디에게 바라는 것은 페르디아의 이름뿐이다. 황제가 되기 위해 페르디아 공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명분. 그래, 단지 그뿐이다. 그러니 상대의 감정 따위, 누굴 마음에 품었는지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아덴미르는 조소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공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엇도.”

과연 그럴까요?”

그래.”

단호한 대답에 아덴미르는 엘로디가 부디 절망하길 바랐다.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절대로 파혼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짓을 저지르든. *** 앙겔로스 저택 앞에 화려한 마차가 멈춰 섰다.

아가씨. 어서 오시-.”

저리 비키거라.”

하인의 손을 싸늘하게 내리친 도로테아가 쌩하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돌아온 도로테아는 소파에 앉아 애꿎은 옷자락만 쥐어뜯으며 짜증을 냈다. 이것이 그녀가 있는 최대한의 화풀이였다. 화가 난다고 해서 소리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것은 위대한 4 가문의 레이디가 짓이 못되었으니까.

엘로디 페르디아…….”

도로테아는 일그러진 얼굴로 씨근덕거리며 사람의 이름을 읊조렸다. 예쁘지만 그뿐, 사람들의 눈요깃거리만 되던 망나니 주제에. 페르디아 가문의 유일한 딸이면서 동시에 사생아라 냉랭한 취급을 받던 존재였다. 4 가문 페르디아의 영애이고 예쁘지만 예민하고 성질이 더러워서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도로테아 앙겔로스는 언제나 사교계의 중심이었다. 오늘도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한데 오늘은 가족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화제의 주인공인 용병왕 이안까지 옆에 달고서는 입장했다. 이후로 사람들은 엘로디 페르디아의 이야기만 해댔다.

엘로디, 엘로디, 엘로디!”

그놈의 엘로디! 도로테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분노를 억눌렀다. 감정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다. 때부터 도로테아는 엘로디 페르디아와 비교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4 가문 출신의 영애는 별로 없었으니까. 엘로디는 아름다웠다. 그녀의 가족들은 완벽했다. 하지만 엘로디는 사생아였고, 가족들의 무관심을 받았다. 그래서 도로테아는 안심할 있었다.

내가 우월해.’

그러나 , 페르디아 가문의 가족들이 엘로디에게 관심을 순간, 모든 관심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처음 느껴 보는 들러리가 기분은 가히 굴욕적이었다. 그래서 엘로디에게 다가가 용병왕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상식이 있다면 당연히 자신의 호의에 보답하리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

또다시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무려 용병 이안은 손을 더럽다는 손수건으로 닦더니 손수건을 보는 앞에서 버렸다. 그런 모욕은 난생처음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취급한 없었는데. 언제나 당연히 떠받드는 삶을 살아왔던 도로테아에게는 세상이 뒤집힐 듯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의 원인은 엘로디 페르디아에게 있었다. 직계도 아니면서, 권능도 없으면서, 사생아 주제에! 그때 딸이 잔뜩 화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앙겔로스 부인이 서둘러 침실에 들어왔다.

, 아가. 이렇게 심통이 났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예쁜 우리 딸이 이렇게 미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이…….”

도로테아가 울먹이며 안겨들자 앙겔로스 부인이 사랑스러운 딸을 품에 안고 토닥였다.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그게, 엘로디 페르디아의 호위가 저를 무시했어요.”

호위? 감히 호위 주제에 딸을 무시해?”

호위가 용병왕 이안이란 말이에요.”

무려 황제가 인정한 창공의 용병단의 단장이었다. 그러니 제아무리 앙겔로스라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앙겔로스 부인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용병왕 이안은 조금…….”

하지만 어머니! 그자가 저를 더럽다는 대했단 말이에요!”

맙소사. 감히 용병 주제에?!”

그런 취급을 받고 저는 숨을 수가 없어요! 너무 비참해요……!”

아가…….”

어떤 보석보다 애지중지 아끼며 기른 소중한 딸이었다. 그런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돌아와 울먹이는데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있을까. 페르디아에, 정확히는 테미스 페르디아 공작 부인에게도 유감이 있던 앙겔로스 부인은 이내 결심했다.

걱정 말거라, 아가. 엄마가 혼내 주마.”

정말요?”

그래. 엘로디 페르디아의 호위라고 했으니 주인인 아이가 응당 책임져야지.”

황제의 인정을 받은 용병왕 이안을 건드릴 수는 없으나 엘로디 페르디아 정도는 충분히 손볼 있었다.

제깟 있겠어?’

그녀는 딸을 어르고 달래며 비죽,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 카를로트와 얀시가 찾아오지 않자 나는 곧바로 해독제 만들기에 돌입했다. 한차례 권능을 사용해 밀린 해독제를 왕창 만들고 휴식을 취하던 어느 정오, 마사가 들어왔다.

아가씨. 공작 부인께서 부르셨어요.”

부인께서? ?”

이미 대량의 해독제를 넘긴 터라 당분간은 용건이 없을 텐데. 설명을 요구하듯 바라보다 마사가 말을 덧붙였다.

앙겔로스 부인과 레이디 앙겔로스가 방문했다고 하셨어요.”

흐음…….”

대충 왔는지 예상할 있었다. 지난 연회에서 망신을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겠지.

망신 레이안인데 나한테 난리람.’

내가 만만하다 이거지? 하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피가 들끓었다.

그래도 스트레스받았는데, 잘됐다!’

가자!”

“……?”

나는 미친 사람 보듯 나를 쳐다보는 마사를 이끌고 곧장 본채로 향했다.


 

28. 닮은 당연하지. 딸이니까

5–6 minutes


  테미스 페르디아의 온실 정원은 유명했다. 독제사로서 가장 유명한 테미스의 연구실이기도 하거니와 황실의 대정원에도 없는 온갖 희귀한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독과 해독은 없는 관계라 테미스가 의학에 관여하는 지분도 상당했다. 덕분에 온갖 분야의 학자들은 페르디아의 온실 정원에 번이라도 들어가는 것이 일생일대의 소원일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연구에 눈이 돌아도 목숨 귀한 줄은 알았다. 감히 페르디아의 문을 두드릴 수는 없으니 테미스의 온실 정원은 그저 소문으로만 무성하게 알려져 있을 . 그리고 앙겔로스의 모녀는 자신들이 온실 정원에 초대되리라고는 생각도 했다.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 오다니 무슨 일인지 궁금하네, 돌시니아.”

온실 정원의 주인, 테미스 페르디아가 앙겔로스 모녀의 앞에 손수 차를 따라 주며 요요하게 웃었다. 앙겔로스 부인, 돌시니아 앙겔로스가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

연락했는데, 받았나 보네. 여러 했는데 답이 없어서. 바빴니?”

아아, 중요한 서신이 아니면 집사 선에서 정리되거든.”

바쁘진 않고. 작게 덧붙인 테미스의 말에 돌시니아 부인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 중요하지도 않은 서신 따위는 받을 가치가 없단다, 라는 뜻이 아닌가. 테미스, 그리고 돌시니아는 4 가문의 공작 부인임과 동시에 결혼 같은 또래 사교계 무리에 속한 소위친구였다. 애석하게도 누구도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한 적이 없지만. 하지만 이렇게 서로를 찾아올 정도의 친분은 있다고 있었다. 돌시니아 부인은 무너지려는 표정을 수습하며 부러 여유로운 미소 지었다.

너는 여전하구나, 테미스.”

여전히 이기적이라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인데, 테미스는 돌시니아의 얼굴을 흘긋 보다니 안타깝다는 말했다.

그러니? 돌시니아 너는 일이 많았나 보네…….”

저런……. 뭐라 말하지 않았지만 많은 뜻을 내포한 . 이번에도 돌시니아는 무너지려는 입가의 미소를 꿋꿋이 유지하며 무심코 찻잔을 들었다.

아차.’

황급히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언변으로는 테미스를 이길 없다는 깨닫고 화제를 돌렸다.

오늘 내가 이유는, 얼마 황실 연회에서 엘로디 양이 도로테아에게 실례를 저질러서야.”

안녕하세요, 페르디아 공작 부인. 오랜만에 뵈어요.”

그래, 오랜만이구나. 도로테아 . 그런데 엘로디에겐 무슨 볼일인지?”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인데,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압박감이 들었다. 도로테아는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말았다. 과연 페르디아 공작과 대등하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도로테아는 비어 있는 테미스의 옆자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엘로디 양에게 사과를 받고 싶어서 왔어요.”

, 사과라…….”

당사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엘로디 양은 많이 늦나요?”

그에 질세라 돌시니아가 엘로디의 흠을 잡았다.

손님이 왔는데 이리 늦게 나타나다니, 경우가 없구나.”

순간이었다.

경우가 없어서 정말 죄송하네요, 앙겔로스 부인. 준비하느라 늦었답니다. 오시는 진작 알았으면 제때 나올 있었을 텐데요.”

엘로디의 등장이었다. 오늘도 페르디아의 망나니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돌시니아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여우 같은 테미스보단 성질이 불같지만 다소 멍청한 엘로디를 상대하는 쉽겠지.’

테미스에게도 말했지만, 서신을 여러 보냈단다. 하나같이 답이 없었지.”

그랬군요…….”

이야기는 이제 되었으니, 이만 앉으렴. 엘로디 .”

엘로디가 자리에 앉자 테미스가 그녀의 찻잔에도 찻물을 채워 주었다. 그러고는 무덤덤한 음성으로 찻잔을 밀어 주었다.

마시렴, 엘로디.”

. ……어머니.”

아무리 사생아라고 한들 남들 앞에서 부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이런 자리에선어머니라고 부르라고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테미스와 한자리에 있는 경우가 드물어서 어머니라고 부른 태어나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불쾌하시겠지……?’

엘로디는 테미스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차를 마실 반응이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공작 부인도 이해하실 거야.’

그보다는 페르디아에 발을 들인 명의 손님을 맞이하는 먼저였다.

아까 언뜻 듣기로 저에게 말이 있다고요, 도로테아 .”

. 지난 황실 연회에서 엘로디 양의 호위가 제게 무례를 저질렀지요.”

역시나. 생각했던 그대로의 방문 목적에 엘로디는 속으로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도로테아 양이 먼저 저와 호위에게 다가와 비틀거리며 어지럽다고 손을 잡아 달라고 하셨던 말인가요?”

적나라한 엘로디의 말에 도로테아의 낯이 달아올랐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호위는 도로테아 양의 요구를 들어주었는걸요.”

하지만 이후에, 마치 저와 닿았던 손을 더럽다는 손수건으로 닦고 손수건을 제가 보는 앞에서 버리기까지 하지 않았나요?”

, 그랬죠.”

그렇다면 엘로디 양께서도 인정하셔야 해요. 엘로디 양의 평민 호위가, 제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

일부러평민 호위라는 단어에 힘을 말하며 도로테아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민 호위한테 관심 보이던 누구더라.’

레이안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수작을 부리고 실패한 주제에 도리어 이렇게 달려와 따지고 드는 우스웠다.

호위가 손에 더러운 묻어서 닦아 것이지만, 도로테아 양이 그렇게 오해할 있겠네요.”

, 그러니 어서 사과-!”

엘로디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오해했다면 고용주로서 대신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

미안하다고요.”

“……?!”

앙겔로스 모녀는 순간 벙찌고 말았다. 그들 모녀의 목적은 사과를 받는 아니었다. 애초에 엘로디 페르디아를 상대로 사과를 받아 있으리라 생각지도 않았다. 엘로디 페르디아가 그들에게 패악을 저지르면 사실을 고스란히 사교계에 퍼다 날라 페르디아의 위신을 떨어트리려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조금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담담히 사과하는 아닌가.

‘‘엘로디 페르디아가?’

도무지 믿기 힘든 일이었다.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고 해도 모두 거짓말하지 말라 손사래를 것이다.

도로테아 ?”

, 그래요. 사과 받아들이겠어요.”

먼저 사과를 요구해 놓고 상대방이 사과했다고 따지는 것도 우스우니 외에는 있는 말이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테미스가 옅게 웃으며 물었다.

용건은 그게 전부니?”

“……그래, 테미스.”

얼굴 붉힐 일도 끝났겠다 여기까지 김에 마시면서 이야기나 하자.”

거기다 대고 바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돌시니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꿈에도 몰랐다. . 테미스는 아까 돌시니아가 찻잔을 들었다가 깜짝 놀라며 내려놓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독제사가 내주는 차를 마실 정도의 겁쟁이 같으니라고. 테미스는 집까지 찾아와 엘로디를 망신 주려는 이들을 그냥 보내 정도로 아량이 넓지 않았다.

돌시니아. 특별히 너희 모녀가 왔다고 해서 구하기 힘든 차를 내놓았는데, 마시니?”

흠칫, 차를 내려다본 돌시니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나중에. 지금은 딱히 목이 마르지 않아서 그래. 천천히 마실 거야.”

흐음, 혹시 독이라도 탔을까 ?”

말에 앙겔로스 모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곡을 찔렸다.

-.”

돌시니아가 변명하기도 전에, 엘로디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설마요. 머리가 제대로 붙어 있는 인간이라면 방문한 손님을 대놓고 독살하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으리라는 사실 정도는 거예요.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 ? 엘로디 , 지금 뭐라고……!”

? 저는 앙겔로스 부인을 말씀드린 아닌데……. 혹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머리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으신지……? 뒷말이 마치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한 , 착각일까.

아니, 그게 아니라-.”

어서 마셔 보세요, 부인. 어머니께서 직접 끓이신 차는 정말 맛과 향이 훌륭하답니다. 도로테아 양도 마셔 봐요.”

앙겔로스 모녀가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찻잔을 두려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고작 차였다. 고작 차인데도, 그들은 테미스를 둘러싼 소문을 수없이 들어왔다. 페르디아 공작 부인과 티타임을 가진 후에 전신 마비가 왔다, 혹은 호흡 장애를 얻었다, 또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등등. 그밖에도 흉흉한 소문들……. 엘로디의 말과 달리 정말로 차에 독이 들어 있다 해도 어떻게든 덮을 있을 것이다. 이곳은 페르디아의 영역이었으며, 무려 대륙 최고의 독제사 테미스가 체내에 남는 독을 쓰는 허술한 짓을 벌일 없으니. 절대로 입에도 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테미스와 엘로디가 앙겔로스 모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먹잇감의 빈틈을 노리는 독사처럼. ……놀랍게도 얼굴은 닮아 보였다. 묘한 압박감과 밀리고 있다는 위기감에 돌시니아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머니가 차를 드는데 가만히 있을 없던 도로테아도 함께 찻잔을 들었다. 사람은 입만 대는 척을 하려고 했지만 바라보는 노골적인 시선에 결국 식은 찻물을 모금 입에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

어때요. 맛이 좋죠?”

엘로디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돌시니아는 꿀꺽, 차를 삼키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구나.”

다행이에요. 부인께서 말을 오해하신 알고 걱정했답니다. 앙겔로스 부인은 절대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머저리 같은 사람이 아닌데 말이에요.”

“…….”

돌시니아는 방긋방긋 예쁘게 웃는 엘로디를 보며 아까 했던 생각을 정정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엘로디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전생을 떠올리기 엘로디의공포의 주둥아리 지금 엘로디의 범상치 않은 눈치와 잔머리를 더한다면? 이런 걸작이 탄생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사처럼 웃다가도 상대가 방심한 틈을 야무진 독설을 퍼붓는지옥의 주둥아리. 돌시니아가 테미스와 엘로디를 보며 다소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보니 사람 정말 성격이 닮았구나? 모녀라고 해도 믿겠어.”

명백히 비꼬려는 의도의 말이었다. 엘로디가 테미스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사생아를 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테미스의 처지를 조롱하는 것일 . 하지만 테미스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닮은 당연하지. 딸이니까.”

“……!”

말에 가장 놀란 것은 엘로디였다.


 

29. 앙겔로스 모녀 퇴치

6–7 minutes


‘……딸이라니.’

당연히 가문 사람들 앞이니 이렇게 말하는 테지만, 너무 놀라서 심장이 떨어지는 알았다. 분명 진심이 담긴 말이 아니라는 아는데, 딸이라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착각하면 .’

엘로디는 자신을 보는 앙겔로스 모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정말로 다정한 사이인 것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소문과 다른 엘로디의 취급에 돌시니아는 입꼬리가 살짝 들썩였다.

. 하여간 꼴같잖긴.’

겉으로 보기에 다정한 모녀인 테미스와 엘로디의 모습에 돌시니아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졌다. 도로테아 때문에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은 없었다. 모욕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기분만 더러워졌다. 돌시니아는 도로테아를 일으키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사과도 받았으니 이만 가야겠어. 다음에 , 테미스. 그리고 엘로디 .”

즐거운 티타임이었어요, 페르디아 부인. 지내요, ……엘로디 .”

그래, 사람 조심히 가도록 .”

테미스가 앉은 채로 사람을 배웅했다. 앙겔로스 모녀는 꺼림칙한 얼굴로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방향은…….”

엘로디가 저도 모르게 일어나려 했지만 테미스가 만류했다.

내버려 두렴.”

.”

앙겔로스 모녀가 향한 방향은 꽃가루로 발진을 일으키는 독초 군락이 있는 곳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한동안 피부 문제로 고생깨나 텐데. 온실에 들어올 때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들어왔지만, 나가는 길에 안내해 사람이 없는 탓이었다.

역시 부인. 마지막까지 화려한 마무리를 하시는구나.’

엘로디는 테미스의 불청객을 향한 깔끔한 처치에 감탄하며 마음에 새겼다.

배워야지!’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무슨 말을 들어도 웃으며 먹이는 화법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다 문득 엘로디가 테미스에게 사과를 건넸다.

오늘은 죄송했어요, 부인.”

사과를 하는 거니?”

제가 처신을 잘못해서 도로테아 양이 찾아온 거니까요.”

의도했던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도로테아 앙겔로스를 자극한 엄밀히 따지자면 레이안이었지만, 그를 말리지 않은 자신의 판단이었으니까. 하지만 테미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료했는데 오래간만에 재미있었단다. 엄청난 무기를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쳐들어와서는 별말도 하고 쫓겨나가는 꼴이 우습지 않니.”

아하하…….”

엘로디가 어색하게 웃었다. 일부러 시비 걸려는 목적을 가지고 방문한 이들을 맞이한 재미있었다니, 역시 테미스는 범상치 않다. 그때 테미스가 품에서 하나를 꺼내어 건네었다.

, 마시렴.”

이게 뭐예요?”

해독제란다. 아까 차를 마셨잖니?”

“……!”

엘로디는 말을 잃고 말았다. 세상에.

진짜 들어 있었어?!’

뒤늦게 도착해서 모금 정도만 마셨을 뿐이라, 효과가 돌지 않아 눈치채지 못했다.

, 넣으셨어요?”

그럼. 경미한 증상이라도 독은 독이지. 사람, 한동안 모습을 없을 거야.”

호호호. 모습을 상상한 테미스가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어떤 증상인지 물어보기가 겁난다. 엘로디는 말없이 손에 해독제를 번에 털어 넣었다. 쓰다. 해독제를 마셔 봐야 소용이 없지만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어쩔 없었다. 아까 마신 독은, 워낙 독성이 약해서 평소와 달리 후유증이 남을 같지는 않았다. 혹시나 독에 당했다며 앙겔로스 모녀가 난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미쳐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혹시 뒤탈이 생기지는 않겠죠?”

나를 뭘로 보는 거니?”

테미스의 근거 있는 자신감에 엘로디가 자본주의 미소를 지으며 모두 엄지를 들어 올렸다.

물론, 대륙 제일의 독제사시죠!”

딸랑딸랑. 권력자를 향한 무한 딸랑이. 보이는 아부에 테미스가 피식 웃으며 엘로디를 바라보았다.

진심이니?”

물론이에요.”

테미스 페르디아가 대륙에서 제일가는 독제사라는 사실은 확실하기 때문에 엘로디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모습이 테미스에게는 제법 신선하게 다가왔다. 4 가문은 아니지만,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인 테미스였기에 제게 아부하는 자들을 숱하게 만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를 숨기고 아닌 환심을 사려 했다. 이렇게 대놓고 아부하는 모습을 감상은 제법…….

귀엽네.’

이렇게 솔직하고 귀여운 아이였던가. 엘로디와 여자가 저택에 왔을 때부터 테미스는 그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엘로디가 자라면서도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에 혹여 제게 불편함을 느낄까 거리를 두고 대했다. 예상대로 엘로디는 테미스를 때마다 바짝 긴장하고 새끼강아지처럼 발발 떨곤 했다. 무슨 짓을 했다고. 아무래도 엘로디가 제게 바라는 역할은 자신을 미워하는 친부의 부인인 듯하니 원하는 대로 대해 주었다. 혼자만의 철칙이 깨어진 , 어느 엘로디가 제게 말을 걸었을 때부터였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무서워서 눈도 마주치던 아이가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하려나 싶어 대꾸해 주었더니 난데없이 해독제를 만들어 왔다질 않나, 이제는 제법 능청스럽게 웃기까지 한다. 최근 들어 아들이 아이의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번이라도 걸어 보려 난리인 이해할 있었다. 아이의 변화에 아들도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

바로 해독제를 먹었으니 괜찮을 거란다. 애초에 독성이 그리 강하지도 않고.”

모금 정도만 마셔서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예의 바르게 감사 인사를 건넨 엘로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정말 실례가 많았어요. 다음부턴 이런 없도록 할게요. 그럼 다음에 뵈어요, 부인.”

그래. 다음에 보자꾸나.”

타닥.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엘로디가 옅은 금색의 머리칼을 흩날리며 달려갔다. 사라지는 엘로디의 뒷모습을 보며 테미스가 턱을 괴었다.

“……아쉬워라.”

어머니라고 부르는 , 듣기 나쁘지 않았는데.

  *** 페르디아 저택에서부터 앙겔로스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 테미스의 온실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꽃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앙겔로스 모녀는 잔뜩 화난 상태였다. 특히 사람 가장 흥분한 딸인 도로테아 앙겔로스였다.

이게 뭐예요, 어머니. 결국 아무것도 하고 돌아왔잖아요……! 이건 뭐야. 이상한 꽃들이 가루나 뿜어 대고. 흐으, 기분 나빠!”

도로테아가 질색하며 짜증 내자 돌시니아가 다정하게 웃으며 손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주었다.

그리 화내지 말거라, 아가.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잖니?”

어머니도 보셨잖아요. 엘로디 양이 저를 보고 비웃는걸요.”

비웃어 봤자지. 그래 봤자 사생아 아니니. 그에 비해 우리 아기는 무려 권능을 가진 앙겔로스의 직계고. 비교가 되지, ?”

돌시니아는 딸인 도로테아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생각대로 도로테아의 표정이 확연히 누그러졌다. 도로테아는 입술을 삐쭉대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해요, 어머니. 오늘 보니까 엘로디 , 페르디아 부인과 사이가 좋아 보이던걸요?”

.”

확실히. 그건 돌시니아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였다. 소문으로는 테미스 페르디아와 엘로디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데 딸도 아니면서 가족 놀이나 하는 꼴이라니. 그녀가 불쌍했다.

, 페르디아 공작의 눈밖에 벗어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래서 밖에서 낳아 아이의 엄마가 되어야만 하다니, 천하의 테미스 페르디아도 별거 아니구나 싶었다. 마차에서 내린 돌시니아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만 쉬렴, 아가.”

. 먼저 올라가 볼게요.”

도로테아를 올려보낸 돌시니아는 지나가던 사용인을 붙잡았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것처럼. 이상했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있겠거니 싶어 남편의 행방이나 물었다.

남편은?”

주인님께서는 손님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손님?”

. 저번에도 오셨던 …….”

아아. ‘ 손님말이구나.”

최근 앙겔로스 공작은 마법사와 자주 만나곤 했다. 투자 건으로 이야기를 한다는데, 중요한 손님이라기에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극진히 모시라 이른 적이 있었다. 마침 이야기가 끝난 건지 예의 손님 앙겔로스 공작이 응접실을 나서고 있었다.

오늘도 얼굴을 전부 가리고 계시네.’

돌시니아는 남편의 손님을 보며 약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상대가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보겠습니다.”

살펴 가시오.”

그때 뵙지요.”

마법사의 특이한 목소리에 돌시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호한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손님이 저택을 빠져나가고, 비로소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앙겔로스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부인. 얼굴이 그렇소?”

어머. 갑자기 그런 말씀 하시면 부끄러워요. 그렇게 어여쁜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부인 얼굴이……. 거울을 보시오.”

갑자기 거울을 보라니, 남편이 대체 이러는 걸까. 기분이 괜히 이상했지만 돌시니아는 근처에 있던 손님방을 열고 들어가 화장대를 확인했다. 그리고-. 꺄아아악! 고막이 찢어질 듯한 고음이 저택을 쩌렁쩌렁 울렸다. , 쾅쾅쾅! 동시에 도로테아가 울음을 터트리며 복도를 뛰어왔다.

어머니, 아버지이이-!!”

아무리 큰일이 벌어져도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려고 하는 귀족가의 레이디답지 않은 행동임에도 지적하는 이가 없었다.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어머니. , 이것 봐요. 피부에 흉측한 잔뜩 났어요!”

허어엉. 순식간에 복도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도로테아의 말마따나 그녀의 얼굴에는 우둘투둘 물집 혹은 비슷한 것이 잔뜩 있었다. 돌시니아의 얼굴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내와 딸의 날벼락에 앙겔로스 공작도 놀라지 않을 없었다.

아니, 대체 얼굴이 이런 것이오? 잘못 먹기라도 했소?!”

잘못 -.”

. 앙겔로스 모녀는 동시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 직전에 먹은 거라곤 테미스 페르디아가 내어준 모금밖에 없었다.

분명 테미스 여자 짓이야!”

일부러 엘로디에게 바람잡이 역할을 맡겨 차를 마시게 하더니, 기어이 독을 놓았구나. 그들은 당장 독제사와 가문의 주치의를 불러 진찰했지만-.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그게 무슨 말인가. 다시 보게!”

그리 말씀드려도 없는 독을 있다 수가 없기에…….”

어떤 독제사를 불러와도 마찬가지였다.

독은 아닙니다.”

생활 습관 문제가 아닌지…….”

다들 그딴 말만 댔다. 설상가상으로 가문의 주치의는 진찰 난색을 보이기까지 했다.

금방 치료하기 어렵겠습니다. 상태가 심각합니다.”

말에 도로테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슨 소리냐! 최대한 빨리 치료하거라. 꼴로 어딜 나간단 말이냐!”

오열하며 소리치는 딸을 달래며 돌시니아는 이를 빠득 갈았다.

테미스……!”

뛰어난 독제사인 테미스니 당연히 검출되지 않는 독을 사용했을 . 하지만 어떤 독제사도 독이 없다고 하니 그녀의 죄를 물을 없었다.

여자는 교활하니, 절대 발각되지 않는 독을 썼겠지!’

그렇다고 찾아가 해독제를 달라며 수도 없으니 치료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망신만 주려고 찾아갔을 뿐인데, 앙겔로스 모녀는 한동안 저택 밖으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 . . 그들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 엘로디는……. [사교계의 도로테아 앙겔로스의 두문불출, 과연 그녀에게 무슨 일이?]  

.”

가십지를 보며 여유로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30. 리리 아르셀을 찾습니다

6–8 minutes


  도로테아 앙겔로스는 사교계 레이디 가장 유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존재였다. 웬만하면 별채에서 나오지 않는 나와 달리 거의 매일 사교 활동을 했으므로, 며칠씩이나 저택에 칩거하는 상당히 수상한 일이었다. 가십지에 실린 기사의 내용으로 나는 앙겔로스 모녀가 마셨던 독이 무엇인지 추측할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독제사들만 들락날락하는 데다가, 마지막으로 어떤 파티도 개최하지 않는다니. , 이건 역시…….

피부 질환이겠지?”

사용자의 특징과 성격을 고려한 알맞은 처방이라 있었다.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도로테아에게 파티를 없는 상황만큼 끔찍한 일은 없을 테니까. 더욱이 외모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는 모녀니만큼 이만한 복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페르디아 부인을 찾아오지 않는 점은 대단하다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앙겔로스의 권능은재생이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로 치유와는 다른, 전장에서 잘린 팔을 붙일 때나 발휘하는 권능이라 피부 질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텐데. 차를 홀짝 마신 나는 가십지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때였다.

“……카를.”

한숨을 내쉬며 턱을 고개를 돌렸다. 발코니 너머 높게 뻗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카를로트가 보였다.

안녕, 누님.”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슬슬 눈치를 보며 주위를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별채에 들어오지 말랬다고 발코니 나무 위에 올라가다니.

그러다 다쳐.”

정도 높이는 아무것도 아니야.”

물론 검술에 재능 있는 카를로트에게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가십지로 시선을 돌리자 카를로트가 발을 까딱거리며 나를 불렀다.

누님.”

“…….”

리리 누님.”

대체, 나한테 이러는 걸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 카를.”

결국 나는 오늘도 듣기 싫은 말을 해야만 했다. 그사이 단련이라도 되었는지 이번에는 카를로트도 상처받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별채에 들어오지 말라고는 했지만 정원까지 오지 말라고는 했으니까…….”

그럼 정원까지도 오지 .”

방해 할게. 그냥 옆에만 있을게. 그래도 ?”

? 카를로트가 이번에도 맞은 고양이처럼 불쌍하고 처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방해가 된다는 모르는 걸까?’

내가 아무 하지 않자 초조해진 건지 카를로트가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나는 누님의 호위잖아!”

일전에 저택 내에서만은 카를로트가 호위라고 말했던 생각났다. 나의 호위가 레이안에게 적개심을 드러내기에 대충 둘러댄 핑계인데, 그걸 계속 믿고 있었다니. 순진한 걸까, 바보인 걸까?

바보인 .’

하지만 어쩔 없었다. 카를로트가 이렇게 옆에서 알짱거리면 해독제를 편하게 만들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비에 젖은 고양이처럼 처량한 얼굴로 바라보는 녀석에게 이만 가라고 수도 없었다. 어떡할지 고민할 바로 그때. 꼬르륵-.

아니, 그게…… 계속 밖에 있었더니 식사 때를 놓쳐서…….”

꼬르륵 소리의 주인공 카를로트가 머쓱한 얼굴을 붉히며 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밥도 먹고 밖에서 계속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무리 그래도 굶는 아니지. 밥은 제때제때 먹어야 아니야?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작전이었다면 성공적인 방법이라 있었다. 결국 나는 발코니 문을 열어 주며 카를로트를 불러들였다.

좋아, 그럼 밥만 먹고 가는 거다?”

알겠어, 누님!”

대답은 시원하게 하는데 과연 행동으로 실천할지는 확신할 없었다. 카를로트는 멀쩡한 정문을 두고 굳이 나무에서 발코니 안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칠 걱정 같은 우스울 정도로 가벼운 발놀림이었다. 마사를 불러 간단한 식사를 부탁하자 침실 한쪽 테이블 위로 음식이 차려졌다. 나는 딱히 입맛이 없었기 때문에 물론 인분이었다.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를 살핀 카를로트가 갸웃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님은 먹어?”

먹은 얼마 돼서 나는 괜찮아. 카를 많이 먹어.”

쭈뼛거리던 카를로트는 언제 그랬냐는 식기를 야무지게 잡고 스테이크를 썰어 먹기 시작했다.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스테이크를 덩이나 해치운 카를로트는 그제야 배가 조금 차는지 맞은편에 앉은 나를 바라보았다.

리리 누님, 궁금한 있는데.”

뭔데?”

별채는 이렇게 사람이 없어?”

……. 카를로트의 무신경한 질문에 나는 똑같이 무덤덤하게 대답해 주었다.

, 그건 말이지. 사용인들이 있긴 있는데, 다들 눈에 괜히 띄지 않으려고 피해 다녀서 그런 거란다. 성질 더러운 사생아랑 엮이고 싶지 않은 거겠지.”

멈칫. 고기를 썰다 말고 카를로트가 가만히 식기를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 미안…….”

먹어, 먹어.”

나는 카를로트의 손에 다시 식기를 쥐여 주었다. 새삼스럽게. 밥이나 먹어라. 그러자 카를로트는 체할 같은 얼굴로 음식을 꾸역꾸역 씹기 시작했다. 와중에 나는 스테이크 접시 아스파라거스나 샐러드 접시의 채소가 그대로인 발견했다.

고기만 먹어? 채소도 먹어.”

, 나중에 먹을게.”

설마 편식하는 거야?”

가족 식사를 하긴 하지만 워낙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서 채소를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아냐,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 거라고.”

말도 되는 핑계를 대며 카를로트가 접시 채소를 깨작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심각한 식기를 내려놓더니 내게 물었다.

누님, 그거 알아?”

채소가 먹기 싫어서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일부러 속아 주었다.

?”

저번에 우리 습격한 놈들, 누구인지.”

말에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카를로트의 노림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정말 채소를 먹느니 마느니 문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되어 버렸다.

누군데?”

아버지 명령으로 얀시 형이랑 같이 조사하고 있거든. 그놈들 배후가 누군지?”

.”

그중 시체에서 발견, .”

무덤덤하게 얘기하던 카를로트가 멈칫하며 말을 멈추었다. 나는 뒷말을 재촉했다.

계속 말해, 카를.”

그러니까 그놈들 , 아니, 몸에서 마력 중독 반응이 나왔거든. 사람 빼고 전부.”

마력 중독?”

마력 중독. 그건 독에 중독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중독이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마력 친화력이 있어 상관없지만, 주변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은 마력 중독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대개 피로를 호소하는 정도라 겉으로 티가 나지 않고, 마법사와 거리를 두면 며칠 내로 호전되는 보통이었다. 그런 반응이 나타났다는 말은…….

마탑과 관련되어 있단 말이야?”

정답.”

마탑이면, 어느 마탑?”

그것까진 몰라.”

습격은 남마탑에 향하는 길목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습격이 마탑과 관련되어 있다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급격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카를로트와 사람이 있었고, 주로 공격당한 카를로트지만 그건 녀석이 나섰기 때문이다. 분명 그들의 목표물은 정해져 있었다. 정확히는 나를 노린.

나를 ?’

원작에서 나는 에스텔이 나타날 때까지 아무 없이 부지런히 패악을 떨었다. 그런데도 습격은커녕 먹고 지냈다. 병약하긴 했지만. 그런데 지금, 내가 습격당했다는 내가 태도를 바꾸면서 무언가 확실히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를 제거해서 이득을 사람. 그게 과연 누구일까? *** 나는 원작의 흐름을 곱씹어 보았다. 원작이 시작되기까지는 앞으로 3. 돈만 모아 독립할 작정이었지만, 나를 죽이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독립하게 되면 페르디아의 보호도 당연히 바랄 없을 테니 맨몸으로 세상과 맞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독립과 동시에 피살?

‘……그럴 수는 없지!’

나의 무사 독립을 위해서는 어떤 놈들이 목숨을 노리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마침 용의 선상에 마탑이 있으니 그쪽을 털어 참이었다. 문제는 동서남북 방위의 마탑이 각각 독립적인 성향을 띠는 독자 기구라는 점이었다. 똑같이 마탑이라고 불리지만 하나로 뭉뚱그릴 없는 단체였으니까. 우선은 서마탑에 용건이 있으니 겸사겸사 생각이었다. 외출 한정 호위인 레이안을 불러낸 함께 마차에 올랐다.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서마탑이야.”

알겠습니다.”

호위의 모범답게 레이안은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진중하고 과묵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레이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끔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 남자. 영웅으로 불리는 용병왕. 목숨을 구해 나의 은인. 그리고, 유일하게 비밀을 아는 사람.

믿어도 될까.’

이상하지. 누군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불안해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안심되었다. 내게 무관심한 세계에서 진짜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럴 것이다. 레이안이 편하게 느껴지는 .

레이안, 물어볼 있어.”

달리는 마차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레이안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

창공의 용병단에서 사람 찾는 의뢰도 받아?”

때에 따라서는.”

보통 사람 찾는 의뢰는 정보 길드에서 처리하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용할 없었다. 정보 길드는 대부분 음지의 영역에 속하고 있었고 지배자는 다름 아닌 페르디아였으니까. 만약 내가 의뢰를 넣는다면 고스란히 페르디아 공작의 귀에 들어가는 셈이다. 업무는 아닐지라도 용병단에서도 사람을 찾을 있다면 내게 잘된 일이었다.

혹시 에스텔이라는 이름, 들어 있어?”

질문을 내뱉은 레이안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의뢰하기 , 레이안의 반응으로 떠보려는 의도였다. 레이안이 행여라도 나같이 속에 환생한 존재라면 원작 여주인 에스텔을 모를 없으니까.

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레이안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말로 들은 없다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떠보는 실패한 나는 별수 없이 의뢰 내용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에스텔이라는 사람을 찾아봐 . 의뢰금은 최대한 맞춰 테니까.”

인물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외모는 갈색 머리칼에 벽안. 나이는 나보다 한두 많을 거야.”

그게 전부입니까?”

, 아무래도…….”

원작의 시작 시점은 에스텔이 페르디아에 입양되기 1 , 보육원에서부터였다. 나이가 입양이 되지 않으면 빈털터리 신세로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에스텔이 기적적으로 페르디아에 입양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에스텔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나와 있지가 않네.’

그게 원작에 나와 있었다면 찾기 훨씬 쉬웠을 텐데. 이미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 여긴 이상 세계가 아니었다. 다른 변수가 있는 에스텔의 위치 정도는 알아 놓는 목숨 보전에 도움이 거란 판단이 들었다.

찾아보겠습니다.”

부탁해, 레이안.”

의뢰를 끝마쳤을 즈음, 마차가 멈춰 섰다. 어느새 서마탑 솜니아 지부에 도착한 것이다. 레이안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나는 곧바로 마탑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입구 근처에 레이안을 세워 내가 향한 곳은 접수처였다. 이왕 여기까지 김에 지금까지 해독제를 추가 수익을 투자한 조사를 시작할 셈이었다. 접수처에 도착하자 이전과 다른 담당자가 나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서마탑 솜니아 지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투자하려고요.”

, 투자하시려는 거군요. 혹시 상품 설명이 필요합니까?”

아니요. 이전 투자처에 전액 투자할게요.”

재방문이니만큼 투자처 설명이나 이름 확인 같은 과정은 필요 없었다. 담당자도 별말 없이 내가 내놓은 돈을 가져가 계약서를 작성했다.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리리 아르……? , -!”

레이안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두고 싶지 않아 서둘러 입구 쪽으로 향했다. 뭔가 뒤가 소란스러운 같은데, 사고라도 터졌겠거니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 겨우 레이안을 찾아 앞에 섰을 때였다. 아까의 소란스러움이 마탑 전체로 퍼져 있었다.

레이안. 무슨 일이라도 있대?”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

. 리리 아르셀이라고.”

그렇구…… 잠깐, 누구라고?”

리리 아르셀.”

낯선 익숙한, 아닌 같은 이름.

‘……, 저요?’


 

31. 서마탑의 유교 보이

7–9 minutes


  갑작스레 투자용 가명이 불리다니, 당황하지 않을 없었다.

나를 찾는 거지?’

이름으로 일이라곤 공작 부인에게 받은 해독제 판매대금 8 라리트를 마법사 엘비에게 전액 투자한 것밖에 없는데!

아는 이름입니까?”

그런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레이안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는 이름이긴 한데…….”

본인이니까. 하지만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이상 함부로 나설 없었다. 그도 그럴 , 일전에 카를로트와 나를 습격한 무리의 배후에 마탑이 있을 거라는 추측도 나오지 않았나. 오늘 방문도 조사차 들린 거였고.

우선 조용히 빠져나가자.’

아무 정보도 없이 가명이 노출되는 피하는 좋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레이안과 눈빛으로 의도를 공유했을 바로 그때였다.

저기 있어요!”

아까 접수처에서 나를 담당했던 마탑 직원이 난데없이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 뭐야.’

발짝 주춤거리기 무섭게 서마탑 소속 펜던트를 가슴에 마법사 무리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다. 내게 어느 정도 거리를 지키며 있던 레이안이 곁에 바짝 다가서며 읊조렸다.

호위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번뜩이는 칼날이 검집에서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스릉-!

!”

누군가의 새된 비명이 순식간에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마탑의 관계자가 아닌 단순한 방문자의 비명인 듯했다.

일이 성가시게 돌아가는데?’

마탑의 방문객은 주로 마탑 투자 상품의 고객이나 혹은 마도구를 사러 사람, 마지막으로 마법사를 고용하기 위한 이들이었다. 말은 , 돈과 시간이 썩어나는 사람, 귀족이라는 의미였다. 어차피 잠깐 들르는 거고 행여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구경 왔겠거니 알아서 생각할 터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소란에 휘말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나는 최대한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오늘의 소동을 페르디아 공작이 알게 된다면 둘러댈 말이 궁색했다. 혹시나 가명으로 투자한 알려져서 추궁이라도 당하면…….

으으.”

일단 여길 탈출하자. 내가 짧은 고민에 빠진 사이에도 서마탑 마법사 무리는 스멀스멀 포위망을 좁혀 왔다. 이러다 포위될 판이었다.

레이안, 우선 튀자.”

나지막한 속삭임에 레이안이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 길게 솟은 마탑의 출입구는 군데였다. 내가 들어왔던 . 방문객이 드나드는 장소라 아직 거기까지는 마법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레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눈빛만으로 뜻이 통한 우리는 동시에 출입구 방향으로 달렸다. 마탑 내부는 순식간에 마치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잡아!”

뒤에서 마법 시동어를 외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발을 붙잡을 마법이라도 시전할 셈인 듯했다. 하지만 출입구에 먼저 도달한 우리였다. 출입구 밖으로 발을 떼려는 순간. -! 하나뿐인 출입구가 봉쇄되었다.

젠장…….”

순식간에 탈출로를 잃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 짧게 웃다가도 금세 표정을 굳히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게 하는 짓이죠?”

가장 앞에 있던 마법사가 스산한 눈빛에 흠칫 몸을 떨었다. 어차피 도주로도 막히고, 귀족들에게 얼굴이 까발려질 테니 이상 거리낄 없었다.

감히 엘로디 페르디아를 건드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이후로는 씻고 얌전히 살아왔건만, 기어코 나를 자극하다니. 말하는 거지만 성격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왕년의 나는 치근덕거리는 타가문의 영식들을 두드려 정도로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던 인간이었으니까. 그뿐인가. 카를로트와는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며 말로 서로를 죽일 싸우기 일쑤였다. 페르디아 망나니의 주먹 맛을 보여 주마. 저벅. 내가 공격적으로 발짝 다가가자-. 주춤. 마법사 무리가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쫓아올 언제고 다가가니 도망가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때, 옆을 잠자코 지키고 있던 레이안이 나직하게 물었다.

죽일까요.”

그건 아닌 같아, 레이안.”

그래도 일말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그렇게 목소리로 대화한 것도 아닌데, 우리의 대화가 들렸던 건지 마법사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드디어 용건을 말했다.

마음이 급하여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마탑주께서 당신을 찾으십니다.”

마탑주? 마치 대단한 영예라도 쥐여 주는 것처럼 마법사가 대단히 뻐기는 얼굴을 했다. 애초에 마법사도 아닌 내게 마탑주가 그렇게 대단할 리가 없었다. 대단한 걸로 따지면 페르디아 공작이 대단하다고. 나는 무려 그런 사람의 가짜 딸이다! 핏줄이 아니라는 밝혀지면 죽을지도 모르는!

아니, 마탑주고 뭐고, 중요한 남아 있잖아.’

나는 여전히 영광인 알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사과하세요.”

?”

무례를 저지른 점에 대해서 사과하라고요.”

다짜고짜 삿대질하고, 포위하고, 출구까지 막으며 사람 앞길을 막았으니 사과는 들어야겠다. 마탑주에 대한 용건은 뒤였다. 당연히 마법사라는 족속은 오만하기 짝이 없으니 순순히 사과할 리가 없었다. 레이안이 말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법사가 목을 뒤로 빼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송구-.”

송구 말고.”

, 죄송합니다.”

엎드려 절받기 식의 사과지만 받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냥 넘어가서 찝찝할 바엔 이렇게라도 받는 좋다는 살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으니 나도 마찬가지로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들며 마법사들에게 턱짓했다.

좋아요, 안내하세요.”

“…….”

가요?”

“……, 따라오시지요.”

서마탑주가 지난번 습격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얼굴을 사람이 많으니,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페르디아 공작의 귀에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레이안과 나는 마탑 상층부로 안내받았다. *** 문을 열고 들어선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이안과 나는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마탑주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마탑 직원이 차와 달콤한 디저트를 내왔다. 내가 마카롱을 하나 집어 들자 레이안이 팔을 붙들었다.

드시는 좋습니다. 뭐가 들었을지 알고.”

뭐가 들었다라……. 나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레이안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낸 망설임 없이 마카롱을 베어 물었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괜찮아. 먹어 보니까 독은 없어!”

“…….”

레이안이 아무 없이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만 하자 괜히 민망하고 머쓱해져서 베어 물었던 마카롱을 슬쩍 내밀었다.

먹을래……?”

괜찮습니다.”

차갑게 거절한 레이안이 드물게 긴말을 하기 시작했다.

호위로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무모한 행동은 부디 삼가십시오. 대처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셨으면 합니다. 제발.”

부디에다가제발까지. 졸지에 엄청난 사고뭉치가 기분이었다.

그렇게 사고치고 다닌 기억은 없는데.’

물론 번째 만남에서 절벽에 떨어지고, 오늘은 무려 서마탑의 마법사들에게 포위당하기까진 했지만…….

크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레이안이 과민반응을 보인 것만은 아니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못했네. 반성하는 마음으로 마카롱을 하나만 먹고 잠자코 앉아 있을 때였다. 끼익, 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열렸다. 이윽고 사이로 걸어 들어온 …….

“……꼬마?”

  귀엽고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분홍 머리칼의 꼬마였다. 심지어 눈동자는 맑은 하늘처럼 밝은 연하늘색이었다.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걸까. 눈을 휘둥그레 꼬마가 거침없이 앞으로 다가왔다.

꼬마라니! 이런 무례한 녀석을 봤나!”

깜짝할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안이 꼬마의 앞을 막아섰다. 나는 나대로 꼬마의 역정에 화들짝 놀란 상태였다. 이렇게 호통치는 꼬마는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청년! 어디서 감히 앞을 가로막느냐! 비키지 못할까!”

“……처리할까요.”

레이안이 의견을 구하듯 슬쩍 뒤를 보았다.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건 아닌 같아.”

아이란 자고로 보호해야 하는 . 아무리 초면에 버르장머리 없이 호통을 치는 아이라고 해도 무력을 수는 없었다. 레이안이 아쉽다는 발짝 뒤로 물러났다. 태도에 더욱 받은 건지 꼬마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허, 어허! 감히 몸을 처리해? 내가 누구인 알고 그딴 망발을 지껄이느냐?”

꼬마?”

꼬마 아니라고! 몸은 서마탑의 마탑주 이시스 님이시다!”

손을 허리에 얹은 분홍 꼬마가 당당하게 외쳤다. 갑자기 꼬마가 튀어나왔나 했더니, 마탑주였구나. 어쩐지. 저렇게 당당한 만큼 마탑주 대우는 줘야지 싶어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세요?”

. 바로 말을 높이다니, 제법 예의 바르구나.”

뭐지, 유교 보이는.’

정말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나저나 꼬마 마탑주라.

그래, 권능도 실재하고, 전생을 기억하는 환생자() 있는 세상인데 꼬꼬마가 마탑주일 수도 있는 거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줄곧 일어서서 마탑주 이시스 앞을 막고 있던 레이안을 끌어다 옆에 앉힌 곧바로 용건을 물었다.

그래서 서마탑의 마탑주 이시스 . 미천한 저는 부르셨나이까?”

예쁘게 하는구나. 마음에 든다.”

그래서 불렀냐고. 내가 아무 없이 방긋 웃기만 하자 마탑주도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워낙 몸이 작아서인지 파묻히는 듯한 꼴이었다. 마탑주는 근엄한 다리를 꼬며 운을 떼었다.

리리 아르셀. 이름 맞느냐?”

비슷해요, 위대하신 서마탑의 이시스 .”

말에 마탑주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비슷? , 그건 중요하지 않고. 어쨌든 네가 투자한 마법사 엘비의 마도구에 대해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불렀다.”

뭐가 궁금하시죠, 지하 지상 통틀어 최고이신 서마탑의 이시스 ?”

듣기에는 좋다만 대화에 진전이 없구나, 그냥 이시스 님이라 불러라.”

, 이시스 .”

아쉽다. 온갖 수식어 붙이면서 아부하는 재미있었는데. 잠깐 헛기침을 마탑주가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투자했느냐?”

?”

투자했냐고. 네가 처음이었다, 마법사 엘비에게 투자한 사람은.”

그거야…… 마도구가 잘될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요.”

“……정말?!”

마탑주가 눈을 초롱초롱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엄청나게 열정적인 시선에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 이번에 제작하는 마도구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돌이잖아요? 시장 상품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말에 마탑주가 감동한 얼굴로 주절주절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다들 따위에 온도를 유지해서 하냐고, 쓸데없는 연구는 때려치우고 마탑 업무나 보라고 했는데.”

“……?”

몸을 인정해 주다니. 정말 좋은 녀석이구나!”

아무래도 마탑주가 바로 마법사 엘비 씨인 듯했다. 애초에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제야 마탑주가 마탑 사람들까지 동원해서 자신에게 투자한 투자자를 찾아 헤맨 이유를 있었다.

그냥 자기 계발에 처음으로 투자한 사람이라서였구먼.’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행보로 봐서 서마탑은 지난 습격과는 관련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무려 마탑주인데 이름으로 마도구를 출시하지 않는 걸까? 의아한 표정을 마탑주는 내가 묻기도 전에 답을 내놓았다.

이름으로 출시하면 팔리기야 팔리겠지. 하지만 말이다, 이몸은 정말로 유용한 마도구를 만들고 싶었다. 누구나 인정할 법한!”

그러니까, 일종의 복면 출시를 했다 말이었다. , 내가 투자했을 뿐인데 이렇게 기뻐하는 보니 어쩐지 마음이 짠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꼬만데, 잘해 줘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대로 술술 불기 시작했다.

마도구를 따뜻한 상태로 만들어서 바닥 깔아놓고 위에 이불을 둘러보는 어때요? 겨울에 위에서 자면 최고일 같은데.”

“……천재냐, ?”

반대로 차가운 상태로 유지해서 상자 속에 넣으면, 한여름에도 음식을 차갑게 보관할 있지 않을까요?”

“……만재냐, ?”

군용으로도 있을 테고요.”

군용……! 거기까지는 생각 했다!”

온돌, 냉장고, 선풍기, 에어컨 등등. 내가 아는 지식 한에서 온도에 관련된 것을 쏟아 내었다. 그러자오호, 이것 봐라하던 마탑주의 눈빛이 녀석, 만재다하며 쳐다보는 것처럼 바뀌었다.

온도 유지석 마도구 하나로 이렇게도 무궁무진하게 아이디어를 내다니,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구나. 게다가 몸의 진가를 알아보기까지 했지, 안목이 아주 뛰어나.”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잠깐 들이던 마탑주가 호기롭게 외쳤다.

조수가 돼라!”

, 거절하겠습니다.”

단칼에 거절하자 마탑주가 믿을 없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귀찮은 질색이에요.”

잘해 줄게!”

거절할게요.”

, !”

금방이라도 바닥에 드러누워 빙빙 돌면서 떼쓸 것처럼 마탑주가 주먹으로 소파를 쾅쾅 내리쳤다.

잘해 줄게! 몸의 조수가 되라고!”

돼요. 꿈은 백수예요.”

꿈도 몸이랑 같잖아?! 같이 잘해 보자! ?!”

거절할게요.”

으아아악!”

악도 쓰고 떼도 쓰던 마탑주는 결국 뜻을 꺾지 못하고 소파에 허탈하게 걸터앉았다. 이윽고 그가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럼 종종 찾아와서 마도구 조언이나 .”

정도라면 생각해 볼게요.”

생각해 보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내가 예상치도 못한 행운이었다. 실제로 원작에서 이후 마법사 엘비의 마도구는 전부 히트를 치니까. 투자 정보를 미리 접할 있다니, 이런 횡재는 상상도 했는데. 정도라면 오늘 마탑까지 보람이 있었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그때였다. 마탑주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앞에 내밀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 보거라, 대단한 발명품이지 않으냐?”

특별할 없는, 마법진이 새겨진 커다란 보석이었다. 용도는 모르겠고, 생긴 제법 예뻐서 감탄하며 물었다.

예에. 대단하네요. 어디다 쓰는 물건인가요?”

쯧쯧, 그리 궁금하다니 말해 수밖에 없구나. 이건 말이지, 실베스터 페르디아를 쓰러뜨리려고 만들었다. 대단하지 않으냐!”

“……?”

, , 잠깐만. 누구를, 어쩐다고요……?


 

32. 인간말종, 쓰레기, 난잡한 난봉꾼

7–8 minutes


시각, 페르디아 저택의 공작 집무실. 보좌의 보고에 실베스터 페르디아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어딜 갔다고?”

서마탑 솜니아 지부에 가셨습니다.”

하필 거길…….”

실베스터는 한숨을 내뱉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간혹 사람을 붙여 외출 엘로디의 행선지를 보고받곤 했다. 아무리 용병왕 이안이 옆에 있다고 해도 습격받은 있는 딸을 아무 방편도 없이 밖에 내보내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그런데 하필 곳이 서마탑 솜니아 지부일 줄이야. 그곳은 마탑주이자 대마법사인 이시스의 영역이 아니던가. 소위 미치광이 소악마라고도 불리는.

별일 없겠지.’

단순히 방문만 했을 뿐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아이가 제가 페르디아라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 이상. 애초에 마탑주 이시스는 자기애가 강해서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사람과 관련된 일만 빼면. 실베스터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보좌관의 추가 보고가 이어졌다.

아가씨를 둘러싸고 한차례 소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무슨 소동.”

서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대거 출현하여 아가씨와 호위인 용병을 둘러싼 , 마탑 상층부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

망할 대마법사 .

어찌 하는 좋겠습니까, 각하.”

딸인 알고 일부러 짓거리를 꾸민 테다. 나를 자극하려는 의도겠지. 얀시를 보내서 엘로디를 데려오라고 해라. 되도록 마찰 없이.”

, 각하.”

실베스터는 마탑주가 엘로디를 데려간 이유를 자신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진실을 모른 .

  ***

이건 말이지, 실베스터 페르디아를 쓰러뜨리려고 만들었다. 대단하지 않으냐!”

  내가 경악한 뻣뻣하게 굳어 있자 마탑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반응이냐. 위대한 발명품이 정도로 놀랍단 말이야?”

, , 놀랍네요. 하하하.”

마도구 말고 님의 목표가요. 무려 아버지를 쓰러트리기 위한 무기라는데 놀라지 않을 딸이 있을까. 그런 속마음을 꿈에도 없는 마탑주는 흡족하게 웃었다.

사람 기분 맞출 아는구나.”

아부 아닌 아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마탑주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눈치도 빠르고 아주 똑똑해. 몸의 조수로 삼고 싶은데 말이지.”

거절할게요.”

이번엔 권하지도 않았다.”

권하지도 않았다면서 같은 거절에 마음이 상한 건지 마탑주가 불퉁한 얼굴을 했다. 낯선 마탑주에게서 익숙한 카를로트의 냄새가 난다. 자고로 나는 이런 단순한 유형의 인간을 다루는 제법 능숙했다.

어쨌든 정말 대단해서 그렇죠. 그런데 페르디아 공작은 공격하려는 거예요?”

몸이 인간을 떨리게 혐오하기 때문이지. 뺏고 싶은 것도 있고.”

뺏고 싶은 뭘까. 궁금했지만 괜히 깊이 파고들었다가 돌이킬 없어질까 물어보지 않았다.

서마탑주랑 페르디아 공작 사이가 좋은 처음 알았어.’

지금까지의 나는 그저 눈치 보기에만 급급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가문의 상황이나 공작의 일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마탑이나 마탑주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별로 없었다. 애초에 주변에 알려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마탑주가 꼬마인 놀랍긴 하다.

뭐야. 그런 기분 나쁜 시선으로 보는 거지?”

아뇨, 그냥…… 이시스 님이 생각했던 모습이랑 달라서요.”

설마 , 아까 보고 꼬마라더니 몸이 진짜 어린애라 생각하는 아니겠지?”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라 뭐라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어처구니가 없다는 마탑주가 , 하고 웃었다.

이건 몸의 본래 모습이 아니야. 마력이 워어어어낙 많아서 평소에는 이런 모습으로 지낼 뿐이라고.”

이번에도 자기애 가득한 말에 영혼 없이 손뼉을 주었다.

마력이 그렇게 많으시구나. 정말 멋있어요. 최고예요.”

, 몸이 멋있긴 하지.”

역시 마탑주 마탑주는 서마탑주. 솜니아를 뒤집어 놓으셨다.”

그만해. 아무리 나라도 정도 찬사는 부끄럽다고…….”

마탑주가 귀를 붉히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정말로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여전히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대화 주제를 돌렸다.

사실 내가 너를 찾은 다른 이유도 있어.”

투자자라는 이유가 전부 아니었나?

이름이 내가 아는 사람 이름이랑 비슷하거든. 물론 우연일 테지만.”

두근. 어째서일까. 심장이 귓가에 들리는 것처럼 세차게 뛰는 것은. 혹시나. 아닐 테지만,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아는 분의 성함이 뭔데요?”

아르셀리아.”

“……!”

엄마의 이름이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닐 거라는 기묘한 직감이 들었다. 마탑주는 페르디아 공작과 아는 사이였으니까. 분명 엄마였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엄마를 아세요?”

엄마를 아느냐고.

엄마?”

마탑주가 눈가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말을 이해하느라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내가 페르디아라는 알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마법사들이 내가 엘로디 페르디아라는 알려 테니까. 엄마에 대해서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원작은 주인공인 에스텔의 이야기라 친엄마에 대한 정보는 나와 있지 않아서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한 마탑주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 네가……. 리리 아르셀이라며?”

리리 아르셀은 가명이에요.”

네가 아르셀리아 딸이라고?”

.”

이름이, 엘로디?”

맞아요.”

말은 실베스터 페르디아의 딸이라는 소린데.”

그렇……?”

아니지만, 그렇게 알려져 있으니 일단 수긍하자. 정말로 페르디아 공작이 끔찍이도 싫은지 마탑주가 질색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작자 딸답지 않게 총명하고 사리에 밝고 양심이 있네.”

“……?”

물론 칭찬이야.”

칭찬……? 칭찬 확실한가요? 어쨌든 아버지의 딸인 그럭저럭 넘어간 듯했다. 그제야 나는 궁금한 것을 물어볼 있었다.

그래서 마탑주님은 엄마와 무슨 사이인가요?”

무슨 사이라고 잘라 정의할 없는 관계인데.”

엄마를 떠올리는 걸까. 마탑주의 커다란 푸른 눈이 상념으로 일렁였다.

은인이자 내가 살아가는 이유.”

앳된 음성이 잠깐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계속 찾아 헤매는 사람.”

“…….”

마디 말만으로 느낄 있었다. 마탑주 이시스에게 아르셀리아라는 존재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것도 잠시, 씨근덕거리던 마탑주가 작은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었다.

실베스터 페르디아는 아내도 있으면서 여자 여자 건드리고 다니고, 질리니까 가차 없이 버려 버리는 인간말종이자 쓰레기고 난잡한 난봉꾼인 데다가…….”

이후로도 장장 십여 분간 페르디아 공작에 대한 욕설이 이어졌다. 차마 듣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날것의 욕이었다. 본의 아니게 가정사를 대놓고 들켜 버린 나는 지금까지 잠자코 우리 대화를 듣기만 하던 레이안을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딱히 별생각 없어 보였다.

레이안이 무심한 성격이라 다행이다.’

걱정을 나는 금방 마탑주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완전히 달랐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나를 가진 엄마가 나를 빌미로 큰돈을 뜯어낸 후에 잠적했다고 그랬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렇지만 오늘 처음 만난 마탑주의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수도 없었다. 판단은 사실관계를 전부 알고 후에 내려도 늦지 않았다.

계속 보니까 아르셀리아랑 닮았네, .”

처음 듣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래요?”

. 뭐야, . 엄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아서…….”

, 어이없네. 나중에 연락 넣을 테니까 그때 . 기억 재현 마도구로 보여 테니까. 지금은 준비가 되어 있어서 보여 없고.”

기막히다는 마탑주가 웃었다. 나보다 내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상황이 우스웠다.

웃지 말고. 착해빠지게 생겨서는. 그렇게 살면 손해만 본다고. 알아들어?”

, , 그렇게 착하지만은 않은데요.”

보면 알아. 거절도 하고 싫은 소리도 하잖아.”

, 아닌데.’

나에 대해 엄청난 오해를 하는 듯했다. 아까 내가 마탑 1층에서 소속 마법사들을 주먹으로 마사지해 주려고 했던 알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지만 혼자 치고 장구 치는 보는 것도 재미있어서 그냥 오해하도록 두기로 했다. 들을 이야기도 들었겠다, 슬슬 이곳을 나설 때였다. 전에 마무리해야 것이 있었다.

이시스 . 리리 아르셀이 저라는 비밀로 주세요.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요.”

그러자 마탑주가 인상을 썼다.

실베스터 페르디아가 학대하기라도 ?”

, 아뇨?”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학대가 아니라 방치였지만 사랑을 듬뿍 받고 아니라서.

그럼 투자하는데? 돈을 ? 돈도 썩어나게 많으면서?”

그것도 아니에요.”

너무 많이 쓰라고 시켜서 탈이지.

뭐야. 그럼 대체 가명을 쓰는 건데?”

소소한 취미 생활 같은 거예요. 후원하고 투자하면서 보람을 얻는…….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좋아하시니까요.”

대충 둘러댄 말에 어이없게도 마탑주는 금세 수긍했다.

하긴 작자, 좋은 보지. 알겠어. 단속할 테니까 걱정하지 .”

그렇게 나는 얼렁뚱땅 가명 문제도 해결할 있었다. 이제 말도 없으니 레이안에게 신호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볼게요.”

이제 내게 용건이 없는지 마탑주는 담백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 리리 아르셀. 다음에 보자.”

가명이라는 알면서 굳이 가명으로 부르는 이유는 뭘까.

페르디아라고 부르기 싫은가 보다.’

그런 추측을 뿐이었다. *** 마탑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동행해 레이안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레이안. 지겨웠을 텐데 계속 옆에 있어 줘서.”

호위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 뭐가?”

생각이 복잡한 얼굴입니다.”

.”

나는 손끝으로 뺨을 더듬었다. 아무렇지 않은 알았는데, 겉으로 티가 정도인가? 어릴 적부터 그랬다.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이상하게 울고 싶어지는 .

애증일까.’

나를 삭막한 페르디아에 버리고 갔다는 원망. 그런데도 이유를 묻고 싶다는 덧없는 바람.

그냥 기분이 …… 마탑 용건도 끝났으니까 이제 돌아갈까?”

기분이 어떤지 주절거리는 것도 아닌 같아 얼른 말을 돌렸다. 다행히 레이안은 별말 않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곧장 마차가 기다리는 장소로 향하려던 때였다.

리리.”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몸을 돌리자,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얀시가 보였다.

데리러 왔어, 리리.”

역시, 검까지 뽑아 아까의 소동이 페르디아 공작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지. 에휴. 되도록 그냥 조용히 넘어갔으면 하고 바랐는데, 쉽지 않구나.

리리와 함께 돌아갈 테니 당신은 돌아가도 좋습니다.”

얀시가 뒤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곳에는 레이안이 있었다. 레이안이 굳이 저택까지 들렀다 필요는 없는 같아 이만 보내 주는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동의했다. 나는 레이안을 돌아보며 짧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내일 , 이안.”

잠깐 들이던 레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엘로디 .”

웬일일까. 일부러 이름 부르는 피하는 같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정면을 보는 순간, 눈부시게 웃고 있는 얀시를 마주했다.

인간은 저래.’

심사가 비틀리면 환하게 웃던데, 지금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다고. 어쨌든 레이안을 보내고 나란히 마차에 오르자마자 얀시가 짓궂게 운을 떼었다.

서마탑의 마탑주가 위협하고 협박한 후에 마탑에 억류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쩌다 그런 해괴한 소문이.

과장된 거예요.”

원래 서마탑 마탑주랑 아버지 사이가 별로 좋아. 아니, 좋다는 말로는 설명할 없을 정도로 최악이지.”

왜요?”

글쎄. 그건 내가 말할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알면서도 내게는 말해 주지 않겠다는 의미구나.

엄마 이야기라 그런 거겠지.’

페르디아에서 친엄마인 아르셀리아라는 이름은 금기어니까. 알지만 착잡한 마음은 어쩔 없었다. 엄마의 딸인 나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 모르고 컸으니까……. 마차는 금세 페르디아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카를로트가 앞에 다가와 길을 막았다.

누님. 어디 다녀왔어? 나도 데려가지. 요새 계속 외출해서 심심했다고.”

서마탑에.”

서마탑?”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별채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 누님. 아버지 호출.”

.’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나는 외출로 지친 발걸음을 이끌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앉아 있던 페르디아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공작은 숨을 돌릴 잠시의 틈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서마탑에서 소동이 있었다지.”

벌써 소문이 났나 봐요.”

마탑주를 만났느냐?”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질문이 이어졌다.

무슨 이야기를 했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페르디아에서 엄마의 이름을 꺼내는 금기다. 하물며 페르디아 공작 앞에서 엄마 이야기를 하는 ,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말을 수가 없었던 건데…….

엘로디.”

페르디아 공작의 호명에 나는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아닌데…….”

말해 봐라.”

진짜 말해도 돼요?”

그래.”

말하면 화내실 텐데.”

낸다.”

대체 이렇게 추궁하는지는 없지만, 화를 낸다는 말에 조금 안심했다. 엄마에 대한 직접적인 말이 아니라, 뒤에 했던 이야기면 되겠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나는 마탑주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읊었다.

실베스터 페르디아는 아내도 있으면서 여자 여자 건드리고 다니고, 질리니까 가차 없이 버려 버리는 인간말종이자 쓰레기고 난잡한 난봉꾼이다.”

“…….”

“-라고 하던데요.”

“…….”

무심코 페르디아 공작의 얼굴을 나는 흠칫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낸다더니.’

지금 온몸으로 화내고 있잖아요……!


 

33. 안녕, 페르디아의 망나니라고 !

6–7 minutes


페르디아 공작 주변으로 검은 오라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정도로 범상치 않은 기세였다. 눈앞에 마탑주 이시스가 있었다면 단번에 끝장냈을 같았다.

그놈이, 그리, 지껄여?”

낮게 깔린 음성이 , 끊겼다. 내가 있는 거라곤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 그러게 내가 한다고 했는데…….’

하지만 내가 비자금으로 투자를 했다거나 혹은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제외하면 페르디아 공작의 욕밖에 남지 않았다. , 어쩔 없는 일이란 소리였다.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택한 행동은 바로-.

. 마탑주 이시스가 그랬어요!”

의견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었다! 나와는 상관없고 서마탑주 인간의 의견일 뿐이라고.

미안해요, 이시스 . 하지만 당신은 마탑주니까 괜찮을 거야.’

가만히 턱을 페르디아 공작이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낯짝을 지도 제법 오래되었지…….”

하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가 봐요.”

악연이다.”

원래도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드러내 놓고 싫어하는 처음 봐서 뭐랄까, 신선했다.

친엄마랑 관련된 확실한데.’

정확히는 모르겠단 말이지. 딴생각하고 있던 나를 향해 페르디아 공작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았다. 나는 움찔거리며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그것 말고 그놈이 지껄인 있느냐?”

당연히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순간 나는 머릿속을 맹렬하게 회전시켜야만 했다. 최대한 엄마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

, 아버지를 쓰러뜨릴 비장의 마도구를 만들고 있대요. 조심하세요.”

그게 끝이더냐?”

그런 -. , 그리고 뺏고 싶은 있다고 했어요.”

그렇게만 말했을 뿐인데, 공작은 만하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말하는 거로군.”

그게 뭔데요?”

페르디아의 가보.”

마탑주의 패기에 입을 벌렸다. 무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가문 페르디아의 가보를 빼앗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제아무리 황제라도 그런 생각은 적도 없을 것이다.

네가 신경 없다. 그냥 생각 없는 천치일 뿐이야.”

…….”

그놈과도 거리를 둬라. 2황자 다음으로 해로운 인간이다.”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나는 일부러 애매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공작이 거리를 두라고 해도 서마탑주와의 인맥을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세상은 인맥 지상주의 아니던가. 서마탑주는 독립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었다. 다행히 페르디아 공작은 캐묻지 않았다.

이걸로 끝이겠지?’

그렇게 안도하고 있을 그때였다.

엘로디.”

잔뜩 무게를 잡고 이름을 부르는 걸까. 괜히 무섭게.

.”

너만 괜찮다면 별채를 정리하고 저택에 방을 마련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그저 얼떨떨했다.

“…… 방이요?”

그래. 이제 저택으로 들어오거라.”

“…….”

언제쯤 데려와야 할지 몰라서 내버려 두었던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아주 어렸을 별채의 가장 창문 앞에 걸터앉아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자리가 저택이 가장 보이기 때문에. 언제나 저택에서 지내는 나의 간절한 꿈이었다. 그러면 진짜 페르디아의 일원이라도 기분을 느낄 있을 같아서. 하지만 번도 그런 바람을 밖으로 꺼낸 없었다. 사용인들이 뒤에서 속삭였던 말들이 자존감을 깎아 먹었기 때문이었다.

봤니? 오늘도 창가에 앉아서 저택만 바라보고 있는 ?”

꼴에 저택에 가고 싶기라도 한가 보지. 직계도 아닌 사생아 주제에 별채에서라도 지내게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 판에.”

그러게. 주제를 알아야지.”

공작 부인이 안됐지.”

그런 말을 듣고도 감히 저택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리를 있을 리가 없었다. 영원히 나는 페르디아지만 페르디아일 없는 애매한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나를 정의했으므로. 그런 내게 저택으로 들어오지 않겠냐는 물음은 현실성이 없으면서도 내심…… 기뻤다. 아주 조금이라도, 페르디아라고 인정받은 같았다. 지금 상황은 전과는 전혀 달랐다. 얀시와 카를로트도 이전과는 달리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공작이 나를 싫어하는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공작 부인도 나를 파트너로서 대우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호의를 받을 없었다. ‘진짜 가족 아니니까. 저들이 내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전부 내가 공작의 친딸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이 밝혀지면 당연히 곧바로 내치겠지.’

그러니까 가까워지지 않는 좋다. 서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웃는 얼굴로 페르디아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말을 주시길 기다렸을지도 몰라요.”

그런 줄은 몰랐군. 집사에게 일러 바로 준비하라고-.”

당연히 말을 승낙으로 알아들은 공작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아니요.”

“…….”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뜻을 밝혔다. 저택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페르디아 공작의 얼굴이 언뜻 굳었다.

어째서냐?”

지내던 곳이 편하고, …… 제가 거기 들어가면 불편할 사람이 많아요.”

엘로디, 네가 불편한 것이 아니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그저 웃었다. 불편한 많아지긴 했다. 독립을 준비하는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당장 공작 부인이 주문한 해독제를 만드는 일도 드나드는 카를로트와 얀시 때문에 쉽지 않은데, 저택으로 옮긴다면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별채에선 사용인들이 눈치를 보고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다니지만, 저택은 아니었다. 당연히 보는 시선이 많아질 . 그만큼 행동의 제약 때문에 전처럼 움직일 없을 것이다.

네가 편하게 지내도록 바라는 들어주마.”

아니에요. 그러실 없어요.”

정말 저택에 오지 않겠다고?”

. 별채가 익숙해서 좋아요. …… 가지만 빼고요.”

좋다고 그러면 기껏 제안해 페르디아 공작의 기분이 언짢을까 가지 여지를 주었더니, 공작의 눈빛이 바뀌었다.

가지가 뭐지?”

진짜 물어볼 줄은 몰라서 당황했지만, 대답하는 어렵지는 않았다.

식사요. 음식은 별채보다 저택 주방장 요리가 입맛에 맞더라고요. 근데 별채 주방장 요리도 맛있으니까 문제는 아니에요.”

행여나 별채 주방장에게 불똥이 튈까 변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작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같지만, 내가 저택에 들어가기 싫다고 완강하게 버티니 포기하는 기색이었다.

엘로디 뜻이 그러하다면, 알겠다.”

신경 주셔서 감사해요.”

생각이 바뀌거든 언제든 말하거라.”

.”

공작을 보며 환하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독립하기 전까지는 착한 노릇을 해야겠어.’

. . . 그리고 다음 . 새벽바람부터 별채의 문을 두드린 사람의 얼굴을 마사와 잠이 순식간에 달아나 버렸다.

, 오늘부터 별채의 요리를 담당할 주방장 쿠커입니다. 앞으로 부탁드립니다, 엘로디 아가씨.”

“…….”

저택의 주방장이 좌천당했다……. *** 침실에 들어온 마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불청객의 방문을 알렸다.

아가씨. 오늘도 오셨어요.”

? 아니면 ?”

도련님이요.”

그래…….”

카를로트가 정원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가라고 봤어?”

저더러 미사라고 부르길래 받아서 그냥 들어왔어요.”

, 잘했어.”

꿋꿋하게 마사를 미사라고 부르는 카를로트나, 하녀면서 도련님이 받게 한다고 그냥 들어오는 마사나 매한가지로 답이 없었다.

아예 죽치셨던데요, 도련님. 저러다 열사병으로 앓아누우시는 아니에요?”

설마. 카를로튼데.”

보통 인간과 다른 녀석이라 강한 햇볕 정도는 별것도 아닐 것이다. 그걸 알지만, 굳이 땡볕 아래 있다는 마음이 쓰였다. 결국 별채 밖으로 나가자 나를 발견한 카를로트가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누님!”

더운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

누님 나오는 기다리고 있었지. 오늘은 외출 ?”

거야.”

, 그래……?”

외출한다고 하니 카를로트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때문에 나가는 거잖아. 눈치 없는 녀석아.’

카를로트와 얀시가 번갈아 가며 별채에 오는 통에 그냥 저택을 나서는 일쑤인 요즘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를로트는 소중하게 들고 있던 무언가를 앞에 내밀었다.

누님! 이게 뭐냐, 요즘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액세서리라던데, 어때?”

카를로트가 보석함 안에는 온갖 종류의 액세서리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여자친구라도 생긴 건가?’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을 하는 카를로트가 이상했지만 적당히 대꾸해 주었다.

그래? 예쁘네.”

예쁘다고? 그럼 누님 가져.”

이걸 나한테 ?”

동생이 누님한테 선물 주는 이상한 아니잖아. 누님도 나한테 연회복 있고.”

그거랑 이건 다른 같은데. 카를. 이거 -.”

받겠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카를로트가 쏜살같이…… 튀었다. 그대로 튀었다. *** 카를로트가 억지로 안겨 보석함을 방에 나는 외출 준비를 했다. 잠시 레이안이 나를 찾았다. 며칠 호위했다고, 이제는 페르디아가 제법 익숙한 듯했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레이안이 물었다.

요즘 외출을 자주 하시는 같습니다.”

그게, 집에 귀찮게 졸졸 쫓아다니는 고양이 마리가 있어서.”

고양이, 싫어하십니까?”

고양이는 좋아하지만.”

카를로트 고양이는 ……. 페르디아 형제가 부담스러워서 바깥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레이안과 있을 때만큼은 마음이 편했으니까. 페르디아 공작이 내준 용돈 쓰기 숙제를 수행하려면 외출해서 온갖 상점을 들르기도 해야 하니까. 하지만 역시 문제는 해독제였다.

혼자 있을 장소가 필요한데, 쉽지가 않네. 집중해서 해야 하는 일이 있거든.”

나도 모르게 푸념을 늘어놓자, 잠깐 침묵하던 레이안이 내게 권했다.

용병단 본부에 사용하지 않는 방이 많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장소를 제공해 드릴 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아도 해독제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차에 상당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독을 먹으면 효과 때문에 당장 한나절 정도는 꼼짝없이 침대 신세였다. 아침 일찍 나와서 용병단에 틀어박혀 바로 음독하면, 저녁쯤에는 거동할 있는 수준이 테니 맞긴 한데.

정말 괜찮겠어?”

.”

중간에 누가 들어오면 되는데.”

혹시라도 비밀을 들키기라도 하면 되니까. 하지만 레이안은 이번에도 단호했다.

명령을 어길 놈은 없습니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

.”

우리는 곧장 마차 목적지를 창공의 용병단 본부로 돌렸다. 용병단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용병단이라더니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아 지저분할 수도 있습니다.”

나도 오늘은 둘러보기만 거니까 괜찮아.”

레이안과 장소에 관해 이야기를 하며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나타난 용병이 레이안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 단장님. 벌써 오십니까? 페르디아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레이안이 몸으로 가려 수가 없었다. 상대방도 내가 있다는 아직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용병은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단장의 호위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거릴 정도로.

그나저나 단장도 고생이 많습니다. 뭐냐, 단장이 호위하는 여자, 성격이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요. 남자 머리를 쥐어뜯는다고? 별명이 페르디아의 망나니랍니다! 아하하하.”

다물어.”

? 닥치라고 하고 다물라고 하십니까?”

닥쳐.”

뒤에 있는 때문인지 레이안이 차갑게 경고했다. 하지만 이미 들었는데. 이윽고 레이안 뒤에 있는 나를 발견한 용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누굽니까? 아름다우신 분은? 애인? 애인입니까?”

나는 호들갑을 떠는 레이안의 수하를 보며 재치 있는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 페르디아의 망나니라고 ! 만나서 반가워.”

“……!”

그러자 용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34. 신경 겁니다

6–7 minutes


처음 보는 용병은 제법 거친 야수 같은 인상의 몸집이 남자였다. 그는 사색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 , 페르디아……? 세요……?”

욕을 하다가 걸린 찔리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험상궂은 이미지다. 내가 만난 용병은 레이안밖에 없어서 비교군이 부족했는데, 이렇게 다른 용병을 보고 나니 레이안이 얼마나 특이한지 있었다.

하긴 저쪽이 용병 같긴 하지.’

반면 레이안은 귀족이라고 해도 믿겠다. 그런 시선을 대체 어떻게 해석한 건지, 레이안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녀석, 처리할까요?”

그러자 이름 모를 용병이크헉!’ 하며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제 얼굴이 질리다 못해 파란색이었다.

아니, 그건 아닌 같아.”

이번에도 내가 단호하게 만류하자 레이안이 나른하게 눈을 내리뜨며 물었다.

그럼 그렇게 보십니까?”

잘생겨서.”

크헉!”

이름 모를 용병이 괴성을 내질렀다. 레이안이 그렇게나 무서운 모양이었다.

무서운가?’

용병단을 이끌려면 당연히 통솔력이나 위엄이 있어야 테니 엄하게 대했을 수도 있겠다. 내게는 그런 모습을 보여 적이 없었지만. 그런 추측대로 레이안의 서늘한 시선이 맞은편의 용병을 훑었다.

마크.”

예엡!”

머리.”

박겠습니다!”

콰아앙! 마크라 불린 용병이 바닥에 세차게 머리를 박으며 엎드려뻗쳐를 실시했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머리가 깨지지 않았는지 걱정이 정도였다. 하지만 레이안은 걱정 따위는 하지 않고 계속해서 명령을 내렸다.

나올 때까지.”

꼼짝 않고 있겠습니다!”

징계.”

감사합니다아악!!”

손발이 척척 맞는 징벌의 현장에 내심 감탄했다.

, 멋있다.’

용병단을 이끄는 단장이라니, 레이안이 새롭게 보였다. 레이안은 벌을 서고 있는 용병을 자리에 내버려 다시 나를 안내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레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잠자코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 레이안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레이안이 비스듬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단은 징계를 내렸습니다만, 추후에 처리하기를 바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정작 나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레이안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간 나는 여전히 자리에 멈춰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신경 없어. 뒷얘기 듣는 익숙하거든.”

기억나지도 않을 때부터 나를 껄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의 손길로 자라났다. 유모와 유모의 딸인 마사를 제외하고는 나를 정말로 모셔야 아가씨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나에 대한 뒷얘기를 했다. 어리니까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아이는 결국 자란다. 아무것도 모른 들었던 말이 사실 어떤 의미였는지 똑똑히 이해할 있는 어른으로. 내가 자라면서는 그들 딴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속닥거리긴 했지만, 워낙 존재감이 없던 터라 유령처럼 저택을 돌아다니던 나는 심심치 않게 뒷얘기를 들었다. 아무것도 들은 참으면 대놓고 나를 무시했고, 들은 즉시 화를 내며 응징을 가하면 사생아면서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는 뒷얘기가 나돌았다. 결과적으로 참는 것보다는 길길이 날뛰는 낫다는 깨닫고 더러운 성격대로 뒷얘기를 듣는 족족 버럭버럭 화를 내었다. 그랬더니심심할 때면 없는 하녀들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공녀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전적으로 사용인들 처지에서의 소문이니 억울하긴 했지만, 그런 사정 따위 아닐 .

어쨌든 익숙한 일이긴 하지.’

이렇게 짧게 웃으며 지나갈 있을 정도로.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여긴 나뿐이었다.

신경 겁니다.”

?”

누구도 엘로디 님에 대해 함부로 말할 없도록, 제가 신경 겁니다.”

레이안의 붉은 눈동자 속에 당황한 모습이 비쳤다. 유모와 마사를 제외하고 이런 말을 주는 사람은 처음이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던 내가 내뱉은 말은 질문이었다.

호위니까?”

호위라 당연히 나를 지켜야 하니까? 레이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왜냐고 되묻기도 전에 레이안이 나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이윽고 방문 앞에 레이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설명을 덧붙였다.

방입니다. 원하는 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이쪽 복도에는 아무도 오지 않지만 혹시 모르니 출입 금지를 명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무슨 뜻이냐고 다시 화제를 돌리기도 뭐해 물어보기를 포기하고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있는 단출한 손님용 침실이었다.

침대까지 있으니 마시고 앓아눕기 딱이네.’

관리가 잘되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 있긴 하지만 그거야 청소를 하면 일이었다.

편하게 이용하셔도 됩니다.”

벌써 공간이 아니라는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은 레이안이 말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의 모습을 보았다.

명백한 호의.’

만남 이후로 줄곧 레이안은 내게 적대감을 비춘 적이 번도 없었다. 오로지 일방적으로 위험에 빠진 나를 구해 주고 스스럼없이 곁에 있겠다 자원했다. 너는 나에게 호의를 갖는 걸까. 단지 전생을 보았다는 이유로?

그거야 이제부터라도 알아내면 일이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내게서 원하는지. *** 창공의 용병단은 때아닌 스캔들에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대상은 무려 단장과 함께 어떤 레이디였다. 애석하게도 레이디를 제대로 보고 대화까지 나눈 사람은 명밖에 없었다. 바로 마크였다. 창공의 용병단의 에이스이자 사고의 주역 3인방은 당장 마크에게 찾아가 주변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무려 단장의 명령에 아직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마크의 주변에.

그래서 대체 누군데? 어떻게 주둥아리를 놀렸기에 단장이 머리를 박고 있으라고 ?”

말할 생각, 없으니까, , 제발 꺼져 줄래? 그래도 머리에 쏠리는데 걸지 말라고!! 의뢰 없냐? 버려!!”

마크의 발악에 3인방이 한마디씩 하며 복장을 뒤집었다.

이미 해치우고 왔지.”

자신 있는 목소리로 호탕하게 웃는 궁술의 천재 우라니아.

휴가 .”

단검류를 다루는 스테판은 덤덤하게 어깨를 으쓱였고.

“……귀찮아. 오늘 임무 갈래.”

대검을 무기로 다루는 미르헤는 무려 임무를 거라고 고백했다. 입을 잘못 놀린 죄로 징계를 받게 마크는 그들의 괴롭힘에도 꿋꿋하게 단장이 데려온 손님에 대해 침묵을 고수했다.

끝까지 입을 여네? 간지럼 태워 보자!”

그럼 우라니아, 네가 저쪽 간질여.”

좋아!”

지금 머리 박고 있는 보이냐?! 꺼지라고!”

우라니아와 스테판이 마크를 고문하려고 소매를 걷어붙이던 순간이었다. 저벅. 계단 위에서부터 느껴진 인기척에 머리를 박고 있는 마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이윽고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레이안과 소문 속의 레이디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히익! 사람은 동시에 숨을 멈추고 말았다. 몽실몽실한 연한 금발의 머리칼과 봄꽃처럼 화사한 분홍색의 눈동자를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가 단장의 뒤에 있었다. 용병 단원 누가 엄청 예쁘다고 난리를 치던 것이 과언이 아니라는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뭐야, 단장. 높잖아!”

단장,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어?”

“……예뻐.”

쏟아지는 찬사 속에서 이름 모를 레이디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저 잔잔하게 웃을 뿐이었다. 온갖 사교계 연회에서 외모에 대한 찬사를 질릴 정도로 들었기에 쑥스러워하는 경지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엘로디의 인사에 우라니아와 스테판이 기겁했다.

, 천사가 말을 한다!”

안녕하십니까, 스테판이라고 합니다.”

계속 머리를 박고 있어서 얼굴이 새빨개진 마크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천사는 무슨 악마겠지.’

그것도 페르디아의 악마. 아니, 망나니인가? 마크는 잊지 못했다. 머리를 박고 있는 자신을 무감한 눈길로 한번 훑고 지나가던 타칭 천사의 눈빛을! 레이안이 그렇듯 무심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저쪽 복도는 출입 금지다. 다른 놈들에게도 알려.”

!”

그리고 마크, 이만 임무에 복귀해라.”

!”

드디어 마크의 벌을 해제해 레이안이 엘로디와 함께 자리를 뜨자 삼인방이 옹기종기 모여 다시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장 애인이 대체 누군데?”

스테판의 물음에 마크가 한숨을 대답했다.

엘로디 페르디아.”

“……?”

엘로디 페르디아라고. 페르디아의레이디.”

“……?!”

소문 속의 개차반 영애가 상냥하게 인사하던 소녀라니? 용병들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 그로부터 며칠 . 페르디아 공작의 명으로 황성에 들렀다가 저택으로 복귀한 얀시는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카를로트가 카펫 위에서 팔굽혀펴기하고 있었다.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얀시가 침착하게 물었다.

카를. 지금 하는 거니?”

금단현상 치료.”

“……무슨?”

별로 힘들이지 않게 윗몸을 일으킨 카를로트가 짧게 대답했다.

리리 누님 금단현상.”

“……그렇구나.”

피습 사건 이후로 카를로트가 엘로디에게 아양 떠는 보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를로트가 이렇게 기상천외한 행동을 때마다 뭐라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으니까.

카를. 열심히 운동하는 좋은데 그걸 집무실에서 하고 있니?”

나랑 놀아 사람이 형밖에 없잖아.”

형은 지금부터 일해야 하는데.”

이만 집무실에서 나가라는 완곡한 축객령에 카를로트가 카펫 위에 풀썩 주저앉더니 투정 부리듯 말했다.

혼자 있기 싫단 말이야.”

“…….”

솔직하고 철없고 싸가지가 없긴 했지만 이렇게 어리광이 많은 아이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엘로디의 존재가 억누르고 있던 카를로트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기라도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듯 얀시에게는 성가신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온갖 맨몸운동으로 육체를 혹사하던 카를로트가 문득 얀시를 불렀다.

.”

, 카를?”

요새…… 누님이 집에 붙어 있지 않아? 계속 용병황제인지 용병왕인지 모를 그놈이랑 같이 나가고. 밤늦게야 돌아오고.”

이제 근신도 풀렸으니까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상관없지.”

하지만! 호위는 분명 나였는데! 분하다고!”

씩씩거리며 화내던 카를로트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곤 처졌다.

그리고 누님, 요즘 아파 보여.”

“…….”

카를로트의 말대로였다. 일찍이 얀시는 엘로디에게 감시를 붙여 두었다. 엘로디의 일과는 단순했다. 9시경 일어나 준비를 곧장 외출한다. 트와네트 거리에서 쇼핑한 곧바로 어딘가로 향했다. 바로 창공의 용병단 본부로. 하루도 빠짐없이.

도대체 거기서 하는 거지?’

사람을 심거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고 싶어도 같이 있는 레이안이 실력자라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가면 기운으로 압박하여 접근하지 못하게 경고했다. 그리고 늦은 , 용병단 본부를 나선 엘로디의 안색이 창백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조만간, 급습이라도 해야 하나.’

아무리 용병 단장이라고 해도 동생을 보러 왔다는 자신을 막을 수는 없을 . 엘로디가 알았으면 기겁했을 생각이 아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형형형형형.”

플랭크를 하던 카를로트가 얀시를 부르며 벌떡 일어났다.


 

35. 엘로디 페르디아와 파혼하거라

5–7 minutes


집무실 책상 쪽으로 가던 얀시가 카를로트를 돌아보며 답했다.

번만 불러도 괜찮은데, 카를. 그래서, 그러니?”

오늘도 누님, 늦게 들어오겠지? 마음에 드는 재수 없는 용병왕 자식이랑 계속 같이 있다가?”

그렇겠지. 벌써 날이 저물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들어올 생각인가 .”

이게 전부 이안이라는 자식 때문이야. 그놈이 호위가 후로 누님이 밖을 나돈다고.”

카를로트가 투정 부리듯 툴툴거렸다. 용병왕 이안이라는 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치미는지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자리에 앉은 얀시는 턱을 괴며 대답 없이 느슨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눈치란 없구나.’

딴에 최근 엘로디의 행동을 분석해서 내놓은 듯했지만 잘못 짚었다. 엘로디가 밖으로 나돌기 시작한 , 용병 이안이 호위가 되기 전부터였다. 태도가 변한 시기는 그보다 전이었고. 저택에 붙어 있던 엘로디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명확했다. 피하는 것이다. 카를로트를. 아니, 카를로트를 포함한 페르디아의 모든 사람을. 그나마 어머니와 이전보다 빈번하게 교류하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모종의 거래라도 모양인데, 무슨 내용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괜히 어머니를 건드렸다간 도리어 있으니까.’

테미스 페르디아는 아들이라고 봐주는 위인이 아니었다.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응징을 당할 분명했다. 제아무리 정보 수집에 능한 얀시라도 테미스 페르디아의 눈을 피해 정보를 수집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엘로디가 페르디아의 모든 인간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얀시만은 알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풀리지 않는 용병왕 이안과의 관계였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내고 싶어도 도무지 용병왕 쪽에서 틈을 주지 않으니 뒤를 캐기가 쉽지 않다. 수하를 창공의 용병단에 밀정으로 잠입시키려 시도했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용병단 본부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쫓겨났다. 창공의 용병단 소속 용병들의 소속감과 단장에 대한 충성심은 제삼자의 눈으로 기괴하리만치 맹목적이었다. 오후에 엘로디가 그곳에서 도대체 하는지 알아내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용병단 본부에 급습하는 것도 위험 부담이 따랐다. 그렇지 않아도 가족을 피해 밖으로 나간 엘로디였다. 그곳까지 찾아가면 당연히 엘로디가 싫어할 .

그렇다면, 카를을 보내 볼까.’

얀시는 이제 검을 꺼내 닦기 시작하는 카를로트를 주시했다. 일종의 실험용 희생양이었다. 카를로트를 앞에 내세워 정찰한다면 엘로디의 원망의 화살이 제게 향할 일이 없을 테니까. 대신 비난은 전부 카를로트의 몫이 되겠지. 그러고 보니 카를로트의 행동 중에서 줄곧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엘로디에 관한 일이라면 얀시 자신 또한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는 지점이 많아서 그냥 넘어갔지만, 이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카를.”

?”

궁금한 있는데, 대답해 줄래?”

뭔데? 물어봐.”

카를로트가 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얀시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에 카를 네가 리리에 대한 태도가 변한 이유가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호위인 네가 리리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씻으려 리리에 대한 적대감을 지웠다고.”

얀시가 보기에는 돌변한 카를로트의 행동이 그렇게 보였다. 처음에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를로트의 감정이 단순히 죄책감에 그치지 않는다는 있었다.

카를, 네가 리리한테 품고 있는 감정이 궁금해.”

뭐라고.”

카를로트가 피식 웃으며 소파에 상체를 파묻었다. 그러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카를로트의 눈빛만큼은 과거를 더듬는 어둡게 가라앉았다.

죄책감이라.’

카를로트도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호위랍시고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절벽에 떨어지던 순간의 기억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아무것도 수가 없었다. 손을 잡지 않던 누이의 얼굴이, 체념한 표정이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나야. 내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어.’

죽음의 순간에도, 살기 위해 손을 뻗는 것보다 차라리 포기하는 선택을 하도록 몰아붙였다. 그래, 그건 확실히 죄책감이었다. 하지만 이전부터 엘로디에게 품고 있던 다른 감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어린 시절, 번도 누님이라고 불러보지 못했던 누님에 대한 궁금증. 무심한 부모, 상냥하지만 그뿐인 , 외로웠던 자신. 그는 가족 중에서 유일한 또래인 엘로디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친해지고 싶었다. 가족이 되고 싶었다.

사실 누님과 가까워지고 싶었어.”

“…….”

그걸 너무 늦게 거지.”

카를로트는 마음속으로 무의미한 가정을 반복했다. 우리가 처음 나누었던 대화의 순간이 최악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누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평범한 누이와 동생이 있었을까? 카를로트가 쓰게 웃었다.

“……등신처럼.”

엘로디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후회였다.

  ***

아주 순조로워.’

개인 공간을 얻게 이후로 들락날락하며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니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해독제를 만들 있었다. 덕분에 피곤하긴 하지만 이전보다 해독제를 많이 만들 있었다. 소문으로 듣기로는 해독제와 함께 부인의 독이 암시장에서 대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흐흐.’

덕분에 독립 자금 주머니도 조금씩 조금씩 빵빵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잔뜩 만든 해독제를 마사를 통해 공작 부인에게 전하자 곧바로 만나자는 연락이 돌아왔다. 추가 의뢰 이야기인가 싶어 곧바로 온실 정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얼굴을 공작 부인의 반응이 이상했다.

“……?”

눈을 가늘게 부인은 아무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부담스러운 눈빛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살이 빠졌구나.”

더워서 그런가 봐요.”

식사를 제대로 하는 거니? 저택 주방장이 별채로 갔다고 들었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거야?”

. 이러다 없는 주방장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별채로 좌천 아닌 좌천되어 버린 불쌍한 주방장인데!

아니에요, 부인! 주방장 요리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 그냥 제가 입이 짧아서 그래요.”

그래. 엘로디 전부터 몸이 약하고 예민한 편이었지……. 앞으로도 식사를 거르지 말도록 하렴.”

, 명심할게요.”

면역력에 좋은 차나 한잔 테니 마시고 가렴. 얼굴빛이 너무 나쁘네.”

주시면 감사히 마실게요.”

나는 부인이 따라 차를 마셨다. 종종 부인과 타임을 가져서인지 이런 침묵도 마냥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편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차를 모금 마신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엘로디 덕분에 최근 연구가 무리 없이 진척되고 있단다. 사실 죽이는 데나 관심 있지, 다시 살리는 젬병이거든.”

오늘도 공작 부인은 도도하게 웃으며 살벌한 말을 내뱉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없어서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표정 관리에 무진 애를 썼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그러니 혹시 필요한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렴. 내가 도울 있는 거라면 뭐든지 도울 테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 그럴게요.”

물론 빈말이겠지만, 뭐든지 돕겠다는 부인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쓸모 있는 파트너가 거겠지?’

앞으로 열심히 권능을 써야겠다는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을 , 부인이 내게 질문했다.

그런데 요즘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 부르려고 해도 별채에 없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구나.”

밤늦게 돌아왔을 마사에게 공작과 공작 부인이 나를 찾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너무 늦어서 방문하지 못한 적이 더러 있었다. 페르디아 공작이나 얀시, 카를로트에게는 비밀이지만 공작 부인은 내가 해독제를 만들고 있다는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딱히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게, 호위인 이안이 용병단에 하나를 내줘서 거기서 해독제를 만들고 있거든요. 별채에 있으면 자꾸 카를이랑 얀시 오라버니가 찾아와서요.”

녀석들도 . 얀시야 말하면 알아들을 테고, 카를이 하나에 꽂히면 거침없이 직진하는 성격이긴 하지. 검술도 그렇고, 엘로디 너한테도 그렇고.”

공작 부인의 말에 대외적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런 직진은 사양하고 싶네요.’

  *** 아덴미르는 길게 늘어진 적막한 복도를 걸었다. 양옆으로 수많은 병사가 도열하였지만 누구도 소리를 내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리도 많은 사람 가운데 홀로 있는 것만 같았다. 복도의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모조리 내려져 있어 낮인데도 등불을 켜야 정도로 컴컴했다. 마치 장례식 한가운데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복도의 , 이윽고 아덴미르는 황제의 침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폐하께 고하라.”

아덴미르의 말에 침소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 1황자 전하께서 뵙고자 합니다.”

대답은 한참 후에나 들려왔다.

“……들라, 하라…….”

금방이라도 꺼질 뚝뚝 끊기는 힘겨운 음성이었다. 아덴미르에게는 익숙한 부친의 목소리였다. 황제의 침소 안에 발을 들이자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한 코끝을 매캐하게 찌르는 약초 냄새였다.

왔느냐…….”

의원이 들렀다 갔습니까?”

그래…….”

쿨럭, 쿨럭! 침대에 누워 있는 황제가 거칠게 기침하며 몸을 크게 들썩였다. 불과 5 전까지 정정했던 황제건만 어느 순간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덴미르에게는 재앙과 다름없었다. 황후 소생의 아덴미르와 황비 소생의 벨트란. 일찍이 황후가 서거했기에 아덴미르의 지지 기반은 벨트란보다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황후의 친정은 권력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살바트리체 황비는 세도가의 레이디로 황후 자리를 비워서는 된다는 신하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황비 자리까지 올랐다. 서거한 황후를 사랑했던 황제는 황후의 자리를 비워 두되 황비로 맞이하는 조건으로 신하들의 요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덴미르가 황태자가 되기 위해선 황제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수였다. 그러나 장자인 아덴미르의 손을 들어 상황에서 황태자 책봉을 눈앞에 두고 황제가 병석에 드러누운 것이다. 당연히 살바트리체 황비는 순식간에 황성을 장악해 나갔다. 손쓸 틈도 없이.

이리 창을 닫아 두고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바람 소리가, 시끄럽다…….”

병세가 악화되며 황제의 신경은 더욱 날카롭고 예민해졌다. 타인의 숨소리마저도 거슬려하기에 문밖 병사들이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덴미르는 착잡한 심정으로 부친의 곁을 지켰다. 쿨럭, 쿨럭……! 연신 기침을 터트리던 황제가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아들아, 네게, 긴히, 말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부황.”

이어진 황제의 말에 아덴미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로디, 페르디아와…… 파혼하거라.”


 

36. ……지금, 독을 마신 거니?

6–8 minutes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아덴미르는 당혹감을 감출 없었다. 엘로디 페르디아와 파혼하라니. 이유가 조금도 짐작되지 않았다. 페르디아는 외척 세력이 없다시피 아덴미르에게 가장 전력이었다. 그가 황비 소생인 2황자 벨트란을 수월하게 상대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수세에 몰려 있던 아덴미르에게 페르디아의 약혼 제의는 단비와도 같았으니까. 당시 병석에 앓아누워 있던 황제 또한 약혼에 이견이 없었다. 한데 공고한 약혼을 깨려는 것인가.

생각이 짧아 부황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따라잡기 힘듭니다. 부디 설명해 주십시오.”

쿨럭! 입술을 달싹이던 황제가 다시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아덴미르는 부친이 진정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이윽고 황제의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다시 열렸다.

나무를…… 보지 말고, , 숲을…… 보아라……. 장차 네가 황위를…… 물려받거든…… 쿨럭! 권력이…… 온전히 …… 것일 같으냐……?”

“…….”

아들아……. 페르디아는…… 그릇으로…… 품기에는…… 너무 존재다…….”

황제가 제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덴미르는 이해할 있었다. 간헐적인 기침 사이에서 황제는 어째서 페르디아의 힘을 빌려서는 되는지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페르디아는 타협하지 않는다. 음지의 지배자인 그들은 제국의 어두운 면을 누구보다 알고 있다. 그러니 윌렌티아의 인간들은 그들의 영향력에서 결코 벗어날 없었다. 그건 황족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황권마저 위협할 정도의 가문이건만 음지에서 웅크리고 있을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군주로서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황제로 군림하면서 그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병석에 누운 자신이 아무것도 없기에 당장 페르디아의 힘을 빌리는 것을 묵과했으나, 그것은 결국 아덴미르의 목을 점점 죄어올 것이다. 페르디아를 황성에 들여서는 된다. 영원히 음지의 권력가가 되도록 그들을 끌어들여선 된다. 만일 엘로디 페르디아가 황후라도 되는 날에는 제국은 완전히 페르디아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과 다름없었다. 아덴미르는 그저 허수아비 황제가 것이다. 황제는 모든 것을 내다보았다.

부황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게는 당장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루기 쉬운…… 앙겔로스를, 택하거라.”

4 가문 중에 아덴미르와 나이가 비슷한 레이디가 있는 가문은 페르디아와 앙겔로스가 전부였다. 그러니 지금 황제는 아덴미르에게 도로테아 앙겔로스와 약혼하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도로테아를 떠올린 아덴미르는 침착하게 반박했다.

하나 앙겔로스는 이미 2황자의 세력입니다.”

작자는…… 제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뭐든 하지. 그리고, 그게…… 네게 도움이 게다…….”

아덴미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부황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도무지 그러겠다고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우스웠다.

파혼, 파혼. 당사자도 파혼을 떠들어대더니 부황마저 파혼하라 종용하시는군.’

마치 파혼만이 앞에 준비된 길인 것처럼. 아덴미르는 그러겠다 대답하는 대신 모호한 대답을 남겼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황제는 곤한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끝까지 당부했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리라 믿는다, 아들아…….”

아비는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사랑했던 여자의 유일한 자식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걱정이었다. 그때, 문밖의 시종이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폐하. 황비 전하께서 뵙고자 합니다.”

아덴미르의 정적(政敵)이자 황제의 번째 부인인 살바트리체 황비의 방문이었다. 그녀는 들라는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침실 안에 들어섰다. 그녀의 뒤로 약이 그릇을 받쳐 시녀가 함께 들어왔다. 황비는 미리 있던 아덴미르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폐하께서 드실 시간이라 왔는데, 황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말을 들은 아덴미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몰랐을 리가. 알고 있었겠지.’

멍청한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고자 혈안이 되다 못해 미쳐버린 여자다. 자신이 황제의 침소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불안한가. 대화할 조금의 시간조차 내버려 없을 정도로. 아덴미르는 조소하며 살바트리체 황비에게 답했다.

오랜만에 뵈어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어머, 그러려던 아닌데 부자간의 대화를 방해해 버렸네.”

“…….”

웃으세요. 폐하 앞인데.”

미소 속에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말에 오히려 아덴미르의 표정이 삭막하게 굳었다.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황비 전하의 앞이기도 하니 그런지.”

농이 많이 느셨군요, 황자.”

하면 부황께 약을 드리십시오. 이만 보겠습니다.”

황비의 대답을 듣지 않고 아덴미르는 뒤돌아 문을 벗어났다. 뒤로 간드러진 황비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아, 폐하. 천천히 드시어요.”

쿨럭, 쿨럭! 아덴미르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힘겹게 약을 삼키는 황제의 신음이 점점 멀어졌다.

  *** 에스텔. 엘로디에게 이름의 주인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은 레이안은 직후 수하들을 파견했다.  

외모는 갈색 머리칼에 벽안. 나이는 나보다 한두 많을 거야.”

  사람을 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정보가 아닐 없었다. 하지만 의뢰자가 엘로디 페르디아라는 사실만으로 레이안은 임무를 반드시 완수해야 이유가 있었다. 정보 수집에 능한 용병 단원이 곳곳에 파견되었다. 주로 윌렌티아 제국 내를 수색하지만 범위는 윌렌티아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에스텔이라는 이름이 그리 특이한 이름이 아니니만큼 없이 많은 동명이인이 존재할 것이다. 가운데 외양과 나이대가 일치하는 여인을 찾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게 의뢰인인 엘로디가 찾는 사람이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하지만 찾아내야만 했다. 엘로디가 바라는 일이니까. 레이안은 우선 1차로 올라온 수색 안건 문서를 정리해 엘로디에게 건넸다.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

엄청난 두께에 엘로디가 감탄했다.

이걸로 사람 머리 때리면 죽겠다. 그치?”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처리하겠습니다.”

이건 농담이야.”

뭐만 하면 죽이고 처리하겠다는 레이안을 진정시킨 엘로디는 흉기 같은 문서 뭉치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그곳에는 수색 대상에 대한 정보와 가족관계, 인상착의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도구로 기록한 대상의 얼굴 그림까지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정말 섬세하고 완벽한 문서였다. 문서인데…….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 에스텔 얼굴 모르잖아?!’

아무리 이렇게 수색하여 문서로 작성해 와도 그것이 원작의 에스텔이 맞는지 아닌지 알아볼 있는 재간이 없었다. 엘로디가 읽은 활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녀는 슬그머니 레이안의 눈치를 보았다.

레이안, 있잖아…….”

말씀하세요.”

어차피 에스텔 얼굴 모르거든. 이렇게까지 찾을 필요는 없어.”

이렇게 많이 찾아봤자 알아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애초에 원작의 무대는 윌렌티아의 수도인 솜니아였다. 원작에서 에스텔의 과거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다른 지역 출신이라는 묘사는 없었으니 근처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솜니아 근방까지만 조사해 .”

의뢰 조건을 수정했음에도 레이안은 당연하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엘로디는 뺨을 긁적이며 레이안을 쳐다보았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 . . 엘로디가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 방으로 올라가자 집무실에 남은 레이안은 용병 단장으로서 일을 하나하나 처리했다. 모습을 흘긋흘긋 바라보던 부단장 마리오가 슬쩍 입을 열었다.

단장.”

“…….”

정말로 리리 아가씨와 아무 사이 아닙니까?”

특유의 친화력으로 불과 며칠 만에 엘로디와 친해진 마리오가 능글맞게 물었다. 레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리리?”

기묘하리만치 음산하게 들리는 음성에 마리오가 기겁하며 변명했다.

아가씨께서 허락하셨다고요! 리리라고 불러도 된다고!”

부르지 .”

, 그건 , , 권능 쓰지 마십시오!”

으악! 마리오는 고함을 내지르며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다시 고함을 내지르며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으아아악! 단장! 사건입니다!”

“……사건?”

! 레벤 숲에 4, 5 대형 마수가 떼로 출몰했답니다. 그런데 녀석들 뭔가 이상하다고 하는-.”

마리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안이 자리를 박차고 빠르게 걸어 나갔다. 마리오는 한숨을 내쉬며 성질 급한 단장의 뒤를 따랐다. 레벤 숲은 수도 솜니아에서 동쪽으로 시간 정도를 달리면 도착하는 작은 숲이었다. 1 마수가 출몰하긴 하지만 워낙 약해서 주민들의 삽으로도 상대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런 레벤 숲에 4, 5급의 대형 마수의 출몰이라. 현장에 도착한 레이안은 이미 처치된 대형 마수의 사체를 살폈다. 대충 봐도 심상치 않은 것을 있었다. 대형 마수건만 이런 종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력 중독의 흔적. 레이안의 붉은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벌써 움직인 건가.’

  *** 레이안이 레벤 숲에 체류하고 있을 시각, 테미스는 비공식적으로 페르디아 소속의 암시장에 들렀다.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암시장의 주인이 맨발로 뛰쳐나왔다.

별일은 없느냐?”

. 저번에 맡기셨던 웜크 살충제가 아주 나갑니다. 수확량이 늘어서 농민들이 그리 기뻐한다더군요.”

좋은 소식이구나.”

해외 주문도 쇄도한답니다. 크흐, 뭐라더라, 사창가나 들락거리는 썩을 남편들 시름시름 앓다 죽게 만드는 제일이라지요.”

그것도 좋은 소식이구나. 독이 그리 유용하게 쓰이다니, 흡족해.”

전자보다 후자의 용도로 불티나게 팔린다는 암시장 주인만의 비밀이었다.

요새 새로운 출시가 빨라져 저희도 아주 바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약제사를 구하셨다지요?”

암시장 주인의 말에 테미스는 엘로디를 떠올리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아이야.”

“……?”

, 귀여운 아이?

어쨌든 조만간 다른 독을 가져올 생각이니 준비해 두거라.”

, 맡겨만 주십시오.”

암시장 정찰을 끝낸 테미스는 한가로운 걸음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그러다 문득 근처에 창공의 용병단 솜니아 본부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오늘도 용병단에 갔다고 했지.’

마사라는 하녀를 호출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부재중 소식뿐. 사실 용병단 본부의 빈방에서 해독제를 만들고 있다고 했었다. 잠깐 고민하던 테미스의 발걸음이 어딘가로 향했다. 딸랑-. 용병단 본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단출한 인원이 방문객을 쳐다보았다.

“……, 페르디아 공작 부인!”

누군가의 외침에 용병단 입구가 크게 술렁였다. 솜니아에서 테미스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기 때문이었다.

딸이 여기 있다는데?”

테미스가 요요하게 웃으며 묻자 얼어 있던 데스크의 직원이 잔뜩 긴장한 대답했다.

, 하지만 단장께서 방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엄마가 딸을 보러 온다는데, 문제가 될까?”

내가 아무나는 아닐 텐데. 덧붙인 말에 감히 항변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어코 엘로디가 있다는 위치를 알아낸 테미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기묘하게도 적막한 복도였다.

일부러 사람이 오가지 못하는 방을 내어주었구나.’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해독제를 만들기에 기밀을 필요로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당사자가 밝히지 않는 이상 알아낼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그저 근처에 김에 이야기나 나누고 생각이었다. 그렇게 엘로디의 앞에 테미스가 가볍게 노크를 했다. 똑똑-. 그런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 이번에도.

엘로디.”

똑똑-.

엘로디?”

이름을 불렀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테미스가 문고리를 돌렸지만 안에서 잠겨 있는 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테미스의 주먹이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내리치자 빠각, 소리를 내며 손쉽게 부서졌다. 형편없이 열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테미스는 처참한 풍경을 눈에 담고 뻣뻣하게 굳었다. 바닥에 잔뜩 널브러져 있는 독약 . 온데간데없는 내용물.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엘로디. 테미스는 경악했다. 설마. 설마…….

“……지금, 독을 마신 거니?”


 

37. 독립하려고요

6–7 minutes


당연하게도 테미스의 의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엘로디는 정신을 잃은 상황이었으므로. 차마 말을 잇기 힘들 정도의 충격이 테미스를 덮쳤다. 지금 떠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봐도 부정적으로 흐르려는 것을 막을 없었다.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 테미스가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 해독제로구나.’

엘로디가 가지고 오는 해독제의 병과 가득 병이 분류되어 있었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해독제를 만드는 필요한 것이 무엇도. 오로지 테미스의 독과 , 해독제뿐. 상황을 목도하니 그동안 느꼈던 의문이 하나하나 풀려나갔다.  

아무래도 독의 독성을파괴하는 권능인 같아요.”

  테미스는 이번에 페르디아의 권능이 개화했다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엘로디의 모습을 떠올렸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혹여 권능 발현이 얀시와 카를로트를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지레 겁먹던 모습도.  

그래. 기왕이면 해독제 조제 방법을 사고 싶은데, 그건 어려울까?”

……. . 영업비밀이에요.”

  조제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을 엘로디의 반응이 이상하다 싶었다. 좋은 파트너가 되겠다며 호언장담하던 아이가 조제 방법에서만큼은 필사적으로 숨겼으니까. 그러면서도 불안한 시선을 피하며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믿고 내버려 두었다. 믿음의 결과가 바로 상황이었다.

직접 음독해야만 하는 권능이었을 줄이야.’

미련하다. 미련하고 멍청하기까지 해서 허탈했다. 테미스는 엘로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수가 없었다. 너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거니? 무엇이 아이를 이렇게까지 하도록 몰아붙인 것인가. 테미스 페르디아는 유능한 독제사였다. 그런 만큼 자신이 만든 독의 독성이 얼마나 강하고 지독한지 누구보다 알았다. 정신을 잃은 엘로디의 모습을 보아, 독성이 강한 만큼 고통으로 치환해서 느낀다는 것을 추측할 있었다. 개중에는 아주 소량만 섭취해도 내로 죽음에 이르는 독도 있었는데, 그걸 마셨다고. . 하나하나 짚을수록 기가 막혀서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흥분되었다. 테미스가 감정을 다스리고 있을 그때, 불운하게도 엘로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연분홍색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인……?”

, 뭐지. 꿈인가? 기운과 잠기운이 겹쳐 아직 비몽사몽한 엘로디는 곧바로 상황 파악을 없었다.

공작 부인이 앞에 있는 같은데……?’

창공의 용병단 본부에 공작 부인이 일이 없으니 꿈인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현실감이 또렷했다. 더욱이 놀라운 .

엘로디 페르디아!”

이름을 부르며 싸늘하게 바라보는 테미스의 모습이었다. 엘로디는 움찔 몸을 떨며 주섬주섬 상체를 일으켰다. 도는 머리라든가, 아직 한없이 무거운 등의 상태가 지금이 꿈이 아니라는 증명해 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제게 소리치는 공작 부인의 모습을 보는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테미스가 채근하듯 물었다.

진작 말하지 않았니?”

?”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네가 음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건……!”

오해라고 변명하려던 엘로디는 확신에 테미스와 눈이 마주친 입술을 깨물며 뒷말을 흐렸다. 안에 있는 물건들이 나타내는 바가 너무도 명확했다. 발뺌할 없었다.

제가, 그걸 말씀드리지 않았던 …….”

혹시 권능 속성이파괴 아니라정화라는 들킬까 . 그럼 내가 페르디아 공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발각되고 마니까.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공작 부인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사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밝혀져서는 된다.

그냥, 조용히 떠나고 싶었을 뿐인데…….’

엘로디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러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테미스는 그런 엘로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손까지도. 아직도 기운이 남은 엘로디의 얼굴은 창백했다. 극독을 마신 고통을 참아 내며 엘로디가 바랐던 돈이었다. 테미스에게는 너무나도 적어 같지도 않은 액수의 . 고작 돈을 손에 쥐겠다고 독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테미스는 엘로디에게 말했었다.  

많은 양이 필요할 같은데, 가능하겠니?”

  ……라고.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독을 마시라고 간접적으로 종용한 아닌가. 짧은 고민 끝에 테미스는 한숨을 내쉬며 선언했다.

우리의 거래는 이대로 끝이다, 엘로디.”

“……!”

엘로디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 하지만 유능한 약제사가 필요하시잖아요.”

물론 필요하지.”

이렇게 거래를 끊으시면 약제사를 잃으실 텐데, 정말로 괜찮으세요?”

엘로디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효용을 증명하려 애썼지만, 테미스는 완고했다.

자식에게 독을 먹이는 취미는 없단다.”

자식이요……?”

“……엘로디 너는 내게 어떤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엘로디가 되물으려고 했지만, 테미스의 말이 빨랐다.

엘로디. 앞으로는 권능을 사용하지 말도록 하렴.”

하지만-.”

하지만은 없단다. 앞으로 나는 엘로디 방해할 거다. 어떤 독도 음독하지 못하도록.”

무려 권능을 사용하지 말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에 앞서 테미스의 말은 전부 잊혔다. 테미스가 웃으며 물었다.

이런 나를 상대할 있겠니?”

절레절레……. 엘로디는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까짓 공작 부인을 상대할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권능 금지라니, 권능 금지라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엘로디의 표정을 테미스가 쐐기를 박았다.

행여 독을 마신다면, 아버지에게 말할 거란다.”

콰광…….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부인이 독립을 방해한다.’

어떻게 해야 부인을 설득할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 테미스가 진지한 얼굴로 엘로디를 바라보았다.

엘로디. 가지 물어봐도 되겠니?”

, 말씀하세요.”

어째서 돈이 필요한 건지 궁금하단다.”

엘로디에게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지 진작 생각해 놓은 변명이 있었다. 그러니 엘로디가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계속 침묵 혹은 거짓으로 일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엘로디는 다소 충동적으로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독립하려고요.”

“…….”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공작 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없는 얼굴로 엘로디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독립이라…….’

테미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독립, 말에 그동안 엘로디가 보인 이상한 행동이 전부 이해가 되었다. 갑자기 패악질을 부리던 관두고 별채에 칩거했던 . 얀시와 카를로트가 어떻게 굴든 그저 초연했던 . 제게 먼저 다가와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던 . 저택에 들어오라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던 . 필사적으로 해독제를 만들어 돈을 모았던 . 모든 이들이 엘로디가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권능의 개화를 처음 테미스에게 말했을 엘로디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래 봬도 주제 파악은 잘하는 편이거든요.”

  사생아라는 주제 파악을 잘하고 있다고.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얀시와 카를로트를 방해하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때부터였을까.’

엘로디는 페르디아에 속하기를 포기했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는 바라는 없으니, 화를 필요도 없었겠지. 모든 사실을 깨닫고 나자 테미스는 엘로디의 얼굴을 차마 수가 없었다. 엘로디가 포기하게 만든 이유에 자신의 지분이 적지 않을 테니까. 테미스는 엘로디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알고 있었지만 먼저 다가가려고 했던 적이 번도 없었다. 엘로디가 처음 저택에 왔을 , 남편과 모종의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조건 중에 엘로디에 관한 내용도 존재했다. [엘로디 페르디아와 관련한 모든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테미스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사라진 친모를 대신해서 엄마 역할을 자격이.

지쳤겠구나. 외로웠을 테니.’

원래도 작은 엘로디의 체구가, 오늘따라 가녀려 보였다. 하지만 테미스는 그런 엘로디를 안아 없었다. 대신 평소와 같은 다소 오만한 공작 부인의 얼굴로 통보하듯 말했다.

그래, ……독립. 독립하겠다는 말리지 않겠어. 성인식이 끝나면 성인이 텐데 엘로디 너도 생각이 있겠지. 하지만 이런 방법에는 협조할 수가 없구나.”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죄송해요.”

엘로디가 쭈뼛대며 테미스에게 사과했다. 눈치를 보는 얼굴을 보다가 테미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택으로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말에 거절했다고 들었단다.”

, 그랬어요.”

때문이니?”

돌려 말하지 않는 물음에 엘로디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 아니에요. 지금 와서 들어가 봤자 다들 불편할 테고-.”

엘로디의 말을 도중에 자르며 테미스가 다시 물었다.

의견을 묻고 있잖니, 엘로디.”

잠깐 머뭇거리던 엘로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편하진 않아요.”

테미스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대로 솔직한 대답을 얻어 냈다.

그래. 그렇다면 편하게 만들어 줘야지…….”

작게 중얼거린 말에 제대로 듣지 못한 엘로디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별거 아니란다. ,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 잠깐만요……!”

테미스는 주섬주섬 독약 병과 해독제 병을 챙기기 시작하는 엘로디를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여러 계획을 세웠다.

오랜만에 피가 끓네?’

바로 엘로디 독립 망치기 계획을. *** 직장을 잃었습니다.

아닌가. 경우에는 거래처를 잃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잃었다……. 앞으로 해독제를 만들 없으니 돈을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독립자금이 모이지 않을 테고, 그렇게 독립을 하고 별채에서 빌빌거리다 내가 페르디아 공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밝혀지기라도 하는 날엔…….

죽겠지…….”

이제 내가 믿을 마법사 엘비, 마탑주 이시스에게 투자해 놓은 자금뿐이다. 그걸 어떻게 굴려야 3 안에 큰돈으로 불릴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려는 찰나-.

뭐가 죽어?”

으아악!”

느닷없이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겁하며 돌아보았다. 카를로트가 발코니 바로 나무에 걸터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카를로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은 웬일로 집에 있는 거야? 허구한 매일같이 이안인지 용병왕인지 하는 , 아니, 놈이랑 놀러 다니더니.”

비꼬는 듯한 말투인데 웃고 있는 걸까? 나는 카를로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녀석의 방문 방법에 대해 지적했다.

카를. 문은 장식이 아니야.”

이것도 문이잖아, 누님. 창문.”

그렇게 대답하며 카를로트가 방긋 웃었다.

아오, 앙큼해.’

대놓고 아양을 떠는 카를로트의 모습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가 질색하며 슬쩍 몸을 뒤로 빼자 카를로트가 발코니로 안착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누님. 큰일 났어.”

? 무슨 있어?”

오늘 가족 만찬 날이잖아.”

이미 어제 집사를 통해 통보받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큰일인데?”

식사 자리에 가기 싫으니까 입장에서 큰일이라면 큰일이긴 한데. 카를로트는 큰일이라면서 이번에도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외식하자고 하셨거든.”

“……!”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 외식?

페르디아 인간들이랑요……?!’


 

38. 어깨를 잘라 버릴까요?

6–7 minutes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걸까……. 아아, 전생에 윤가을이었지.’

그렇다면 내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동급인 짓이라도 저질렀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재앙이 닥칠 리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준법 시민으로 떳떳하게 살았다고!’

전생 탓을 하려다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그럼 어째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친 것인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페르디아 가문의 마차 . 가문이 소유한 마차중에 가장 크기가 크고 화려한 마차 안엔 무려 페르디아의 모든 가족이 앉아 있었다. 공작 부부와 아들놈, 마지막으로 나까지.

살려 주세요.’

막혀서 죽을 같아요.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인 가운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공작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뜨흡. 나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켜며 몸을 뻣뻣하게 경직시키고 말았다. 공작 부인에게 비밀 약제사직을 해고당한 만남이었다.

다행히 다른 가족들한테 말씀하신 같지는 않지만…….’

내심 부인이 권능이나 독립하고 싶어 한다는 목표를 말했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물론 내가 독립한다고 해서 다들 신경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충분한 돈을 모을 때까지는 나머지 가족들이 몰랐으면 했다. 맞은편에는 공작 부부가, 양옆에는 안타깝게도 얀시와 카를로트가 각각 앉아 있었다. 가운데에 앉아 있는 바람에 창밖을 내다볼 수도 없는, 아주 무자비하고 비참하고 머쓱한 자리 배치 자체였다.

흑흑, 나도 가장자리…….’

미련 가득한 눈으로 옆을 보았다가 이번에는 얀시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얀시가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같이 외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어머니?”

가족끼리 바람 쐬는 것도 나쁘지 않잖니. 가끔은 이런 것도 기분 전환되고 좋지. 너희들 아버지께서 흔쾌히 그러자고 하셨단다.”

그러자 팔짱을 눈을 감고 있던 페르디아 공작이 눈을 뜨더니 정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면에는…… 내가 있었다. , 저를 쳐다보시죠? 이윽고 공작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엘로디 네가 가고 싶어 했다는 레스토랑이라더군.”

……?”

제가요? 그것참 금시초문이었다. 말에 옆에 앉아 있던 공작 부인이 생긋 웃었다.

내가 말씀드렸단다, 엘로디. 잘되었지 않니?”

차마 아니라고 말할 없는 은근한 눈빛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공작 부인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없어서 불안함만 켜졌다. 그렇게 마차 정중앙에 앉아 오들오들 떨다 보니 어느새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듣기로 아무리 돈이 많아도 반년 전에 예약해 둬야 하는 레스토랑이라던데. 그런 식당을 당일 예약으로 대기도 없이 들어갈 있다니 역시 페르디아는 대단했다.

이왕 여기까지 , 밥이나 맛있게 먹고 가자.’

당연히 혼자 마차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먼저 내린 얀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리리, .”

나는 얀시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뒤에 있던 카를로트가이라고 하는 같았다. 갑자기 심통이 나고 난리일까, .

우리 이렇게 손잡고 갈까, 리리?”

아뇨.”

오늘도 부담스러운 친절을 베푸는 얀시의 손을 놓고 얼른 빠르게 걸어가는데, 고개를 숙이며 걸어오던 남자와 , 어깨를 부딪쳤다. 가벼운 접촉이라 대수롭지 않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럴 없었다. 상대방이 나를 보며 역정을 냈기 때문에.

아이씨! 눈깔은 장식이야? 똑바로 뜨고 -!”

내게 삿대질하며 소리치던 남자는 주변으로 모여드는 가족들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 페르디아?”

얼떨떨한 대신 앞으로 나선 것은 바로 카를로트였다. 카를로트가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 뿔머리. 뭔데 사람 놓고 사과도 하냐? 눈깔? 눈깔이랬냐? , 버릴라. 꼬나 ?!”

, 죄송합니다!”

카를로트가 새도 없이 쏘아붙이자 남자가 얼른 사과했다. 레스토랑에 드나들 정도면 그래도 돈깨나 있는 귀족일 텐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귀족 남자의 사과에도 카를로트는 으르렁대며 제법 매섭게 노려보았다.

말고. 사람한테 해야지. , 통하네. 아버지, 자식 머리통만 남기고 땅에 묻어 버릴까요?”

카를로트의 급발진에 나는 떡하니 입을 벌리고 페르디아 공작을 돌아보았다. 가문의 가주로서, 카를로트의 아버지로서 페르디아 공작이 녀석의 도가 지나친 분노를 막아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지.”

믿음은 산산조각이 버렸다! 이러다 정말 카를로트가 지반 붕괴로 귀족 남자를 땅에 묻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드는 찰나였다.

아버지.”

잠자코 있던 얀시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안도했다. 드디어 정상인이 나서는구나!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권능이면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끝낼 있을 거예요, 아버지. 카를 권능은 아무래도 수복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얀시는 한술 뜨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다.

페르디아에서…… 탈퇴하겠습니다.’

어깨빵에서 시작된 소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 나를 위로하려는 걸까. 공작 부인이 옆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화목하구나. 동생과 누님을 위해 이렇게 나서주다니. 그렇지 않니, 엘로디?”

어디가요. 말이 너무 많아서 아무 말도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나는 입을 벌린 총체적 난국인 페르디아 패밀리를 둘러보았다. 얀시와 카를로트는 자기가 뿔머리 귀족을 처리하고 거라며 경쟁하고 있었다. 그때 얀시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리리, 너는 어떡하면 좋겠니? 네가 결정하는 좋겠다.”

…….”

나는 턱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귀족 남자가 흡사 울기 직전의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내가 먼저 어깨빵을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나를 놓고 화를 냈다고 하더라도 카를로트와 얀시의 처분은 너무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봐주자고 말하면 말을 듣지 않을 분명하다.

먼저 심한 처분을 말한 다음에, 적당한 처분으로 정정하자.’

그런 심도 깊은 고뇌 끝에 나는 방긋 웃으며 외쳤다.

그럼, 어깨를 잘라 버릴까요?”

“…….”

“…….”

분위기가 이상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뿔머리 남자까지 사색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지? 권능 써서 묻어 버리는 것보단 나을 텐데.’

카를로트가 당황한 얼굴로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누님, 진짜……? 뒤처리는 걱정 해도 되긴 하는데…….”

리리,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어.”

얀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그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페르디아 공작이 한마디했다.

검을 가져오너라.”

말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란의 중심에 있던 귀족 남자가 , 소리가 정도로 세게 무릎을 꿇었다.

, 살려 주세요!! 허어엉!”

이번에는 카를로트가 아닌 정확히 나를 향해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잘못했습니다, 레이디. 다신 레이디의 어깨는 물론이고 그림자도 밟지 않고, , 아니 반경 1 안으로는 절대 들어가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어깨만은……!”

지금 와서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하면 오열하는 남자의 체면이 말이 아닐 같았다. 나는 페르디아의 공녀답게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충 대꾸했다.

그래요. 어깨를 자르는 귀찮아서 싫네요. 피가 튀니까.”

튀게 있다.”

아니에요, 아버지. 괜히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아요. 그냥 똑같이 어깨빵으로 가죠.”

당한 만큼만 고스란히 돌려주자는 나의 명확한 해결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다행히도 없었다.

처신 잘해라, 뿔머리.”

-! 그렇게 카를로트가 어깨빵을 갈기는 것으로 합의를 끝냈다. 레스토랑에 들어와 자리를 앉은 이미 지쳐 있는 상태였다. 어깨를 쳤다는 이유로 제거당할 뻔한 남자를 무사히 돌려보냈으니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지만, 정신이 너덜너덜하지?

다시는, 다시는 외식 나와.’

외식 이야기가 나오면 아플 예정이다. 우리가 안내받은 자리는 봐도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쌀 같은 예약석이었다. 이미 있던 레스토랑의 손님들이 힐끔거리며 가족들을 쳐다보았다. 그럴 만도 페르디아 인간들은 워낙 성격이 폐쇄적이라 저택 밖을 나오지 않았다. 페르디아 공작은 저택 혹은 황성만 왔다 갔다 했고, 얀시도 마찬가지였다. 공작 부인은 거의 온실 정원에 박혀 제조에 매달렸고, 카를로트는 바보답게 연무장에서 살았다. 나도 건강이 그렇게 좋은 아니라 거의 별채에 박혀 있었지. 다른 가족들은 그런 시선이 익숙한 듯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을 보는 눈빛은 선망이지만, 나를 보는 시선만은 종류가 달랐으니까.

사생아가 주제넘게 끼어 있다고 쑥덕거리고 있겠지, .’

시선을 무시하며 아뮤즈 부쉬를 먹고 있을 때였다.

이게 누구신가.”

누군가 우리 테이블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모노클을 매만지는 남자는 제법 익숙한 얼굴이었다. 로드리고 앙겔로스. , 앙겔로스 공작이었다. 앙겔로스 공작의 뒤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마법사인가?’

어쩐지 초췌하고 퀭한 얼굴의 남자였다. 어두운 초록색의 산발을 한쪽으로 묶어 내린 남자는 칙칙한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의복 어디에도 마탑 소속임을 나타내는 문양이 없었다. 자유 마법사일까. 대부분 마탑에 소속되어 있지만 간혹 마탑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다. 내가 마법사를 관찰하고 있을 , 앙겔로스 공작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페르디아 공작에게 인사했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 실베스터. 반갑네, 반가워. 가족들과 식사를 하러 모양이야. 보기와는 다르게 제법 가정적이군그래?”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정말 반갑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겠지만 상대가 앙겔로스 공작인 만큼 무조건 비꼬는 말이었다.

너답지 않게 우스운 짓을 한다, 뜻이겠지.’

당연히 페르디아 공작은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래.”

성의 없는 짧은 대답에 앙겔로스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때 와인을 홀짝이던 공작 부인이 눈을 사르르 접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앙갤로스 . 돌시니아는 어떻게 지내나요? 지난번에 만난 이후로 얼굴을 봐서요. 안부 전해 주세요.”

허허,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요양하고 있소. 그리 전해 주도록 하겠소이다.”

대외활동을 하지 않는지 이유를 알면서도 물어본 것은 공작 부인의 도발이었다. 물론 능구렁이 같은 앙겔로스 공작은 물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끈질겼다.

어머, 돌시니아가 몸이 좋지 않다니. 도로테아 양도 몸이 좋지 않나 보네요? 모녀가 동시에 앓다니 혹시…… 전염병에라도 걸린 아닌지 걱정이네요.”

말에 앙겔로스 공작이 눈을 크게 뜨며 반박했다.

전염병이라니. 말조심해 주시오, 부인.”

혹시라도 전염병에 걸렸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황실에서 조사가 나올 정도로 일이 커지므로 앙겔로스 공작이 펄쩍 뛰는 당연한 일이었다. 공작 부인이 느긋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머지않아 열릴 이슈타르 신전 회합일에 만날 있겠군요.”

“……그렇소.”

슬슬 앙겔로스 공작과 부인의 싸움이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오늘도 부인의 승리네. 모녀를 기어코 공식 행사로 끌어내다니.’

감탄하며 무심결에 공작의 뒤에 있던 마법사를 보는 순간이었다. 찰나 어두운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뭐야.’

착각이 아니라면, 마법사, 눈을 피하는 같지?


 

39. 드리겠습니다, 용병단

7–8 minutes


수상해.’

본능적인 직감이 말했다. 마법사, 뭔가 있다고. 나는 공작 부인과 앙겔로스 공작의 대화가 끊긴 틈을 얼른 끼어들었다.

뒤에 계신 분은 처음 뵙네요. 마법사이신가요?”

마치 태어나서 마법사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과하게 반짝이는 눈을 하며 물어보았다. 세상 물정 따위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레이디처럼 보이기를 바라며. 앙겔로스 공작이 인자한 웃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엘로디 양이군. 그래, 자는 최근 우리 가문에 고용된 마법사라네.”

그렇군요. 이렇게 마법사님을 가까이 보는 처음이라 실례를 범하고 말았네요.”

실례라니, 당치 않네. 궁금하면 물어볼 있지, 허허허.”

얀시가 나를 유심히 쳐다보는 느껴졌지만 모른 앙겔로스 공작을 따라 방긋 웃었다. 나도 가식적인 행동이 소름 돋지만 어쩔 없었다. 때로는 만만하게 보이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때가 있거든. 목표는 마법사의 신상에 대해 알아내는 것이었다.

마법은 권능이랑 달라서 멋진 같아요! 그럼 …… 혹시 어느 마탑 소속의 마법사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 마법사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곤해 보이는 퀭한 눈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무심한 표정이었다. 이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상대에게 소속을 밝히고 싶지 않군.”

뭐라는 거야? 죽고 -!”

순간 발끈한 카를로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공작 부인이 녀석의 발을 밟으며 말렸다.

으악! 어머니!”

카를로트가 고함을 지르는 사이 마법사는 그대로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앙겔로스 공작이 미안한 척하는 얼굴로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손님이 엘로디 양에게 실수를 했구먼. 마음 넓고 다정한 엘로디 양이 이해해 주겠지?”

그럼요.”

그럼 다음에, 이슈타르 신전에서 보겠군. 회합일에 보도록 하세.”

앙겔로스 공작이 페르디아 공작과 부인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한 황급히 마법사를 따라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나는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분명 공작이 고용한 사람일 텐데, 저렇게 굽신거리지?’

앙겔로스 공작이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일 신분은 아닌데. 하지만 나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 없었다. 카를로트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어머니, 발을 밟아요!”

네가 경우 없게 굴잖니.”

부인이 입가를 닦으며 무심하게 대답하자 카를로트가!’ 하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경우 없는 , 아니 자식이지!”

말조심하렴, 카를.”

조심했잖아! 자식이라고! 감히 자식이 우리 리리 누님을 무시했다고요!”

카를로트가 노발대발하며 나를 삿대질했다. 졸지에 손가락질을 당한 기분은 오묘해졌다.

나를 위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카를로트,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녀석. 얀시가 올라간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매일 웃고 있으면서 새삼 몰래 웃는 건지. 원래도 레스토랑의 모든 손님이 우리 테이블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카를로트가 난동까지 피우니 대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누님을! 누님을 무시했다고!”

덕분에 손가락질당하는 나도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나는 웃는 얼굴로 굳건히 다짐했다.

다시는, 다시는 페르디아 인간들이랑 외출 .’

결국 보다 못한 얀시가 나서서 카를로트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우리의 테이블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누님, 그거 맛있어? 거도 먹어.”

아니, 괜찮은데.”

많이 먹어야 건강해지지. 누님은 너무 가벼워서 손으로도 있다고.”

“…….”

카를, 힘이 무식하게 아닐까?’

점점 수북해지는 접시 위를 숙연하게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 마법사.’

결국 끝까지 어디 소속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정보를 얻을 있는 단서는 충분했다. 앙겔로스 공작가와 거래 중이라는 사실, 그거 하나면 뒤를 있을 . 조만간 레이안에게 새로운 의뢰를 넣을 이유가 생겼다.

  . . . 식사가 끝나고 레스토랑에서 나온 테미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한참을 찾은 끝에 어째서인지 구석에 혼자 있는 엘로디를 발견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엘로디의 표정은 없었다.

가족 외식은 어땠을까.’

오늘의 외출은 의도가 있었다. 독립하고 싶어 하는 엘로디에게 가족 외출을 통해 조금 가까워졌음을 느끼게 하여 독립의 꿈을 접게 하려는. 번의 소동이 있긴 했으나 평화롭게 식사를 마무리했으니 엘로디도 만족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테미스는 엘로디를 불렀다.

엘로디, 오늘 식사는 어땠니?”

……. 맛있었어요.”

그리고?”

내심 기대하며 묻자 엘로디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집에 언제 가요?”

“…….”

테미스는 말없이 웃었다.

실패로구나.’

아무래도 다음 작전으로 돌입해야 듯싶었다. *** 앙겔로스 가문의 저택.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한 햇볕이 비쳐들었던 도로테아의 침실은 두꺼운 커튼을 모조리 어둑어둑했다. 이불을 뒤집어쓴 도로테아가 눈만 내놓고 하녀를 쳐다보았다.

그래? 페르디아 가문이 모두 오붓하게 식사를 나왔다고?”

, 아가씨.”

엘로디 양도?”

. 레이디 페르디아가 레스토랑에 가고 싶어 했다고 하더라고요.”

하녀는 제가 들은 이야기를 전부 도로테아에게 들려주었다. 공식 행사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페르디아 가문 사람들이 함께 가족 외식을 나왔다고. 그중에서 가장 이름이 많이 거론되는 단연 엘로디 페르디아였다.

실수로 트로켈 자작이 레이디 페르디아와 부딪쳤는데, 영식이 누구랄 없이 레이디 페르디아를 보호하며 자작을 응징하려고 했다더라고요. 심지어 페르디아 공작 각하까지도요!”

공작 각하까지?”

의외였다. 도로테아도 페르디아 공작의 성격은 알고 있었다. 워낙 유명하지 않은가. 타인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그건 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불 도로테아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이게 아닌데!’

자신은 망가진 피부 때문에 남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없는데, 엘로디 페르디아는 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위상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다 사교계에서의 입지까지 위협당하게 생겼다. 고작 엘로디 페르디아에게. 사생아에다 권능도 발현되지 않은 엘로디에게 위협당한다는 사실은 도로테아에게는 엄청난 치욕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어떤 마법사가 레이디 페르디아를 모욕했나 봐요? 카를로트 영식께서 길길이 날뛰고 난리가 아니었대요.”

길길이 날뛰어?”

. 감히 누님을 무시했다면서.”

“…….”

카를로트 페르디아라면 누이를 혐오하던 인간 아니었나. 대체 최근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엘로디 페르디아를 두고 반응이 이토록 반대로 뒤집힌 것인가.

그래, 그렇구나. 다음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알려 주렴.”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

필요하시면 불러 주셔요.”

하녀가 밖으로 나가자 도로테아는 화장대 앞으로 앉았다. 방에 있는 거울은 모조리 치운 오래였다. 들여다보면 하루에도 번씩 깨부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고 마니까. 유능하다는 제국의 약제사를 모조리 불러와도 피부의 발진을 치료할 수가 없었다. 번은 어머니에게 페르디아 공작 부인에게 부탁이라도 하자고 애원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죽는 한이 있어도 테미스에게 엄마가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다. 아가, 혹시라도 허튼 생각 하지 말거라.”

  오히려 어머니는 도로테아가 테미스를 찾아가기라도 할까 호위라는 명목으로 방문 앞에 가문의 사병을 붙이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만나는 꺼리던 도로테아는 더욱 안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이게 엘로디 페르디아 때문이야…….’

엘로디가 연회에 용병왕 이안을 데려온 것이 발단이었다. 일만 아니었다면 자신과 어머니가 페르디아 가문을 방문할 일도 없었을 거고, 그렇다면 피부가 망가지는 일도 없었겠지. 도로테아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엘로디의 얼굴을 떠올리며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바로 그때였다.

도로테아. 여태 이러고 있었느냐? 답답하지도 않아?”

앙겔로스 공작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버지이!!”

도로테아는 칭얼거리며 앙겔로스 공작의 품에 안겼다.

다음 약제사는 언제 와요? 다시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도로테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지만 앙겔로스 공작은 바라는 답을 주지 않았다.

약제사는 이제 되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슈타르 신전 회합 초대장이 왔다. 준비나 하거라.”

앙겔로스 공작의 말에 도로테아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러고 거길 어떻게 가요!”

이슈타르 신전 회합일이라면, 4 가문의 직계가 전부 모일 텐데! 그들에게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질겁하는 도로테아와 달리 앙겔로스 공작은 줄곧 침착했다.

걱정할 없다, 아가. 아빠가 해결해 것이다.”

“……어떻게요?”

이분이 도와줄 게다.”

말과 동시에 열린 사이로 누군가 고요히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퀭한 눈과 마주한 도로테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앙겔로스 공작이 인자하게 웃으며 소개했다.

정식으로 인사하거라. 게이브 제나이드. 우리를 도울 마법사다.”

  ***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사가 달려와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진짜예요? 아가씨가 트로켈 자작 어깨를 잘라 버리라고 했다면서요! 무릎도 꿇렸다고 들었어요.”

어떨 같아? 진짜일 같아?”

질문에 잠깐 고민하던 마사가 호쾌하게 대답했다.

아가씨라면…… !”

으윽!”

순간 혈압이 올라서 뒷목을 부여잡았다. 하나밖에 없는 전속 하녀의 신뢰도가 모양이라니. 심히 억울하다. 과거의 내가 패악질을 부리긴 했어도 때리거나 밀치거나 아니면 일을 많이 시키는 정도였지 어깨를 자르라거나 그런 짓은 했다고.

아직도 별채 사용인들은 눈에 띄게 도망 다니고 있긴 하지만.’

어차피 전속 하녀인 마사가 있으니 상관없었다. 혼자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딱히 남의 시중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독립해서 살면 하녀도 없을 텐데, . 예행연습이라고 치자.

오늘의 일정은 뭔가요, 아가씨?”

얼른 다가와 머리를 매만지며 마사가 물었다.

용병단에 가려고.”

한동안 가시더니 오늘은 가시네요. 저도 동행할까요?”

아냐. 레이안 있으니까 괜찮아.”

말에 어째선지 머리를 매만지던 마사의 손길이 느려졌다. 이내 마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요새 서운해요, 아가씨. 계속 두고 나가세요?”

마사…….”

사실 이유가 있었다. 카를로트와 내가 암살자에게 습격당한 이후에 언제든 피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차를 몰던 가문의 마부는 발견했을 이미 습격당해 사망 당한 후였다. 만약 자리에 마사도 함께 있었다면……?

죽었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드니 바깥 외출을 마사를 동행하는 꺼려졌다. 고작 때문에 아무 연관도 없는 마사가 위험에 처해선 되니까. 적어도 페르디아 저택은 안전할 테니, 이곳에 있는 좋았다. 나는 여전히 머리를 매만지는 마사의 위로 손을 얹었다.

마사는 마사가 있는 일이 있잖아.”

말하기 곤란한 진심을 부디 알아주면 좋을 텐데. 화장대의 거울 너머 마사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는 보였다.

비밀 너무 많이 만들지 마세요. 섭섭해요.”

.”

저는 언제나 아가씨 편인 아시죠?”

. 물론이지.”

단호한 대답에 마사가 환하게 웃었다.

저보다 용병님이랑 친해지면 돼요. 아셨죠?”

마사의 농담에 덩달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알고 있을 테지만, 마사는 묻지 않았다.

고마워, 마사.’

나는 감사 인사를 속으로 삼켰다. *** 레이안의 집무실. 호위 대상과 호위하는 사람이 아닌, 의뢰하는 입장에서 레이안과 마주 보고 앉았다.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마법사에 대해 뒷조사를 맡길 생각이었다.

개인의뢰는 이게 마지막이야. 이제 거지가 예정이거든.”

페르디아 공작 부인에게 잘린 이후로 수입원이 끊긴 터라 이제 나올 곳이 없었다. 레이안이 의아한 물었다.

돈이 필요하신 겁니까?”

.”

얼마나?”

집을 사고, 평생 놀고먹고 있을 정도?”

쉽게 말해서 아주 많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레이안이 내게 건넨 말은 아주 뜻밖이었다.

돈이라면 제가 드릴 있습니다.”

“……?”

또다. 레이안의 이유 모를 호의. 나는 레이안의 표정을 살폈다. 언뜻 차갑게도 보이는 무심한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내가 의뢰금을 줘야 하는 상황에서 도리어 자신이 돈을 주겠다니. 갑자기 눈앞의 남자를 시험하고 싶어졌다. 잠깐 심호흡한 나는 레이안에게 물었다.

돈을 준다고? 나한테? 얼마나?”

필요한 만큼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만큼이라니. 내가 얼마를 달라고 알고. 오기가 생긴 나는 강수를 던졌다.

그럼, 내가 용병단을 달라고 하면 거야?”

농담 섞인 질문에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던 부단장 마리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쪽을 쳐다봤다. 그것도 잠시 마리오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당연히 농담이니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물론 나도 그랬고. 하지만 레이안의 대답은 예상을 빗나갔다.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귀찮으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바라시면 드리겠습니다, 용병단.”

엄마야.

마사, 부자 됐어…….’


 

40.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6–7 minutes


내가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있을 바로 그때였다. 부단장 마리오가 들고 있던 깃펜까지 내팽개치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무우우우우슨! 그으런 노오옹담을?! 아하하하! 우리 단장도 재미있으시다니까! 하하하하! 그렇지 않습니까, 리리 아가씨?”

재미를 강요하는 마리오의 물음에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재밌네…….”

그렇죠? 재밌죠? 아하하! 우리 단장이 이렇게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어도 가끔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신다니까요! 하하! 재밌다! 정말 재밌습니다, 단장!”

마리오가 호탕하게 웃으며 레이안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무표정하던 레이안이 인상을 쓰며 마리오를 노려보았다.

이거, .”

레이안이 팔을 형편없이 내던지든 말든 마리오는 개의치 않고 쾌활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의뢰! 맞아, 의뢰 얘기하고 계셨죠! 그래서 무슨 의뢰를 하시려는 겁니까?”

이번에는 뒷조사 부탁하려고-.”

뒷조사, 뒷조사 좋죠! 우리 용병단에게 맡겨만 주시지요. 책임지고 탈탈 털어드리겠습니다!”

, 그래.”

순식간에 대화 주제가 의뢰 건으로 넘어가 버렸다.

‘……뭐지?’

지금 뜨고 베인 같은데. 기세를 몰아 마리오가 의뢰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조사 대상이 누구인가요?”

앙겔로스 공작가에서 최근에 고용했다는 마법사에 대해서 알아봐 줬으면 .”

생김새는 알고 계십니까?”

저번에 마주친 있어. 어두운 보라색 머리칼을 한쪽으로 묶어 내리고 있었고, 색도 어두운 보라색이었던 같아.”

마리오가 아까 내팽개쳤던 깃펜을 주섬주섬 주워와 내가 말한 것들을 받아 적었다.

이전 의뢰 건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 급이었는데, 이번에는 수월하겠군요.”

얼마나 걸릴까?”

바라시는 정보량에 따라 기간이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 최대한 자세히.”

넉넉히 일주일 주세요. 이름, 나이, 사는 곳은 물론이고 하물며 팬티 색깔까지 탈탈 털어드리겠습니다!”

호언장담하는 마리오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건 궁금한데…….”

걱정 마세요, 리리 아가씨! 저만 믿으십쇼!”

어쨌든 적극적인 마리오 덕에 의뢰 이야기는 금세 끝났다.

인간, 진짜 팬티 색깔 알아 오는 아냐?’

…… 가지 불안감을 남긴 . 내가 마리오와 대화할 동안 잠자코 듣고만 있던 레이안이 문득 입을 열었다.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뜬금없는 요청에 고개를 갸웃하자 마리오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설마, 데이트 신청?”

혼자 속삭이는 대놓고 외치는 마리오의 말에 레이안과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은 ?”

큰돈을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으응?”

다소 당황스러운 레이안의 말에 눈만 멀뚱히 깜빡거리자 마리오가 기겁하며 끼어들었다.

뭡니까, 단장. 사기꾼 같은 말투는.”

다물고 나가라, 마리오.”

레이안의 축객령에 마리오가 단호한 얼굴로 소파에 달라붙었다.

됩니다. 용병단을 지켜야 합니다.”

마리오는 짐짓 엄숙하게 선언했다.

아하……. 레이안이 용병단을 준다 어쩐다 말할까 그러는 거구나?’

마리오가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 아닐 없었다. 내가 설마 용병단을 준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었을까 . 당연히 레이안이 농담처럼 말일 . 아주, 아주 잠깐 혹하긴 했지만…….

나가라, 마리오.”

레이안이 나를 때와는 딴판인 눈빛으로 마리오를 쳐다보았다.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뼛속이 시릴 정도로 싸늘한 시선이었다. 시선을 한몸에 받는 마리오는 내성이 있는 건지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는 그냥 공기 취급하시면-.”

나가.”

저는 무해한데요…….”

꺼져.”

-.”

사라져.”

레이안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마리오가 슬금슬금 소파 끝으로 비켜났다.

, 설마 리리 아가씨 앞에서그걸쓰시려는 아니죠?”

그거?’

그게 뭐지?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마리오와 레이안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사람은 나를 방치해 저들끼리 무언의 눈빛 대화를 나누었다. 결국 레이안의 차가운 눈빛에 마리오가 백기를 들었다.

갑니다, 가요! 그럼 즐거운 집무실 데이트하시길!”

마리오는 마지막까지도 데이트 운운하며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 문이 너무 세게 닫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쪽을 바라보자 이내 문이 다시 열리더니 마리오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바람이 그런 겁니다. 아시죠?”

나가.”

, 좋은 -.”

콰앙! 마리오가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문이 세차게 닫혔다. 나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잘못 걸까?

마리오가 닫은 것도 아니고 바람이 것도 아닌데 문이 저절로 닫혔다……?’

분명 레이안도 쪽으로 시선이 향해 있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절벽에 떨어지던 그때의 상황이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추락하던 중에 속도가 느려진 같다고 느꼈던-. 생각이 이어지기 전에 레이안이 입을 뗐다.

그럼 다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 계속 말해.”

큰돈을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경매장에 매물 하나가 나올 겁니다.”

경매장? 혹시 암시장이야?”

.”

경매장도 종류가 여러 가지였다. 대표적으로는 황실의 인가를 받고 열리는 경매가 있었고, 외엔 대개 비공식적으로 열리는 암거래 경매장이었다.

암시장은 곤란한데…….’

암흑가의 지배자 페르디아 가문. 당연히 제국의 모든 뒷거래에 페르디아가 연관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경매장에 갔다가 페르디아 공작의 수하에게 들킨다든지 하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

물건이 있으면 돈을 있을 겁니다.”

확신하는 레이안의 말에 궁금증이 일었다.

무슨 물건인데?”

그건 지금은 말씀드릴 없습니다.”

이번에도 비밀인 건가. 하도 베일에 싸인 인간이라 그런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직접 가서 확인하라 이거겠지.

암시장은 곤란해. 아버지께 들키면 처지가 난처해지니까.”

신분 위조 입장하면 됩니다. 부분은 걱정하실 없습니다.”

무려 창공의 용병단 단장이 호언장담하는 부분이니 아버지에게 들킬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밑져야 본전이니 보기나 할까.’

가기로 결정한 나는 자세한 사항을 레이안에게 물었다.

매물이 나오는 언제야?”

일주일 후입니다.”

, 그날은…….”

일주일 후에 있을 일을 떠올린 나는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그날은 매년 황가를 포함한 4 가문의 가주와 부인, 그리고 직계 자식들이 이슈타르 신전의 초대를 받아 한곳에 모이는 날이었다. 이슈타르 신전 회합일이라고도 불렸다. 물론 나는 번도 초대장을 받은 적이 없었다. 사생아는 직계가 아니니까.

선약 있으십니까?”

아냐, 없어.”

나한테는 아무 날도 아니지.

좋아, 그날 만나.”

나는 쓰게 웃으며 레이안과 약속을 잡았다.

  *** 마사는 잔뜩 겁에 질린 상태였다.

정신 바짝 차려야 !’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페르디아 공작 부인의 온실 정원이었기 때문이다. 저택 소속도 아닌 별채 소속의 하녀인 그녀가 이곳까지 일은 없기 때문에,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공작 부인이 직접 호출한 것이었으니까. 있겠다는 마사를 굳이 맞은편에 앉힌 테미스가 나른하게 턱을 괴었다.

마사라고 했니.”

, 마님!”

그리 긴장할 없다. 가볍게 가지 묻고자 불렀으니까.”

, !”

긴장할 없대도. 주인 같구나.”

‘……욕인가?’

아가씨 같다니. 마사는 순간 울컥했지만 주인 마님의 앞인 것을 상기하고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마사, 말고 엘로디를 직접 보필하는 하녀는 없니?”

. 혼자예요.”

어째서? 별채에 배속된 사용인이 그리 적지는 않을 텐데.”

별채에 지내고 있는 엘로디 명인 것에 반해 테미스가 그곳에 배속한 인원은 저택까지는 아니어도 많았다.

아가씨께서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시중받는 싫어하셔서요.”

?”

……?”

갑자기 사용인을 물리진 않았을 테고. 무슨 사건이 있었을 듯한데.”

예리한 지적이었다. 사건이 있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유모의 딸이었던 마사는 말문이 트이기도 전부터 엘로디와 함께 자랐기 때문에 엘로디의 성장 과정을 전부 곁에서 지켜보았다. 자라면서 어째서 엘로디가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 성격이 되었는지 마사는 너무도 알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말하는 꺼려졌다.

아가씨에 대한 , 마님께 말씀드려도 되나?’

아무리 그래도 모시는 주인에 대한 이야기인데. 마사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테미스가 한마디했다.

주인을 위한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원인이 되는 싹을 제거해야 하지 않겠니.”

순간 마사의 기회주의자적인 면모가 눈을 떴다.

그래. 저번에도 마님이 제안해서 외식을 다녀오셨다고 그랬지.’

권능 개화 엘로디와 공작 부인이 자주 만나는 알고 있었다. 드디어 아가씨를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시는 것인가. 그렇다면 마사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실은…….”

그렇게 19 묵은 신나는 고자질이 시작되었다. *** 이야기가 끝나고 페르디아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저문 후였다.

피곤해. 목욕이나 하고 자야겠다…….’

지친 몸을 이끌고 별채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 뭐임?”

실내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양옆으로 늘어선 사용인의 군단에 나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 누구세요?’

심지어 낯선 얼굴들이 한가득이라 나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원래 있던 별채의 사용인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뿐. 개중에 익숙한 얼굴은 얼마 별채로 배속된 주방장 쿠커와 마사 정도였다. 가장 앞에 있던 마사가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사. 설명 줄래?”

아까 마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부인께서? ? ? , 아니, 그래서?”

저한테 물어보시더라고요. 아가씨께서 어떻게 지내시냐고.”

그래서……?”

그래서 말씀드렸죠. 전부, 모조리, , !”

대체 모조리 말했다는 걸까. 궁금했지만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그렇게 물갈이된 사용인들은 어째서인지 전부 사색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앞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오늘부로 별채 배속된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 그래.”

졸지에 형님 인사를 받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나도 마주쳐서 아는 얼굴이었다.

제가 앞으로 별채 총괄 관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타틀린이라 불러 주십시오.”

안경을 쓰고 다소 깡마른 체구의 깐깐한 인상의 중년 여성은 저택의 부시녀장이었다. 저택의 다음 시녀장으로 낙점되어 있던 유능한 인재가 어쩌다 별채에 오게 되었단 말인가. 주방장 쿠커에 이어 명의 좌천 희생자가 생기고 말았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타틀린. 전에 일하던 사용인들은 어떻게 되었지?”

아가씨께 불손했던 그들은 전부 해고되었습니다. 물론 추천서도 주지 않았습니다.”

추천서도 없이 해고되는 직장을 보장받지 못하고 쫓겨난 것이기 때문에 생계유지가 목적인 이들에게는 끔찍한 처사였다. 페르디아에서 일했지만 추천서가 없다면 증명할 길이 없으니 그보다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도 요원할 . 마사가 감탄하며 외쳤다.

, 좋다!”


 

41. 너무 가깝잖아

6–7 minutes


  타틀린이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 마사에게 눈빛으로 경고한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아가씨께 무례를 범하는 자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바로 처분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에 마사를 제외한 사용인들이히익!’ 하며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나와 눈이 마주친 사용인들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런데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이거 그거잖아. 자본주의 웃음.’

나도 종종 짓는 웃음이라 갑자기 동질감이 들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들을 격려해 주었다.

, 그냥 맡은 일만 잘해 주길 바란다.”

, 아가씨!”

어차피 이전에 있던 사용인들은 전부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해고되었다고 해도 딱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내버려 , 신분으로 그들을 어찌할 없어서였다. 나는 별채에 살고 있을 그들을 직접 고용한 고용주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있는 뒷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불손하게 굴던 그들이 앞에서만은 그럴 없도록 패악질을 부리는 거였다. 그런 행동에 지레 겁먹은 사용인들이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럽기도 했고. 어쨌든 이전 사용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사실이라 시원하긴 한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러시는 걸까?’

공작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수가 없었다. 고작 전속 하녀의 말만 듣고 오랫동안 근속했던 사용인들을 대거 자를 줄이야. 부인이 이렇게까지 줄은 몰랐다.

어차피 머지않아 집을 나가게 텐데.’

그러니까 굳이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부인이 내게 신경 쓸수록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을 어떻게 변심할지가 걱정이었다.

무엇보다 아가씨를 보필하라 하셨습니다.”

타틀린이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결연한 눈빛에서 나는 공작 부인의 의도를 추측했다.

혹시라도 내가 음독할까 감시하려는 거구나.’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서 음독해야 한다는 것을 공작 부인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도. 내가 독을 마시든 말든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독을 마시지 못하게 한다는 …….

나를 걱정한다고? 친딸도 아닌 나를?’

다른 누구도 아닌 테미스 페르디아라는 존재가 나를 걱정하다니, 그런 모순도 따로 없었다. 최근 들어 부인과 자주 만나고 대화가 늘긴 했지만, 그건 순전히 때문이었다. 일종의 파트너와의 완만한 우호관계라고나 할까. 사업 파트너면 모를까 결코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파서 우는 아기일 때의 나를 그렇게 무감한 눈으로 봤겠지.’

생전 처음 보는 남의 아이가 울어도 그렇게 차갑게 보지는 않을 텐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를 걱정한다는 역시 말도 되는 이야기다. 음독 감시 목적이 아니라면 독립한다는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그전까지 허튼짓을 벌일까 사람들을 심어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공작 부인의 바람대로…….

최대한 빨리 독립해야겠어……!’

아자. 나는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이슈타르 신전의 회합일이 밝았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모를 수가 없었다. 이른 새벽부터 페르디아 저택이 소란스러웠으니까. 웅성거림은 저택과 조금 떨어져 있는 별채까지도 전해져 왔다. 그도 그럴 이슈타르 신전의 초대는 당일치기 방문이 아니었다. 최소 1박에서 2박까지 신전에서 묵기 때문에 준비해야 많았다. 나도 정확히 신전에서 하는 건지는 몰랐다.

봤어야 알지.’

창가 벤치에 앉아 창밖 사용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던 나는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얼른 침대로 돌아가 눈을 감고는 자는 척했다. 누가 왔든 상대하기 귀찮았으니까. 똑똑. 재차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규칙적인 발걸음이 가까워지더니 침대 옆에서 멈추었다. 다소 강박적인 걸음만으로 누구인지 예상할 있었다. 얀시다. 나는 필사적으로 자는 척했다. 아침부터 모를 얀시와 대화하며 진을 빼놓고 싶지 않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얀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리. 자니?”

“…….”

자나 보네.”

“…….”

.”

말을 끝으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얀시가 완전히 떠났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야 이불을 걷으며 눈을 떴다.

“…… 저래?”

구남친인 . 얀시 페르디아의 기행은 오늘도 계속된다. 잠도 버렸겠다 오늘 레이안과의 약속 준비나 할까 싶어 기지개를 켜며 창가에 섰을 때였다.

누님!!”

나무에 걸터앉은 카를로트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 뭐가 그렇게 반가운지 보이지 않는 꼬리를 붕붕 흔드는 것만 같았다.

, 귀찮아.’

겨우 구남친처럼 구는 얀시를 자는 척해서 쫓아냈건만, 그다음은 카를로트라니.

카를. 외출 준비 해도 ?”

그냥 가면 되는 건데, . 그것보단 문제가 있다고.”

. 카를로트가 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봐 주었다.

무슨 문젠데?”

신전에 있는 동안 누님을 보잖아. 망할. 마음 같아선 주머니에라도 넣어 가고 싶은데.”

“…….”

짐가방에 넣어 가면 될까?”

되겠냐.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하게 카를로트를 쳐다보자 자기도 민망한지 슬쩍 시선을 피했다.

, 갈게.”

훌쩍 뛰어내린 카를로트가 얼른 사라졌다. 귀찮게 알았는데 이쯤하고 줘서 다행이었다. 드디어 준비할 있겠다 싶었지만,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누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에.

아가씨. 계십니까?”

저택 집사의 목소리였다. 얀시는 무시할 있었지만 차마 집사의 부름을 들은 척할 없어서 문을 열었다.

분께서 떠나기 아가씨에게 말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오늘따라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을까. 그것도 이른 아침부터.

알았어. 빨리 준비하고 갈게.”

서두르시지요.”

집사의 재촉을 뒤로하고 마사와 하녀들을 호출했다. 별채에 새로 배정된 하녀들은 눈치 있고 빠릿빠릿했다.

아가씨. 장신구는 무엇으로 고르시겠어요?”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러자 치장을 돕던 하녀들이 눈을 반짝이며 저들끼리 토론을 시작했다.

그럼 아가씨의 사랑스러운 분홍색 눈동자와 어울리는 핑크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좋겠어요.”

맞아요. 아니면 피부가 깨끗하시니 블루 사파이어 귀걸이도 어울리실 같은데요.”

뭐든 어울리셔요. 아가씨께서는 아름다우시니까!”

끄아악. 낯부끄러운 하녀들의 칭찬에 나는 본능적으로 마사를 찾았다.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던 마사는 그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일거리가 줄어들어 그저 신난 얼굴이었다.

저러려고 부인께 전부 말한 틀림없어.’

적게 일하고 많이 벌기 위한 마사의 그림에 이용당한 기분이었다. 새로 하녀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긴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번도 뒷이야기를 하는 들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내게 호의를 가진 사람을 대하는 오랜만이라, 사실 얼떨떨하기도 했다. 준비를 끝내고 집사를 따라 도착한 곳은 마차 앞이었다. 이제 떠나려는지 페르디아 공작 부부와 아들이 마차 앞에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출발할 준비 끝난 같은데 가고 있는 설마 때문인가?’

에이, 그럴 리가. 요즘 들어 자의식 과잉이 심하다, 엘로디. 조심해야지. 불현듯 생각을 얼른 떨쳐 공작 부부 앞에 섰다.

부르셨어요?”

죄다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먼저 입을 공작 부인이었다.

며칠 저택을 비워야 하니 떠나기 전에 얼굴이나 불렀단다. 신전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연락이 차단되니 말이야.”

필요한 있으면 집사에게 말하거라.”

공작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에 질세라 공작 부인도 말을 덧붙였다.

타틀린에게 말해도 좋단다, 엘로디.”

조금 의아해진 나는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괜찮아요. 매년 혼자 있었는걸요.”

새삼스럽게.

“…….”

“…….”

그런데 어째선지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바로 전에 했던 말을 곱씹었지만 달리 실수한 없었다.

……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서둘러 인사를 끝낸 나는 얼른 뒤돌아 걸어갔다. 한참 걷다가 뒤를 슬쩍 보자 사람은 아직 마차에도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 아침부터 기가 빨린 탓에 소파에 널브러져 휴식을 취한 나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외출을 볼까.”

나는 마사에게 부탁해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망토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이르게 나왔는데도 저택 입구에 레이안이 미리 있었다.

레이안. 언제부터 있었어?”

얼마 됐습니다.”

다음부턴 시간 맞춰서 나와. 10 정도는 늦어도 상관없어.”

그것이 바로 K-약속 시각이니까. 우리는 곧바로 암거래 경매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챙겨나온 망토를 걸치자 레이안이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뭐야?”

신분 패입니다.”

신분 위조를 테니 걱정하지 말라던 레이안의 말이 떠올랐다. 슬쩍 신분 패를 살펴본 눈은 휘둥그레졌다. 우라니아. 나도 자주 마주쳐서 알고 있는 용병 단원의 이름이 똑똑히 적혀 있는 신분 패였다.

이거…… 괜찮은 거야?”

취해서 뻗어 있기에 가져왔습니다.”

…….”

잃어버린 줄도 모를 테니 상관없습니다.”

…….”

단장이 단원의 개인 소지품을 슬쩍하는 용병단, 이대로 괜찮은가. 지적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당장 다른 신분 패를 구할 수도 없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경매장에 들어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시시했다. 입구를 지키는 가드는 신분 패를 대충 확인한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레이안에게 손짓하자 그가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나는 레이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원래 이렇게 허술해?”

여기서 소란 피워 봤자 페르디아 가문 추적에 걸릴 테니 신분은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자중할 테니.”

역시 극악무도하네, 페르디아…….”

암흑가를 얼마나 확실히 주름잡고 있는지 있는 부분이었다. 더욱 들키면 되겠다는 생각에 망토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레이안과 함께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경매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물건은 언제 나와?”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경매장은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낙찰받는 것도 재미있어서 잠자코 구경하고 있자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경매 물품 종류는 가지각색이었다. 그림이나 오래된 골동품, 액세서리 등이었다. 특히 암시장 거래니만큼 주로 장물 거래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개의 낙찰이 끝나고, 다음 물품이 나오자마자 레이안이 빠르게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저겁니다.”

바투 붙은 레이안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어째선지 얼굴이 홧홧해지는 같았다.

, 너무 가깝잖아.’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정면을 보았다. 레이안이 말한 물건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42. 번째 죄악, 탐욕

5–7 minutes


  보석이었다. 특별한 구석이라곤 없는 붉은 보석. 심지어 광택까지 잃어 추가 세공을 거쳐야 보석으로서 구색을 갖출 듯했다. 경매장 안의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경매 물품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보석으로 어떻게 큰돈을 있다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레이안에게 물었다.

정말 저거 맞아?”

.”

진짜로?”

믿어 주십시오.”

레이안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

보잘것없는 물건이 사실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장르 소설 단골 클리셰일지도……!’

두근두근.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이 기분 좋게 박동하는 느껴졌다. 이윽고 경매사가 증폭 마도구를 통해 경매 시작을 알렸다.

멸문한 가문의 가보였다고 하는데요, 시작가는 500라리트입니다!”

나를 쳐다보는 레이안의 시선을 느끼며 얼른 패들을 번쩍 들며 말했다.

“510라리트.”

우선 간만 보자는 생각으로 10라리트만 높여 호가했다.

“510라리트! 510라리트 나왔습니다!”

경매사가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나는 패들을 초조하게 쥐며 다른 이의 호가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보석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레이안 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엄청난 경쟁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지금 내가 융통할 있는 자금이 당장 얼마지?’

그렇게 혹시 모를 라이벌이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했지만…….

“510라리트. 낙찰되었습니다!”

땅땅.

라이벌? , 없어.’

너무나도 허무하게 낙찰 당해 버렸다. 허탈감에 패들을 멍하게 앉아 있자 레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나가시죠.”

? 으응.”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거야? 두근두근, 손에 땀을 쥐는 호가 대결! 그런 없는 거냐고. 여전히 현실감이 없는 채로 레이안을 따라 경매장을 나섰다. 어떤 방으로 안내되자 경매장의 직원이 들어와 마법이 걸려 있는 종이 장을 내밀었다.

계약서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자고로 계약은 꼼꼼히 해야 하는 .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 읽었지만 별다를 없었다. 수수료나 낙찰 물품의 권리관계 따위의 당연한 조항만 적혀 있었다. 혹시라도 직원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다시 후드를 눌러쓰며 계약서에 이름을 썼다. 리리 아르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가명이었다. 대금까지 일시금으로 치르자 직원이 보석이 보석함을 내게 건넸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고개를 까딱인 경매장을 나오자 아직도 환한 대낮이었다. 본의 아니게 암거래 경매장 구경만 실컷 하다 나온 기분이었다. 보석함을 품에 안은 멍청하게 있자 레이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세한 설명은 본부에 가서 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스코트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좋아. 빨리 가자.”

도대체 볼품없는 보석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 죽겠으니까. *** 창공의 용병단 본부의 단장 집무실. 나와 레이안은 활짝 열려 있는 보석함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가까이서 보석은 멀리서 때보다 끔찍한 몰골이었다. 보석 주제에 도대체 무슨 험한 일을 겪은 건지 표면에 금이 있었다.

‘510라리트도 아까운 몰골인데.’

미심쩍은 눈으로 보석을 흘긋 후에 고개를 들어 레이안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어떻게 돈을 있다는 건데?”

보석의 능력을 사용하면 됩니다.”

보석에 능력이 있어?”

깜짝 놀라며 보석을 유심히 살폈지만 여전히 눈에는 보석일 뿐이었다.

혹시 설마 레이안에게 사기당한 아닐까.’

사실 레이안이 보석의 위탁자일지도 몰라. ……당연히 말도 되는 생각이었다. 천하의 창공의 용병단 단장이 510라리트를 벌자고 내게 사기 리가 없으니까.

평범한 보석이 아닙니다.”

그럼?”

보석을 내려다보며 레이안이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7 죄악의 봉인석입니다.”

죄악의 봉인석? ……이게?”

발로 밟으면 파스스 부스러질 같은 보석이 죄악의 봉인석이라니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봉인석이라면 나도 알았다. 페르디아 가문에도 있었으니까. 선조 대대로 이어진 죄악의 봉인석은 가주와 후계자만 출입할 있는 저택의 지하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가보(家寶)라고 배웠다. 당연히 나는 페르디아가 보관하는 봉인석을 적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얼마 전에 서마탑주 이시스가 노리고 있던 페르디아의 봉인석이었는데.’

하필 시점에 죄악의 봉인석을 손에 넣다니, 우연일까.

그런데 봉인석이 시장에 풀려 있는 거야? 4 가문이 보관하고 있을 텐데.”

황가를 포함한 5개의 가문이 지고 있는 신성한 의무가 바로 죄악의 봉인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슈타르 신전의 신관들이 이르길, 언제든 봉인이 깨어나 세상이 도탄에 빠지고, 이윽고 세계가 멸망할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철저하게 관리되는 봉인석이 시장에 나돌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의문을 예상한 건지 레이안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죄악을 봉인한 가문은 황가를 포함하여 7개의 가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5개의 가문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

그럼 지금은 사라진 2개의 가문이 봉인한 죄악은 어디 있겠습니까?”

.”

애초에 7 죄악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가문은 5개니 나머지 죄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죄악의 행방에는 번도 의문을 가진 적이 없을까.

황가에서 어련히 알아서 봉인을 감시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멸문한 가문에 신경 사람도 없을 테고 말이다. 중요하다는 봉인석이 이렇게 시장에 나오다니. 나는 턱을 괴고 붉은 봉인석을 내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보석 안에 무언가 일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봉인석으로 있는데?”

죄악의 봉인석이라는 알았다. 하지만 이걸로 어떻게 큰돈을 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에 레이안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죄악을 소환할 겁니다.”

“……?!”

나는 기겁하며 레이안을 쳐다보았다. 죄악을 소환하다니, 세계를 멸망시킬 거라는 뜻이 아닌가. 그런 엄청난 발언을 놓고서도 레이안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봉인을 푼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죄악과 거래하게 되면 죄악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있습니다. 다만 대가를 바쳐야 합니다. 그것이 무슨 대가가 되는지는 죄악의 요구에 따라 다릅니다.”

죄악이랑 거래해서 능력으로 돈을 있다는 의미야?”

결과는 같지만 과정은 다릅니다.”

문가를 레이안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죄악과 관련해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봉인석의 소유자는 대가를 바치지 않고도 죄악의 능력을 사용할 있습니다.”

봉인석만 소유하고 있으면?”

. 하지만 현재 4 가문의 가주는 물론이고 황가 또한 사실을 모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냥 지나칠 없는 엄청난 비밀이긴 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던 죄악의 능력을 고스란히 사용할 있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그와 별개로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비밀을 레이안은 어떻게 알고 있는데?”

“…….”

죄악의 봉인석을 대대로 지키는 가주들도 모르는 도대체 무슨 수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없었다. 레이안은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끈적한 여름의 습기처럼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침묵을 잠자코 견뎠다. 대답을 듣지 않고서 그냥 넘어갈 없었다. 무언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먼저 입을 것은 레이안이었다.

저는 과거에 교만의 죄악과 거래한 있습니다.”

교만의 죄악을 봉인한 것은 아펠리테 가문. 오래전 멸문한 가문 하나였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붉은 봉인석은 멸문한 다른 가문인 비에탄 가문이 봉인한탐욕 것인가.

으음, 그럼 이건 탐욕이겠네.”

물음에 레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씀드릴 있는 , 교만과 거래한 있다는 것뿐입니다.”

숨기는 건지, 정말로 말할 없는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캐물어 봤자 알아낼 없다는 확실했다. 레이안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으니까.

언젠가는 말해 생각 있어? 레이안이 감추고 있는지.”

. ……언젠가는.”

알겠어.”

교만과 거래한 있다는 사실을 들은 것만 해도 레이안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얻은 것이었다.

워낙 베일에 싸여 있어야지.’

옅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봉인석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탐욕의 봉인석이란 말이지.

죄악, 소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일단 한번 소환해 생각이었다. 레이안이 보석함을 쪽으로 돌려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은 봉인석을 손에 쥐시고.”

좋아. 손에 쥐고.”

레이안의 말대로 봉인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죄악의 봉인석에 손끝이 닿는 찰나의 순간-.

“……!!”

-!! 시야가 암전되었다. *** 머리가 깨질 같은 두통이 엄습했다. 그뿐만 아니라 속도 금방이라도 게워 매스껍기만 했다.

으윽…….”

손으로는 입을, 손으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떴다. 그런 나를 반기는 , 무너진 신전 한복판이었다. 누군가의 신전인지 수는 없지만, 형편없이 박살 건물의 기둥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깨어난 상황이고……. 어스름한 새벽빛이 내려앉은 건물 잔해 한가운데, 나는 뻣뻣하게 굳은 상체를 일으켰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레이안의 집무실에서 죄악의 봉인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순간 정신을 잃고 나니 이상한 곳으로 이동되었다. 꿈인가 싶어 뺨을 꼬집어 봤지만-.

아야아.”

통증은 생생했다.

우선은 봉인석을 손에 쥐라며!’

그럼 다음 단계도 있단 아니야? 이렇게 난데없이 이상한 곳으로 떨어진단 말은 없었잖아! 난데없는 돌발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게다가 두통과 매스꺼움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우선은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기 위해 앉은 채로 건물 잔해를 살피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작은 여우 마리가 앞에 다가와 섰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여우의 색깔이었다. 온통 새까만 흑여우였다.

여우……?”

갑자기 여우가 어디서 나타난 걸까. 그렇다면 혹시 이곳에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흑여우가 , 코웃음을 쳤다.

[여우? 아님. 탐욕임.]

“……?”

여우가, 말을 한다?

  당황해서 흑여우를 멀거니 바라보자 녀석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 보셈.]

“……근데 말투 그러냐.”

여우가 말한다는 사실이나, 여우가 자신을 탐욕이라고 소개했다는 사실보다 이상한 말투가 사람을 의아하고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여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길게 말하기 싫음. 기력 낭비임.]

그래도 말하는 정도는 제대로 하는 좋지 않을까. 얼마나 길어진다고.”

말에 여우가 단호하게 답했다.

[언어의 경제성.]

“…….”

미친 걸까…….


 

43. 직계들의 회합에 엘로디의 등장이라

5–6 minutes


  아무래도 탐욕의 죄악은 제정신이 아닌 분명했다. 인간이 아니라 그런 것일까. 그와 별개로 정말 감탄스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 받게 하는 말투를 사용할 있지? 계속 상대하는 시간 낭비라고 판단 내린 나는 흑여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건 넘어가고……. 여우 네가 탐욕이라고?”

[맞음.]

여긴 어디야?”

[너희 인간들이 나를 봉인한 과거 시점의 신전이잖음.]

과거? 여기가 과거야?”

[맞음.]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떨어졌다 했더니 과거의 공간에 버렸다니. 아무래도 탐욕은 과거 영웅들에게 봉인 당한 시간대의 신전에서 줄곧 얽매여 있던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탐욕이 봉인된 곳으로 빨려들어 건가?’

레이안은 죄악을소환한다고 표현했으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닌 듯했다. 부서진 신전 잔해밖에 없는 이곳에서 나가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러다 이곳에서 영영 빠져나가지 못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아찔했다.

우선 침착하자.’

나는 흥분을 가라앉힌 다시금 탐욕을 바라보았다. 귀엽게 생긴 아기 흑여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까지 인간은 네가 처음임.]

, 영광이-.”

무려 내가 처음이라니 감격하며 대답하는 순간, 탐욕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불청객임.]

, 미안…….”

탐욕 녀석,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네. 하아.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에 대충 앉을 만한 기둥의 토대 위에 걸터앉았다. 허벅지 아래에 뭔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들어 손을 넣자 울퉁불퉁한 무언가가 쥐어졌다. 꺼내 보니 나를 이상한 곳에 불러들인 망할 봉인석이었다. 지금은 손에 쥐고 있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보니, 이미 탐욕이 있는 곳으로 빨려 들어온 이후라 그런 듯했다. 나는 손으로 봉인석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상태가 좋지 않은 와중에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했다. 번째, 탐욕과 거래하기. 번째,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기.

좋아.’

일을 정했으니 이제 하는 것만 남았다. 나는 근처를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탐욕에게 손짓했다.

일로 . 탐욕아.”

[명령하지 마셈.]

탐욕이 까칠하게 대답하면서도 내게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탐욕은 조금…… 멍청한 같았다.

명령하지 마셈, 보다는 명령하지 , 짧지 않나?’

언어의 경제성은 무슨. 그냥 극한의 컨셉충이잖아.

컨셉충…… 아니, 탐욕아. 나랑 거래하지 않을래? 능력이 필요하거든.”

[지금 거래라고 했음?]

그래, 거래.”

[대가, 치를 있음?]

꼴에 자기가 죄악이라고 탐욕이 분위기를 잡으며 비장하게 물었다.

어쭈? 죄악 봐라?’

분명 아까 내가 봉인석을 가지고 있는 봤으면서 말을 하는 ,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는 작정인 거겠지. 레이안의 말에 따르면 가문의 가주들조차 봉인석의 소유자가 대가 없이 죄악과 거래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탐욕도 당연히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 . 나는 탐욕이 어떻게 나오는지 생각으로 진지한 물었다.

들어 보고 결정할게. 바라는 대가가 뭔데?”

[ 수명의 9할을 주셈.]

죽고 , 아니, 진심이야?”

하마터면 살해 협박을 뻔했지만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들었다. 탐욕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진심임.]

진심, 진심이라.

그렇다면 나도 진심으로 상대해 주마.’

나는 진지하게 탐욕의 조건에 대해 고민하는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이것까진 하려고 했는데…… 사실 시한부야. 그래서 수명의 9할이라고 봤자 3개월 정도밖에 .”

[3개월? 너무 적음.]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어차피 죽을 , 돈이나 왕창 벌어서 행복하게 살다가 가자! ……라고 생각해서 너를 소환하려고 건데…….”

일부러 불쌍한 서글픈 표정을 지었지만 탐욕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인간의 감정에 동요하지 않는 듯했다. 탐욕은 단호하게 대가를 거부했다.

[3개월은 필요 없음.]

그럼 원하는 다른 대가, 있어?”

어차피 대가를 생각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무슨 대가를 요구할지 내심 기대하며 물었다. 그러자 나온 탐욕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남은 수명을 주셈.]

에라이, 쓰레기야!”

탐욕 아니랄까 정말 탐욕스럽다. 시한부라고 하니 남은 수명을 전부 달라니, 말도 되는 거래 조건이었다. 협상할 생각도 없었지만 협상은 결렬이다. 나는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일부러 봉인석이 보이게 잘그락거리며 탐욕에게 말했다.

저기요, 사장님. 알아보고 왔거든요?”

[무엇을 말임?]

탐욕은 아무렇지 않게 시치미를 떼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최대한 비릿하게 웃으며 뇌까렸다.

봉인석 소유자면 노예로 부릴 있다는 사실 말임.”

일부러 받으라고 탐욕의 말투를 따라 하며.

[……!]

탐욕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로써 갑과 을이 명백하게 결정되었다.

일단 보셈.”

나는 오만하게 탐욕의 손을 요구했다. 그러자 탐욕이 뒤로 주춤 물러나며 명령을 거절했다.

[그건 능력이 아님. 고로 거래 대상이 아님.]

귀여운 것도 능력임. 빨리 내놓으셈.”

내가 단호하게 명령하자-. ! 탐욕이 앞발을 내밀었다. 윤기 흐르는 털을 자랑하는 자그마한 앞발이 손바닥에 닿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탐욕의 앞발을 사정없이 만지작거리며 번째 명령을 했다.

앞으로 주인님이라고 부르도록.”

그러자 탐욕이 잘라 거부했다.

[ . 주인은 따로 있음.]

누군데?”

[ 세계를 지배할 위대한 , 이르칼라 . 그분을 향해 경배하라.]

“……?”

지금은 말투가 정상적인 건데? 마치 사이비 신자가 포교하는 듯한 느낌이라 절로 거부감이 샘솟았다.

너나 .”

[감히 이르칼라 님을 무시-.]

어쨌든 봉인석의 소유주는 나니까 앞으로 명령을 따르도록 .”

[…….]

탐욕, 대답.”

[알았음.]

그렇게 나는 말투가 괴상한 흑여우를 노예로 삼았다. 처음 목표했던 대로 번째 계획은 성공했다. 그럼 이제 남은 번째 계획이었다. 바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

어이, 탐욕.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

[……거래했으니까 나랑 같이 나가면 .]

자기 뜻대로 돼서 삐친 건지 탐욕이 고개를 돌린 대답했다. 생각보다 방법이 간단했다. 나는 아직도 내게 발이 붙잡혀 있는 탐욕을 번쩍 들어 올렸다.

[ 하는 짓임!]

여기서 나가야지. 나가자, 명령이야.”

아직도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는 마찬가지라 한시라도 빨리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알았음. 지금 나감.]

탐욕의 말을 끝으로 정면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던 풍경이 뒤바뀌었다. . . . 그리고, 엘로디가 듣지 못한 탐욕의 중얼거림이 있었다.

[그런데 너한테, 주인님 냄새가 나는 거임?]

  *** 이슈타르의 대신전. 죄악을 봉인한 영웅들은 봉인의 감시가 이루어지는지 점검하기 위한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졌고, 그것에는 후에 회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황가, 윌렌티아의 직계로 참석한 아덴미르는 고리타분한 대신관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이번 회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기도회가 준비되는 것을 기다리는 가문의 직계들이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직계라고 봐야 인원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신전의 신관 수가 많을 정도였으니. 참가 인원은 이러했다. 앙겔로스 공작 부부와 도로테아 앙겔로스. 크룬델 가문의 가주 레온 크룬델 공작. 미혼인 터라 자식이 없어 그는 이번에도 홀로 참석했다. 다음으로는 페르디아 공작 부부와 아들. 마지막이 세베레스지만 가주가 혼수상태로 부재중이라 방계이자 보좌관이 대리인으로 참관했다.

지루하군.’

아덴미르가 속히 회합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을 그때. 페르디아의 인간들은 신관들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아아, 누님 보고 싶다.”

카를로트가 던진 말에 고아하게 앉아 있던 테미스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엘로디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 텐데.”

어머니가 아신다고. 누님은 제가 제일 알거든요?”

카를로트의 자부심 가득한 말에 테미스가 비웃음을 지었다. 엘로디가 독립할 생각밖에 없는 것도 모르면서 떵떵거리는 꼴이 아들이지만 불쌍했다. 연신 누님, 누님거리던 카를로트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기념품이라도 가져갈까?”

무슨 기념품?”

얀시의 물음에 카를로트가 씨익 웃으며 바로 옆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석상이라도 부숴서 가져가는 거지.”

무려 신전의 석상을 기념품으로 가져가겠다는 카를로트의 발언에 근처에 있던 신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얀시가 웃으며 말렸다.

그만둬, 카를. 리리가 돌덩이 따위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말에 신관들의 얼굴이 이번에는 새파래졌다.

신성모독입니다……!’

신관들의 간절한 바람이 통한 것일까, 이윽고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기도회가 진행되는 장소는이슈타르의 이라 불리는 곳으로, 대신전의 가장 가운데에 있는 성소였다. 특이한 점은 건물 내부가 아닌 중정에 흐르고 있어 머리 위가 시원하게 트여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고리타분한 기도에 집중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번째 영웅이 탐욕을 공격하매 대지가 진동하고 신전이 무너졌으며…….”

지루한 기도문을 외우던 그때였다. 늙은 대신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오, 신탁이.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신탁. 년간 내려온 없던 신탁이 내려왔다는 말에 샘에 있는 신관들은 물론이고 4 가문의 직계들까지 놀랐다. 잔뜩 흥분한 대신관이 신의 말씀을 그대로 외기 시작했다.

도탄에 빠진 세계를 구원할 구원자가 내려올 것이라-!”

바로 순간이었다. 풍덩-! 갑자기 누군가 하늘에서부터 샘으로 떨어지는 아닌가.

“……!”

믿기 힘든 광경에 장면을 목격한 이들이 대부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을 그때였다. 샘에 빠진 불청객이 치덕치덕 달라붙는 옷을 떼어 내며 중얼거렸다.

으앗, 차가워! 뭐야, 이제 물고문이야……?!”

진저리치는 음성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페르디아 가문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동시에 입을 열었다.

리리?”

누님!”

엘로디?”

네가 여기에 있느냐.”

그들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불청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뭐야. 여긴…… 신전?’

졸지에 신전 침입자가 용의자 엘로디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하.

안녕……하세요?”

“…….”

“…….”

안타깝게도 아무도 안녕하지 못한 듯했다.  


 

44. 대륙을 뒤져서라도

6–7 minutes


  기도 난데없이 떨어진 누군가. 엘로디의 등장에 이슈타르 대신전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그중에서 가장 흥분한 것은 단연 신의 신실한 종인 신관들이었다. 신탁의 구원자 예고와 동시에 나타난 존재라니! 더구나 회합이 시작된 이후에는 신전 전체에 결계가 발동되기 때문에 출입이 불가했다. 결계마저 뚫고 나타난 존재라면, 응당 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고 있지 않은가.

!”

신관들은 우르르 엘로디 앞으로 몰려가 무릎을 꿇으며 칭송했다.

구원자시여!”

아닌데요…….”

오오, 신께서 구원자를 내려주셨습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흡사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는 방패의 싸움이었다. 샘의 모든 사람이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대신관의 열변은 끝없이 이어졌다.

아닙니다. 신께서 구원자를 구원자라 하셨으니 구원자께선 구원자십니다!”

으아아악. 엘로디는 질색하며 귀를 틀어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탐욕의 죄악에 손을 댔다가 무너진 신전이 있는 곳으로 이동되었고, 거래가 끝나서 공간을 빠져나오니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물에 빠졌다. 그게, 이슈타르 신전이었을 줄이야. 어째서인지 같이 빠져나왔을 탐욕의 죄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망할 죄악 자식, 튀었어? 나를 신전에 던져 놓고?’

여우 자식에 대해 분노를 터트리기도 쉽지 않았다. 신관들의 아우성이 귓가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쳐다보지, 물에 빠진 상태라 찝찝하지, 신관들은 시끄럽게 굴지……. 그렇지 않아도 탐욕과 거래하는 동안 몸이 좋지 않았던 엘로디의 눈이 빙빙 돌았다. 주변을 불안하게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이내 한곳에 멈추었다.

살려 주세요.’

상황에서 자신을 꺼내 있는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 엘로디가 애절한 눈으로 페르디아 공작을 보자 잠자코 상황을 관망하던 그가 행동을 취했다. 페르디아 공작이 끼어들어 선언했다.

딸이다. 구원자가 아니라.”

공작의 말에 신관들이 눈을 크게 뜨며 엘로디와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 , 이분이 설마……!”

진작 알아보지 못할 만도 했다. 신전 사람들이 엘로디의 얼굴을 어릴 번이 다였으니까.

집어치워. 기도회는 끝이다.”

무려 독단으로 신전의 기도회를 끝내 버린 공작은 앞을 가로막은 신관들을 거침없이 지나쳤다. 저벅저벅 걸어온 페르디아 공작은 바지 밑단이 젖어 드는 것도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가 엘로디를 번쩍 안아 들었다.

!”

잡아라, 엘로디.”

, .”

눈치를 보던 엘로디가 공작의 목을 엉거주춤 끌어안자 그제야 그는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엘로디가 공작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숨겼다. 그때 그들의 곁에 다가온 얀시가 겉옷을 엘로디의 위로 덮어 주었다.

여긴 서늘한 편이라 여름이라도 감기 걸릴 있어, 리리.”

고마워요. 얀시 오라버니.”

고맙긴.”

얀시가 웃으며 발짝 물러나자 그를 지나쳐 페르디아 공작이 샘을 빠져나갔다. 소동의 주인공이 사라지자 오히려 분위기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신관들도, 그리고 남아 있던 직계들도 눈앞에 벌어진 일에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바빴다.

레이디 페르디아가,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을까요?”

도로테아의 물음에 앙겔로스 공작이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비가 손을 쓰지 않았겠느냐. 최근 딸을 아낀다고 소문이 자자하니 어떻게든 회합에 참여시키고 싶었겠지.”

그게 되는 거였어요? 회합이 시작되면 아무도 들어오잖아요.”

실베스터 페르디아라면 가능할 테지. 신관을 매수하면 테니까.”

앙겔로스 공작은 페르디아 공작이 일부러 수를 썼다고 떠들어 대었고. 크룬델 공작은 말없이 침묵했다. 세베레스 공작의 조카인 펠릭스 히클마이어는 엘로디의 이름을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엘로디 페르디아. .”

마지막으로 페르디아 가문은…….

역시 누님은 대단해.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천사인가?”

카를로트, 낯부끄러우니 조용히 하렴.”

왜요! 어머니도 봤잖아요. 리리 누님이 천사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

작정하고 누님 바보가 되어 버린 카를로트가 신관들 못지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얀시는 웃는 얼굴로 광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더니 누군가를 찾았다. 시선의 끝에 있는 사람은 황가의 직계로 참석한 1황자 아덴미르였다. 그에게 다가간 얀시가 먼저 말을 건넸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약혼녀에게 옷을 벗어 주는 , 약혼자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다가와 제게 말을 거는 얀시를 향해 아덴미르가 시선을 돌렸다. 얀시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은근한 얀시의 물음에 아덴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박하기에는 얀시의 말이 옳았고, 자신 또한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로디, 페르디아와…… 파혼하거라.”

  최근 들어 엘로디에 관한 생각을 종종 하던 아덴미르는 부황의 말을 들은 이후로는 자주 그녀를 떠올리곤 했다.

‘……파혼.’

부황이 그것을 바랐다. 엘로디 또한 그에게 파혼을 요구했다. 애초에 감정 없이 정치적 이유로 결행했던 약혼이었다. 제대로 약혼자 노릇을 적도 없었다.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얀시 페르디아의 말이 옳았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약혼자라면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 일말의 고민도 않고 튀어 나가 옷을 벗어 주는 맞았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정말 꼴불견이군.’

우유부단한 꼴을 자조하며 아덴미르는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약혼녀와 대화를 해야 듯했다. *** 내가 어떻게 결계를 뚫고 들어왔는지는 어떤 신관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결계에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고. 다만 회합이 시작된 이상 끝날 때까지 나갈 없기에 또한 꼼짝없이 대신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방을 내어드릴 테니 편히 쉬시지요.”

. 구원자님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결론이 때까지 나를 붙잡아 놓으려는 언제고 이제는 걱정하는 척이라니. 어쨌든 나는 회합이 끝날 때까지 가족들과 함께 대신전에서 지내는 걸로 결론이 났다. 직계도, 직계의 권한을 받은 대리인도 아닌 자가 회합에 참석하는 유례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사생아가 참석하는 것도 처음이겠지.’

엄밀히 따지자면 혼수상태인 세베레스 공작이 친부이니 나도 나름 직계일 테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는 이상 사생아일 뿐이었다. 신관이 내가 갈아입을 옷을 머물 방을 안내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아직도 공작이 나를 안아 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까는 너무 놀라 자각하지 못했지만 정말로 부끄러운 자세였다.

아버지.”

“…….”

걸을 있는데요.”

나도, 나도 발이 있다! 사실을 적극적으로 어필했지만 공작은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안까지 들어온 후에야 나는 지면에 땅을 디딜 있었다.

엘로디.”

.”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잔뜩 긴장하며 대답하자 공작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씻어라. 나중에 다시 찾아오마.”

, 나중에 봬요.”

달칵. 공작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자리에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

드디어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탐욕이 봉인되어 있던 공간에서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는데, 이슈타르 신전에 떨어진 이후로는 점점 좋아지더니 이젠 아프지 않았다. 비척비척 일어난 나는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 개운하게 씻고 나와 신관이 주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다소 수수한 옷이었지만 그럭저럭 입을 만했다. 젖은 머리칼을 말리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와중에도 챙겨 넣었던 봉인석을 꺼냈다.

탐욕, 얘는 대체 어딜 거야?”

혹시 사기거래를 당한 것이 아닐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때, 눈앞에 흑여우가 불쑥 나타났다.

[여기 있음.]

뭐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계속 너랑 같이 있었음.]

나랑 같이 있었다고?”

[그러함.]

계속, 같이?

“……!”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럼 내가 목욕하는 것도 봤단 말이잖아? 변태 죄악 같으니라고!”

[어이없음. 나를 음욕이랑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셈! 애초에 무성임.]

탐욕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분노했다. 그러고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인간 여자의 따위 아무 감흥 없음. 착각 금지임.]

죄악 자식이.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엎드려. 명령이야.”

납작……. 어떤 저항도 없이 탐욕이 바닥에 냅다 눌어붙었다.

[, 이게 지금…….]

탐욕은 일어나려고 시도하다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움찔대더니 이내 원망하는 시선을 내게 던졌다. 거래가 성사되어서 그런지 탐욕은 아까보다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면 풀어 줄게.”

[ 죄악보다 사악한 인간 자체임.]

칭찬 고마워.”

무려 죄악에게 사악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인생 살았다. 올리듯 웃은 나는 질문을 시작했다.

번째. 어떻게 모습을 감추고 있었어?”

[거래했잖음. 그럼 상대와 계속 같이 있는 것임. 다른 인간 놈들 눈에 띄면 곤란할 테니 봉인석에 잠시 머물렀음.]

자유자재로 봉인석을 들락날락할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번째 질문. 하필 신전에 떨어트린 저의가 뭐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달라고 했더니 난데없이 신전에 떨어트리다니. 이건 그냥 넘어갈 없었다. 그런데 탐욕도 억울한지 코를 찡긋거리며 울분에 답했다.

[억울함. 나도 모름. 나가는 순간 갑자기 여기로 이끌려 것임.]

진짜야?”

[진짜임. 내가 미쳤다고 위대한 이르칼라 님과 앙숙인 이슈타르 신전으로 오겠음?]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르칼라와 이슈타르 신들은 자매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고 신화에 나와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갑자기 이끌려왔다니, 누군가 개입이라도 했다는 걸까.

진짜 이슈타르 신이?’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얼른 털어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신탁이니 신이니 어쩌고 해도 내게는 현실감이 없는 존재였다. 이곳이 속의 세계라는 알고 있는 이상 사실 신이라는 진짜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물론 밖으로 꺼내면 신성모독이 테니 속으로만 생각해야 했다. 그보다 가장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레이안.

레이안이 걱정할 텐데.’

눈앞에서 내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지금쯤 나를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모든 바깥과의 연락이 차단된 대신전 안에 있으니 위치를 알릴 수도 없었다. 회합이 끝날 때까진 이곳에 묶여 있어야만 했으니까.

[인간. 이제 풀어 줘야 하지 않음?]

.”

[풀어 주셈.]

으음…….”

바닥에 납작 엎드린 풀어 달라고 연신 말을 거는 탐욕의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레이안 성격상 그렇게 걱정 할지도 모르지.’

어련히 돌아오겠거니 여기고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고 판단 내릴 가능성도 있었다. 수하들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렇게 정이 많고 살가운 성격이 아닌 듯했으니까.

, 괜찮겠지.”

어차피 있는 일이 없으니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탐욕이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 괜찮음.]

  *** 그리고 시각. 창공의 용병단 부단장 마리오는 당황한 상관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찾아.”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찾으라고. 대륙을 뒤져서라도.”

엘로디의 예상은 빗나갔다. 레이안의 눈은 돌아 있었다. 지금 당장 무슨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45. 페르디아니까

6–7 minutes


  나중에 다시 찾아온다던 페르디아 공작은 약속을 지켰다. 똑똑.

엘로디.”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화들짝 놀라 탐욕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흑여우가 나타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신전에 나타난 걸로 추궁당할 판에 의심 요소를 두는 위험했다. 어느새 침대 위에 팔자 좋게 자리 잡은 탐욕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겉모습은 그저 귀여운 흑여우긴 한데, 녀석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나는 봉인석을 내밀며 탐욕에게 명령했다.

들어가.”

[……!]

탐욕은 코를 찡긋거리며 저항했지만. !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지더니 같던 봉인석 안에 불길이 일렁거리듯 붉은 기운이 들어찼다.

망할 여우 같으니라고. 더럽게 들어.”

어서 문을 열기 위해 발짝 떼었을 그때였다.

[ 보고 듣고 있음.]

히익!”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내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김.]

그제야 나는 상황을 대강 파악했다.

봉인석에 들어가 있어도 말할 있는 거였어?”

[그러함. 너랑 계약했으니 가능함. 너랑 나는 하나임.]

불쾌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탐욕의 뺨을 늘어뜨리며 자세히 캐묻고 싶었지만 그럴 없었다. 똑똑. 똑똑똑. 아까보다 묘하게 힘이 들어간 노크가 신경을 빼앗았기 때문에. 탐욕은 일단 미뤄 두고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런 앞을 반기는 , 페르디아 공작이 아니었다.

누님,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 하마터면 쳐들어갈 뻔했잖아.”

깜빡 잠들어서……. 그런데…… 다들 거기 계세요?”

나는 카를로트 너머 있는 명의 사람을 보았다. 페르디아 공작만 알았는데, 부인과 얀시, 카를로트도 함께였다. 공작만으로도 버거운데 나머지 사람까지 번에 상대해야 한다니 갑자기 난도가 높아졌다. 얀시가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갑자기 리리 네가 나타났는데 우리도 설명을 들을 권리 정도는 있지 않겠어?”

그런가……?’

계속 바깥에 세워 셈이니?”

공작 부인의 한마디에 나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 들어오세요.”

신전에서 내어준 방은 1인실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번에 들어오자 다소 비좁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모두가 앉자 소꿉장난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운 가운데,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해 있었다. 맙소사. 이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차라도…….”

되었다.”

페르디아 공작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

쭈굴. 나름 끓이는 것에 자신 있던 나는 차디찬 거절에 시무룩해졌다. 마사가 없을 때는 시중 들려는 하녀가 없어서 웬만한 내가 했더니 맛있게 끓이는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또다시 부담스러운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처음 입을 것은 공작 부인이었다. 나를 유심히 살피던 부인이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옷은 신전에서 내어주었니?”

.”

후지구나…….”

후지다니.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나는 더욱 쭈그러들었다.

, 죄송해요.”

엘로디 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지. 신전 내에 있는 의복이 거기서 거기일 테니. 옷을 빌려주마.”

아뇨, 괜찮-.”

거절하지 말렴. 네가 후지게 입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이 페르디아를 어떻게 보겠니?”

너무나 일리 있는 말이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부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어지간히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공작 부인의 지적 후는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페르디아 공작이 나지막이 물었다.

어떻게 일인지 설명해 보거라. 엘로디 페르디아.”

두둥.

버렸다……!’

자고로 무려 성까지 붙여 부른다는 ,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부모의 엄포가 아니던가. 또한 신전 하늘에서 떨어지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변명을 짜낼 시간이 현저히 부족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레이안과 생이별 후에 다시 외출금지령을 받을 있으니 적당한 각색이 필요했다.

, 그게…….”

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가족들의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최대한 움츠러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잡한 변명을 내어놓았다.

이안과 함께 외출했는데, 갑자기 어딘가로 이동됐어요.”

거짓말은 아니지. 외출해서 (경매장에 갔다가 봉인석을 만지는 순간 탐욕이 있는 곳으로 이동되었고 그곳에서 거래를 후에) 갑자기 신전으로 떨어지게 것이니까.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을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말에 오히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데, 카를로트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누님, 지금 그걸 믿으라고?”

진짠데. 카를, …… 믿겠어?”

나의 되물음에 카를로트가 눈에 띄게 흠칫거리더니 갑자기 태세전환을 했다.

내가, 내가 잠깐 미쳤었나 . 누님이 진짜라면 진짜지. 나는 누님 믿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것처럼 구는 카를로트의 대답에 머쓱해할 그때였다.

[ 저럼?]

“……!”

예고도 없이 들려온 탐욕의 음성에 나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자 나를 주시하고 있던 가족들 또한 덩달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페르디아 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방긋 웃었다. 그러고는 어차피 들릴 테지만 괜히 탐욕에게 한마디했다.

참나. 갑자기 걸고 난리야.’

그러자 놀랍게도 탐욕이 속마음에 대답하는 아닌가.

[어이없음. 지금까지 조용히 하고 있었잖음. 계속 떠들라 말임? 배려해 줘도 난리임.]

뭐야. 속마음도 읽을 있어?’

[ 읽음. 대신 네가 나한테 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실어서 생각하면 읽을 있음.]

속마음을 훤히 읽을 수는 없지만 속으로 의지를 담아서 말하면 그건 들을 있다는 의미였다. 비밀을 들킬 일이 없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앞으로 갑자기 탐욕이 걸어도 놀라지 않는 연습을 해야겠는걸.’

귀찮은 일이 하나 생겨 버렸다. 어쨌든 가족들이 아직 말을 온전히 믿지 않으니 모른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저도 갑자기 신전으로 버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같이 있던 이안이 제일 놀랐을 텐데, 회합이 끝나면 바로 찾아가려구요.”

일부러 주장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이안을 끌어들여 말하자 마뜩잖지만 다들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신성 결계가 펼쳐진 후에는 출입이 불가한데, 어떻게 일일까. 정말 별일이구나.”

공작 부인이 나를 보며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그건 당사자인 나도 알지 못하는 일이라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알고 싶다고요.’

그에 얀시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제들의 말대로 우리 리리가 정말로 신탁의 아이일 수도 있죠. , 구원자라고 했나요?”

어떻게 저렇게 온화하게 웃으면서 끔찍한 소리를 잘도 하지?

아하하. 무슨 그런 말도 되는 소리를.”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를 하면 된다. 내가 어색하게 웃을 그때 눈치 없는 탐욕이 또다시 끼어들었다.

[죄악이랑 거래하는 구원자라니, 재밌음.]

조용히 .’

탐욕에게 경고를 후에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페르디아 공작은 줄곧 심각한 표정이었고, 부인은 그저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얀시는 그렇듯 웃고 있었으며, 카를로트는…… 과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놈이라도 멍청해서 다행이다.’

카를로트의 반응에 조금의 위로를 받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정말로 신관들 말대로 팔자에도 없던 구원자 노릇을 해야 하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암흑가의 주인인 페르디아라도 신전의 압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 사실 신관들이 호들갑을 떠는 순간부터 각오하긴 했다. 회합이 끝나는 순간 나를 둘러싸고 온갖 말들이 오갈 거라는 사실을. 성가시게 되었다.

변장이라도 하고 다녀야 할까 .’

지금까지는 독립자금을 번다고 대놓고 돌아다녀도 딱히 주목을 받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질지도 몰랐다. 페르디아의 사생아보다 이슈타르 신전의 구원자가 주는 사회적 파문이 거셀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걱정과 달리 페르디아 공작은 단호하게 답했다.

달라지는 없다.”

?”

페르디아니까.”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내가 정말로 페르디아에 속한 것만 같은 기분이라서. ***

조금 크지만 그럭저럭 맞는구나. 정도면 누구도 너를 얕잡아 보지 않겠지.”

공작 부인이 빌려 옷을 입고 나오자 부인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빌려 주셔서 감사해요.”

고작 이런 것에 감사를 표하지 말렴. 별것도 아니란다.”

그래도 감사해요.”

고집은.”

부인이 책잡듯 한마디했지만 그렇게 싫은 같지는 않았다.

친딸도 아닌 나한테 옷을 빌려 주실 정돈데 감사 인사는 해야지.’

결코 당연한 호의가 아니니까.

다른 것도 입어보려무나.”

아니에요. 이것도 마음에 들어요.”

공작 부인의 과한 종용에 난감해할 그때였다. 똑똑-. 반가운 노크 소리에 나는 얼른 문을 열었다. 방문한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이슈타르 신전의 신관.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대신관의 말을 내게 알렸다.

시간 후에 기도회가 재개되니 이슈타르의 샘으로 오십시오.”

저도요?”

물론이죠. 구원자님께서 참석하셔야 한다는 대신관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어, 호칭으로는 불러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나의 완곡한 부탁에 신관은 그저 생긋 웃더니 뒤돌아 사라졌다. *** 웅성. 샘에 발을 디디자마자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정숙해야 신관들조차 나를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 벌써 피곤하다.’

곳곳에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삐딱하게 있는 1황자 아덴미르라든가 다른 4 가문의 사람들이라든가.

사람은 처음 보네.’

세베레스 가문 사람인지 낯선 얼굴이 하나 있었다. 세베레스 공작이 친부라는 알게 되었지만 사실을 증명할 없는 이상 달라질 없었다. 그저 4 가문 하나일 .

원작에서도 세베레스 가문은 이름만 나올 아무도 나왔었지.’

역시 끝까지 친부는 깨어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직 기도회가 시작되려면 신관들의 준비가 조금 남아 있었다. 서로 얼굴을 익히 아는 4 가문의 사람들이 한마디씩 담소를 나눌 그때, 도로테아 앙겔로스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피부 발진으로 한동안 두문불출했을 텐데 어째서인지 후유증도 남지 않고 말끔한 얼굴이었다.

[환영 마법임. 매개체는 귀걸이임.]

묻지도 않았는데 탐욕이 먼저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도구로 피부 발진을 가릴 줄이야.’

자연스레 지난번 만났던 보라색 눈동자의 마법사가 떠올랐다. 마법사의 작품이라면 정말 뛰어난 실력이라고 있었다. 마도구에 환영 마법을 거는 고난도의 마법이었으니까. 이윽고 앞까지 다가온 도로테아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네요. 엘로디 .”

그러게요, 도로테아 .”

저번에 페르디아에 방문해서 호되게 당하고 갔으면서도 꾸역꾸역 와서 인사를 거는 저의가 뭘까. 목적은 금세 드러났다.

몰랐는데 페르디아 공작께서 엘로디 양을 무척 아끼나 봐요. 이렇게 샘에 들어올 있게 직접 손을 써주시고.”

내가 신전에 떨어진 페르디아 공작이 손을 썼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쏠리는 느껴졌다. 테면 보라는 웃는 도로테아를 보며 또한 따라 웃었다.

이것 봐라?’

보자는 건가?

46. 이래 봬도 조연 악역

6–7 minutes


  자고로 사교계의 보이지 않는 싸움에도 기승전결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빌드업이 필요했다. 나는 당장 도로테아의 도발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우선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도로테아 .”

어머나……. 혹시 화나신 건가요? 몰랐어요. 엘로디 양이 감추고 싶어 하는 진실일 줄은.”

상대를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로 몰아붙여 논리가 맞다는 내세우기 위한 전형적인 사교계 화술이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바로 단계에서 도로테아의 의도대로 넘어가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런 뻔하고 초보적인 수법에는 넘어가지 않지.

아니요. 났어요. 웃고 있잖아요?”

나는 보란 듯이 웃어 보였다. 나를 겪어 보아서인지 도로테아도 이번에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부러 속상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엘로디 . 마음 상하지 않으셨다니. 엘로디 양을 걱정하는 마음에 드린 말이었어요. 아무래도 이런…… 일이 퍼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좋지 않게 볼까 봐요.”

대화가 길어지자 이슈타르의 샘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평판을 깎아내리려는 수작인 듯했다. 귀찮으니 상대하고 싶지도 않지만 도로테아가 말하는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그럴 없게 되었다. 하나만 모욕한 것이 아닌, 페르디아 자체를 모욕한 것이니까. 고작 나를 회합에 참여시키기 위해 페르디아 공작이 신전과 결탁한다고?

참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페르디아 공작은 사생아 딸을 위해 그런 짓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이런 말도 되는 이야기에도 혹하기도 한다.

저게…… 사실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페르디아라면 가능해요.”

그래. 바로 저런 사람들처럼 말이야. 어린 견습 신관들이 속닥거리며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도로테아 앙겔로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무려 원작에서 악녀로 나오는 존재시지.’

세계에서 태어나 살아오며 도로테아와 부딪힌 적은 저번 무도회 때가 처음이었다. 주로 페르디아의 별채에서 지내고, 가끔 나오는 공식 행사 때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다가 저질 추파를 던지는 영식들의 머리채나 쥐어뜯는 .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며 화제의 중심이 되는 유일한 4 가문의 직계인 도로테아. 우리는 살아가는 세계가 달랐으니까. 아예 자신과 다른 급이라 생각한 건지 도로테아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가끔 적선하듯 홀로 있는 내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이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는 사람임을 과시할 이용하고는 했다.

눈에 띄는 짓은 딱히 했는데, 나를 견제할까?’

그래봤자 레이안과 무도회 입장했을 뿐인데. 딱히 관심 없는 상대지만 굳이 먼저 와서 이렇게 신경을 긁어 대면 어쩔 없지.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 나는 근처에서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앙겔로스 공작을 슬쩍 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도로테아 . 방금 말씀하신 앙겔로스 가문의 입장일까요?”

?”

가문의 입장과 도로테아 양의 입장이 합치하는지 여쭈었어요.”

무슨 가문의 입장까지……. 그냥 엘로디 양이 걱정되어서 말일 뿐이에요.”

도로테아가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지만 끝까지 물고 넘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도로테아 양은 앙겔로스 가문의 후계자잖아요? 아닌가요?”

제가 후계자긴 하지만 상관없-.”

앙겔로스 가문의 후계자인 도로테아 양이 페르디아 가문과 신전이 모종의 결탁을 했다고 주장하니,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같아요.”

나는 이번 소동을 개인 간의 소소한 논쟁이 아닌 가문 간의 문제로 일을 키웠다. 어차피 입장에선 이번 시비를 그냥 넘어가면페르디아 공작이 신전에 손을 써서 자격 없는 딸을 회합에 참여시켰다라는 말도 되는 소리가 기정사실이 되어 버릴 테니 일을 키워 봤자 손해 없었다. 하지만 도로테아는 다르겠지. 그냥 성질 긁겠다는 가벼운 의도였을 테니까. 나는 팔짱을 삐딱하게 있는 페르디아 공작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이번 일은 제게 맡겨 주세요. 도로테아 양과 이야기해 볼게요.”

어차피 페르디아 공작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관심 없었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리라.

그래.”

그저 개입하기 귀찮았을 나를 믿는다거나 그런 이유로 대답한 아닐 테지만, 그래도 말에 대답해 주었다는 사실이 어째서인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열심히 도로테아를 먹일 자신감이 생겼다.

대신관께도 직접 말씀드렸지만 제가 신전에 떨어진 이유는 저도 몰라요, 도로테아 .”

증거가 있나요?”

증거? 그렇다면 도로테아 양은 아버지께서 신전과 모종의 거래를 도모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계신가요?”

자신이 내뱉는 말마다 내가 하나하나 반박하고 드니 도로테아의 뺨이 점점 붉어졌다.

도로테아 ?”

없어요, 증거.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아닌가요? 페르디아의 힘이라면 엘로디 양을 들여보내는 것쯤이야 쉬울 테니까요.”

기어코 도로테아는 말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페르디아를 매도했다. 곳곳에서 신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증거도 없는데 심증만으로 그런 말을 하는 …….”

신전이 가문과 결탁하다니, 신전을 무시하시는 건가?”

제게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 건지 도로테아가 초조하게 주변을 홰홰 둘러보았다. 나는 속상하다는 한숨을 내쉬며 결정타를 날렸다.

도로테아 양께서 그렇게 믿으시겠다면 교황 성하께 검증을 부탁드릴 수밖에요. 회합이 시작된 결계를 건드린 적이 없다는 것을.”

웬만하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교황을 들먹이자 도로테아는 절박해진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기어코 그녀는 앙겔로스 공작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앙겔로스 공작은 흐름을 읽을 아는 자였다.

도로테아. 엘로디 양에게 사과해라.”

매정하게 딸을 잘라 것이다. 도로테아의 눈이 충격에 얼룩졌다.

, 아버지……!”

이번 일은 전적으로 무례지 않으냐. 어서 사과드리지 않고 무엇하느냐.”

엄하게 질책하는 말에 도로테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교황까지 가세하면 이건 그저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억측만으로 모험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것이다.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 것은 도로테아였으므로, 제가 했던 말의 책임을 모두 져야 것이다. 앙겔로스 공작마저 도로테아 개인의 잘못으로 선을 그은 이상, 그녀는 이제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다. 눈시울을 붉힌 도로테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요.”

? 뭐라고요?”

죄송해요. 제가 말도 되는 추측으로 엘로디 양의 심기를 어지럽혔어요.”

자존심 강한 도로테아니만큼 사생아인 내게 사과하려니 쉽지 않았을 텐데, 기특하게도 사과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고작 사과 한마디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충격을 받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처연하게 읊조렸다.

도로테아 양의 사과를 받아들일 없을 같아요. 정신적 충격이 너무 크네요…….”

아주 살짝 비틀거리는 것도 . 그러자 카를로트가 냉큼 다가와 나를 부축해 주었다. 딱히 바랐던 아니지만 덕분에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의 할리우드 연기에 문이 막힌 건지 입술을 달싹이던 도로테아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사과를 받아 주실 건가요?”

됐다. 기어코 끌어낸 도로테아의 . 나는 벼르고 벼르던 요구를 내놓았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도로테아 양의 귀걸이가 정말 예쁘네요.”

“……?!”

제게 선물해 주시겠어요?”

내가 당당하게 금품을 요구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하필 환영 마법이 걸린 마도구를 지목했기 때문일까. 도로테아의 눈이 믿을 없다는 커졌다.

후자겠지.’

도로테아가 귀걸이를 가리며 발짝 뒤로 물러났다.

돼요. 귀걸이는 제게 소중한 거라구요. 차라리 목걸이를 드릴게요.”

“…….”

, 엘로디 .”

도로테아가 간곡하게 이름을 부르며 뒤에 있는 앙겔로스 부인을 보았다. 차갑게 선을 그었던 앙겔로스 공작과 달리 부인은 애타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 딸을 가로막고 섰다.

딸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죠, 엘로디 . 이제 그만하는 어때요?”

그럼 부인께서 대신 주실 건가요?”

. 장신구 중에도 탐나는 있나요?”

테면 보라는 앙겔로스 부인은 오히려 당당하게 물었다. 부인한테는 딱히 유감이 없었지만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온다면 어쩔 없었다. 부인의 귀를 보았지만 도로테아와 다른 디자인의 귀걸이였다. 아무래도 확실히 하는 좋겠지. 나는 탐욕에게 명령했다.

탐욕. 부인 마도구는 뭔지 말해 .’

[반지임.]

그렇단 말이지.

부인의 반지가 아름답네요.”

그렇게 물으며 생글 웃자 앙겔로스 부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

이번에도 내가 마도구를 지목할 거라고는 생각 했겠지.

이건 내가 결혼할 가지고 …… 그런 반지라 내어줄 없어요.”

제가 바라는 모두 된다고만 하시니, 제게 사과할 마음은 없다고 봐도 될까요? 그렇다면 저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교황께 검증을 부탁드리려고 해요.”

기어코 일을 키우겠다는 말에 앙겔로스 부인이 벌컥 소리쳤다.

남의 귀중품을 탐내다니. 엘로디 양은 정말 사치스럽고 경망스럽군요!”

. 저걸 일침이라고 거야? 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제가 사치스럽고 경망스러워서 남의 예쁜 것만 보면 눈이 돌아서 미쳐버리겠네요.”

어차피 대외적인 이미지는 앙겔로스 부인이 말한 것과 별반 차이 없었다. 사치스럽고 경망스러운, 가문의 이름만 믿고 나대는 페르디아의 망나니 엘로디 페르디아. 그러니 나를 어떻게 깎아내리려고 해도 아무런 타격이 없다 말이지.

메인 악녀는 아니지만, 이래 봬도 조연 악역이라고.’

하지만 도로테아 앙겔로스는 달랐다. 체면이 1순위인,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상황이 답답했는지 곁을 지키고 있던 카를로트가 입을 열었다.

누님, 됐어. 그딴 내가 -.”

카를.”

하지만 내가 그냥 이러는 아니라는 얀시도 눈치챘는지 카를로트를 재빨리 제지했다. 카를로트는 입술을 삐쭉이면서도 투덜거리며 다시 물러났다. 금방이라도 같은 얼굴로 엄마의 뒤에 숨어 있던 도로테아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모친마저 곤경에 처하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도로테아가 울먹이며 귓가에 손을 대었다.

귀걸이를 선물해 드릴게요. 그러니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엘로디 .”

그럼요.”

나는 웃으며 손을 뻗었다. *** 도로테아는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상관없어. 돌아가서 마도구에 마법을 걸어 달라고 하면 .’

몸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마법이 곧바로 해제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엘로디 양이랑 같은 건물에 있기만 하면 괜찮아.’

회합이 끝나자마자 저택으로 돌아가면 모든 해결될 것이다. 그러니 아무 문제 없었다. 도로테아는 귀걸이를 빼어 엘로디에게 건넸다. 긴장한 탓에 손이 떨렸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해가 풀려서 기뻐요, 앙겔로스 .”

“……그렇네요.”

그럼 기도회가 시작될 테니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해요.”

드디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있다니 도로테아는 얼른 뒤돌아 최대한 멀리 가려고 했다. 하지만 발짝 떼기도 전에 사건이 벌어졌다. 파삭! 실수로 귀걸이를 떨어트린 엘로디가 그만 휘청거리다 밟아 버린 것이다.

어머, 실수.”

, 귀걸이가!”

그렇다면……! 싸아악. 순식간에 도로테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 레이디 앙겔로스의 얼굴이…….”

신관의 중얼거림에 도로테아는 고개를 숙이며 소리를 내질렀다.

꺄악! 보지 !”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 들통났다는 충격에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도무지 눈을 없는 서스펜스. 전쟁보다 흥미진진한 전개! 탐욕이 짤막하게 감상평을 남겼다.

[와우.]


 

47. 싫어하지 않아요

6–7 minutes


  차례 벌어진 소란 탓에 기도회 시작은 미뤄졌다. 앙겔로스 가문 사람들이 모두 샘을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신관들은 그들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주는 기도회에 참석해야 한다나 뭐라나. 결과적으로는 때문에 기도회 시작이 늦어진 같지만, 사실 원인은 전적으로 도로테아 앙겔로스에게 있었다.

그러게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리긴 건드려?’

내가 얼마나 눈에 띄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구원자 운운하는 바람에 머리 아픈데 거기다 시비까지 걸어오니 아주 성가셨다. 줄곧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공작 부인이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

피부병이 나았기에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귀걸이에 환영 마법을 걸었을 줄이야. 대체 어떻게 알았니?”

저도 몰랐어요. 그냥 뭐라도 뜯어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거예요.”

아하하. 하하. 행여 추궁하기라도 하면 곤란해서 머쓱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다행히 부인은 물어보고 싶은 있는 눈치였지만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래. 운이 좋았구나. 덕분에 재미있는 구경을 했어.”

그러게요. 앙겔로스 부인도 환영 마법 마도구를 가지고 있겠죠?”

아마 엘로디 네가 요구한 반지에 걸어 두었을 같구나. 하얗게 질리는 꼴이 가관이었거든.”

당시를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공작 부인이 요요하게 웃었다. , 누구라도 즐거웠으면 됐지. 하염없이 앙겔로스 공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그때 콕콕 찌르는 듯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심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눈매를 좁혔다.

저렇게 보는 거야?’

분명 나와는 초면인 세베레스 공작의 대리인이 과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실례인 텐데도 저러는 보면 이유가 있을 같은데. 음침하기로는 이길 사람 없는 얀시라면 분명 남자의 정보를 알고 있을 . 얀시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기자 얀시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리리?”

오라버니. 사람 누구인지 알아요? 처음 보는 같은데…….”

내가 슬쩍 곁눈질한 곳을 얀시의 표정이 일순 굳은 같은데, 착각이겠지?

세베레스 가문 대리인?”

.”

펠릭스 히클마이어. 세베레스 공작 대리로 참석했고, 조카야. 히클마이어 백작가의 가주고 주로 영지에 지내서 처음 보는 당연해.”

아하, 그렇군요.”

? 관심 있어?”

그렇듯 상냥하게 웃으며 얀시가 질문했다. 관심, 관심?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한 나는 질색하며 대답했다.

으엑, 아니요?!”

세베레스 공작 조카면 나한테는 사촌 오빠가 텐데, 관심이라니……!

저자는 너한테 관심 있는 같은데, 안됐구나.”

어째서인지 얀시의 웃음이 조금 전보다 진해진 같은데, 왜일까.

그럴 리가요.”

밝혀질 없는 사실이라지만, 그래도 그건 있을 없는 일이었다. 상대방도 내가 사촌 동생이라는 모를 테고. ……잠깐만.

아냐. 수도 있지?’

세베레스 공작에 대해서 세간에 알려진 정보는 별로 없었다. 어린 나이부터 정통 후계 교육을 받다가 스물이 되기 전에 공작위에 오른 사람. 백금발에 선명한 적안을 가진, 무엇보다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있었다. 그런 세베레스 공작이 모습을 감춘 것은 20 .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나갔지만 가문 차원에서 해명한 것은 없었다. 혹시 모른다. 세베레스 공작이 혼수상태에 빠지기 ,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주변 사람에게 했을지.

엄마가 임신했다는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쩌면 세베레스 공작의 딸로 인정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건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겠다. 함부로 저지를 정도의 사안은 아니었으니까.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가, 이번에는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남자는 당황하긴커녕 흥미롭다는 웃기까지 했다. 여유로운 태도에 남자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펠릭스 히클마이어.’

혹시라도 원작에 나온 있는 이름인지 머릿속을 뒤지고 있을 , 카를로트가 은근슬쩍 다가와 슬그머니 물었다.

그래. 누님. 자식 맘에 들어? 내가 , 아니 손봐줄까?”

그냥 가만히 있어, 카를.”

레이안도 그렇고 카를로트도 그렇고 이렇게 없애고 패서 난리인지.

필요하면 말해.”

그래. 필요하면.”

아마 너의 무력이 필요한 순간은 영원히 같지만. 그렇게 펠릭스라는 남자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신경 쓰다 보니 어느새 앙겔로스 공작이 샘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에 곧바로 대신관도 샘에 입장했다. 어느덧 석양이 차양처럼 드리운 황혼의 시간이 되었다. 새하얀 신전 건물과 잔잔한 샘물의 표면이 연분홍빛 다채로운 색깔로 물들었다. 곳곳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꿈결 같은 광경이었다.

예쁘네. 다시는 곳이라고 생각하니까 .’

이번에 내가 신전에 떨어진 불가해한 힘이 작용했기 때문일 테니 다음번 회합에는 들어올 없을 것이다. 직계가 아닌 내가 회합에 참석한 것만으로 기사가 쏟아질 테고…….

, 생각만 해도 귀찮아.’

조용히 지내다가 돈만 벌어서 독립하고 싶은 나의 소시민적 감수성을 세계가 방해한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기도회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초반까지 내용은 별거 없었다. 대신관이 성서를 낭독했고, 샘을 둘러싼 신관들이 손을 모아 기도했다. 신성력의 영향을 받은 표면에 빛이 아롱거리며 경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을 자아냈다.

마침내 지상의 7가지의 죄악이 봉인되어, 세상에 평화가 드리우매 이는 신의 안배이니라.”

3살짜리 어린아이도 아는 성서 낭독이 모두 끝났다. 그나저나 회합도 별거 없었다. 하도 사람들이 궁금해해도 알려 주기에 대단한 하는 알았는데. 너무 별거 없어서 말을 걸까? 그럴지도 몰라. 지루한 마음에 하품하고 싶은 참고 있는데, 대신관이 돌연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봉인의 검증을 하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아덴미르 1황자와 4 가문의 가주들이 대신관이 있는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뭐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광경에 나는 제법 흥미진진하게 모습을 지켜보았다.

봉인의 증표를 내어주십시오.”

대신관의 말에 가문의 가주들이 꺼낸 것은…….

죄악의 봉인석!’

봉인석이었다. 그들이 제단 위에 봉인석을 올려 둠으로써 준비가 끝난 듯했다. 특별한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던 제단에는 사실 기이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고, 대신관이 신성력을 불어넣자 마치 그림이 그려지듯 빛나는 문양이 생겨났다.

이슈타르의 이름으로 봉인의 결속이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하겠습니다.”

순간이었다. ! 제단 다섯 개의 봉인석이 허공에 부유하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

동시에 품에 넣어 탐욕의 봉인석이 불타듯 뜨거워지며 부르르 떨렸다. 나는 밖으로 봉인석을 감싸 쥐며 주춤, 뒷걸음질 쳤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줄곧 조용하던 탐욕이 반응했다.

[뭐임? 불쾌함!]

탐욕의 외침이 들려오는 순간, 대신관의 매서운 눈길이 내게 향했다.

“……!”

나는 흠칫 놀라며 옆에 있던 얀시의 뒤로 숨었다.

리리. 그래?”

아니, 그냥…….”

불안해? 손잡아 줄까?”

손을 잡아 필요는 없지만 거절하기도 전에 장갑을 얀시의 손이 손을 이미 감싸 후였다. 잠깐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대신관은 다시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탐욕에게 잔소리를 중얼거렸다.

탐욕아. 네가 말하니까 대신관님이 쳐다보잖아. 그냥 조용히 하고 있어. 신전에 봉인되고 싶지 않으면.’

그런 경고 섞인 말에 건지 이후로 탐욕은 말이 없었다. 나는 다시 제단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회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철저히 극비로 유지되는지 있었다. 지금이야 죄악과 봉인에 대한 이야기가 신화처럼 퍼져 있지만, 그것이 실체로 다가왔을 파장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봉인석에 죄악들이 봉인되어 있음을 매년 검증해 일련의 과정이 바깥에 새어 나가게 되면 봉인석을 노리는 자가 나타날지도 모르고.

실제로 있기도 하지. 서마탑의 유교 보이라고.’

마탑주 이시스는 어째서 봉인석을 노리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사이 어느새 기도회가 끝났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신관이 내게 다가오는 아닌가. 인자하게 웃은 대신관이 내게 물었다.

기도회는 어떠셨습니까, 구원자님.”

엘로디라고 불러 주세요, 대신관님. 기도회는, …… 재미있었어요.”

허허. 신께 선택받은 분의 존함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지요.”

하하. 신께서 정말 저를 신전에 들여보내셨다면 뭔가 착오가 있으셨겠죠.”

신께서 행하시는 일에는 무릇 뜻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신이 행하는 것에 뜻이 있었다면 내가 속에서 환생하지도 않았겠지. 아등바등 살아남아야만 하는 삶이 신의 뜻이라면, 정말 신은 공평하지 않았다.

이슈타르의 숨결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대신관이 웃으며 인사를 하고 떠났다. *** 기도회가 끝났는데도 신전을 나갈 있는 내일 아침이라고 했다. 이슈타르 신의 은총이 깃든 아침 식사를 끝내야 결계를 있다나 뭐라나. 피곤하다고 둘러대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온 나는 문을 잠그고 봉인석을 꺼냈다.

이제 나와도 .”

그러자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는 흑여우가 앞에 착지했다.

먹어도 ? 고파?”

줄곧 먹지 않았다는 생각에 물었지만 탐욕은 가소롭다는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감정만 먹어도 배부름.]

지금 내가 탐욕적인 인간이다 말이야?”

[매우 그러함.]

화가 나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 뭐라 수가 없군.

돈이 최고야.’

탐욕이 녀석 배곯을 일은 없겠다.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얼른 씻고 나와 아까 공작 부인이 빌려 주었던 실내복으로 갈아입기가 무섭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공녀, 나야.”

전하?”

나는 얼른 탐욕을 봉인석에 넣었다. 문을 열자 1황자가 앞에 있었다. 발짝 물러나자 1황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저는 전하께 드릴 말씀이 없는걸요.”

그러자 그럴 알았다는 1황자가 피식 웃었다.

그대야 내게 궁금한 것이 없겠지.”

전하는 있으세요?”

많아.”

웬일일까. 나에 대한 궁금해하지도 않던 사람이. 무도회 날마다 형식적인 파트너로만 대할 나를 곁에 두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대답하지 않자 아덴미르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불빛에 비친 1황자의 녹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어둡게 보였다. 1황자가 질문했다.

신전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정말 그게 궁금하세요?”

아닐 텐데. 어차피 내가 신전에 모습을 드러낸 건에 대해서는 이미 신관들에게 보고받았을 테고, 거기 나와 있을 테니까.

웬일로 눈치가 빠르군, 공녀.”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뭐예요?”

밤에 난데없이 찾아와서 말이라면…… 혹시, 파혼? 나도 모르게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1황자를 보았던 모양이다.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터트리는 보면.

그렇게나 나와 파혼하고 싶은 건가, 공녀는?”

뭐야, 진짜 파혼 이야기였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힘차게 대답했다.

!”

내가 너무 재빠르게 대답했던 건지, 1황자가 살짝 멍한 표정을 짓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대는 그렇게나 내가 싫은가?”

제가 전하를요?”

금시초문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닌가?”

싫어하지 않아요.”

“…….”

좋아하지도 않을 뿐이죠.”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던 내가 우기고 우겨 성사되었던 약혼.

오히려 저를 싫어하는 전하시잖아요. 아닌가요?”

“…….”

그러니까 파혼하는 우리 모두에게 좋아요.”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처음부터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다.

48. 당신을 잃는 알고

6–7 minutes


  1황자가 입을 그로부터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래, 그렇군. 그대의 뜻은 충분히 알겠어.”

정말로 간절히 파혼을 원하는 마음이 전달되었다는 걸까?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1황자가 다시금 입술을 떼었다.

파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려해 보도록 하겠다. 페르디아 공과도 논의해야 테고.”

진심이세요?”

줄곧 파혼은 된다던 인간이 이렇게 순순히 파혼을 주겠다니.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1황자가 다소 짓궂게 웃으며 되물었다.

. 역시 파혼 이야기는 관심을 끌기 위한 수작이었나?”

아뇨? 그럴 리가요? 아닌데요? 절대? 결단코? 무슨 일이 있어도?”

질색하며 고개를 내젓자 1황자가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까지 질색할 필요는 없는데.”

전하께서 질색하게 하셨다는 생각은 드세요?”

공녀가 얼마나 파혼을 간절히 바라는지는 알겠군.”

그럼요.”

어차피 황후가 되지도 않을 건데 1황자와 약혼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조금 걸리는 있었다. 원작대로라면 3 언니 에스텔이 입양되며 1황자가 첫눈에 반하는 전개로 흘러가는데, 지금 파혼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전하. 파혼하시면 다른 분과 바로 약혼하실 거죠?”

공녀는 무슨 그런 질문을…….”

아뇨. 좋은 분과 하시라고요.”

아덴미르의 반응을 봐서 당장 약혼할 같지는 않았다.

에스텔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는 있는데 아직 진척이 없다고 했지.’

남의 첫사랑을 뺏는 취미는 없으니 에스텔과 맺어 주는 좋을 같은데 당장 계획을 실행하는 위험했다. 독립자금을 모으고 무사히 집을 이후에 에스텔을 데려다 놓아야지. 어째서인지 1황자의 안색이 처음 방에 들어올 때보다 나빠 보였다. 그는 피곤한 눈가를 쓸며 발짝 물러났다.

늦었으니 이만 보겠다. 누군가 목격이라도 하면 피곤한 소문이 테니까.”

그걸 아시는 분이 지금 시간에 오신 거예요?”

공녀와 단둘이 이야기할 틈이 좀처럼 없던데.”

아아.”

그도 그럴 카를로트와 얀시가 방을 나설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옆에 붙어서 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말을 틈이 없긴 했다. 나가려다 말고 1황자가 다시금 나를 돌아보았다.

가족들과는 별일 없는 거겠지?”

. ……왜요?”

아니, 별것 아니야. 그저 공작 부인을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싶군.”

어머니를요?”

갑자기 어머니를 조심하라고 하는 거지? 이해할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1황자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뜬금없는 물음을 내뱉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고 있지?”

식사요? 잘하고 있는데요…….”

특이 사항은 없고?”

특이 사항이라면, 최근에 저택 주방장이 별채로 와서 맛있어졌…….”

아니, 잠깐.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대화를 1황자와 하고 있지? 중간에 말을 끊고 1황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가신다면서요, 전하.”

가야지.”

조심히 들어가세요.”

괜히 1황자를 붙잡고 있다 변심했다면서 파혼 건을 번복하기라도 하면 피곤해진다. 그런데 마지막 인사까지 했는데도 1황자는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서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뭐야. 아직도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일부러 관심 끌려는 수작질이라고?’

혹시 모른다. 1황자 아덴미르는 답도 없는 자뻑 의심 종자였으니까.

에휴. 어쩔 없지.’

고고한 황자 전하를 위해서 자존심 따위 갖다 버릴 수밖에. 나는 1황자가 안심할 있도록 다시금 확신을 주었다.

그동안 귀찮게 해서 죄송했어요. 파혼하면 후로는 최대한 전하 눈에 띄도록 할게요.”

“…….”

파혼에 필요한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강력한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며 적극적으로 외치자 1황자가 눈매를 좁혔다.

갈수록 그대를 모르겠어.”

“……?”

모를 1황자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모르겠는 전데요…….’

남은 나만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

그동안 귀찮게 해서 죄송했어요. 파혼하면 후로는 최대한 전하 눈에 띄도록 할게요.”

  어두운 신전의 복도를 걸으며 아덴미르는 엘로디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처음 파혼 서신을 보낸 이후부터 엘로디 페르디아의 태도는 일관적이었다. 명목상 약혼 관계로서 왔던 일들마저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덴미르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황위 다툼 같은 것에 관심 없던 부친을 졸라 기어코 약혼을 성사시킨 것도 엘로디 페르디아였고, 무관심하던 태도에 속상한 티를 내며 한마디씩 말을 내뱉으면서도 기어코 약혼을 유지하던 것도 엘로디 페르디아였다. 그래서 그는 관계의 주도권이 오로지 제게만 있는 알았다. 그런 약혼녀가 먼저 파혼을 이야기해 줄은 전혀 몰랐지.  

. 역시 파혼 이야기는 관심을 끌기 위한 수작이었나?”

  아까 엘로디에게 농담처럼 말했던 진심으로 믿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정말로 약혼녀가 파혼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나 평민을 사랑하는 건가.’

아덴미르는 황비가 주최한 연회에서 보았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용병왕 이안. 그리고……. 부황의 . 아덴미르는 이안이라는 남자에 대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자세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비천한 사내였다. 시체에서 구더기가 들끓고 고인 물은 온통 썩은, 그런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 단신으로 용병단을 일으키고 공을 세워 황제의 인정을 받은 . 또한 황제의 명령이라면 윌렌티아 안팎으로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무력은 뛰어나지만 소양은 갖추지 않은 그와 비록 사생아일지언정 4 가문 하나인 페르디아의 유일한 여식인 엘로디라니.

정말 어울리는군.’

하지만 애초에 엘로디가 누구를 마음에 품든 아덴미르에게는 관여할 아무런 자격이 없었다. 처음부터 애정 없이 정치적 명목이라고 박아 놓고 시작한 관계가 아니던가. 그렇게 말한 분명 자신이었다. 머리가 식고 나니 판단을 내리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 바라는 대로 파혼해 주는 것이 옳다. 엘로디의 말마따나 자신에게도, 엘로디에게도 나아가 제국을 위해서도 파혼은 불가피했다. 약혼할 때부터 파혼을 염두에 두지 않았나. 엘로디와 파혼하고 앙겔로스의 손을 잡으라는 부황의 명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앙겔로스의 힘을 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페르디아든 앙겔로스든 완전한 그의 권력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부황의 말대로 다른 가문을 등에 업고 황태자의 자리에 등극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 독이 것이다.

내게 필요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입지가 아닌, 오로지 내가 이룩한 공고한 힘이다.’

멍청한 2황자 벨트란이 아닌 아덴미르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대륙에 보여 것이다. 그렇다고 페르디아를 완전히 등진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동맹의 종류는 약혼 동맹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이 아덴미르가 파혼을 결심하게 경위였다. 하지만…….  

전하. 파혼하시면 다른 분과 바로 약혼하실 거죠?”

아뇨. 좋은 분과 하시라고요.”

  그런 말로 심경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지. 정말이지 엘로디 페르디아는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존재였다. 그러다 문득 아덴미르는 깨달았다.

내가 오늘처럼 공녀와 편하게 대화한 적이 있던가?’

  *** 정말로 신전의 결계는 회합에 참석한 인원 모두가 모인 아침 만찬이 끝난 후에야 해제되었다. 물론 도로테아는 몸이 좋지 않다며 만찬에 불참했다. 앙겔로스 공작 부인과 함께.

그렇지. 피부도 몸이지…….’

별채 주방장 쿠커의 요리 솜씨가 그리워지는 아침 만찬이 끝나고, 대신전의 문이 개방되었다. 대신관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페르디아 공작이 옆에 서서 아예 차단했다.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감사해요.”

“…….”

페르디아 공작은 고개를 끄덕인 시선을 돌렸다. 딱히 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이대로 페르디아 저택으로 향할 같은 분위기였지만 내게는 일이 있었다.

저기.”

내가 입을 떼자마자 명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 부담스럽다.’

갑자기 쏟아진 관심에 바를 모르겠다. 나는 얼른 용건을 말했다.

저는 용병단에 들렀다가 돌아갈게요.”

혼자서?”

.”

공작의 지적에 나는 그저 바보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외출 호위는 레이안이었으니까.

그냥 저택에 돌아갔다가 용병단으로 서신을 보낼까?’

아쉬운 대로 방법을 선택하려고 했지만 카를로트가 빨랐다.

. 내가! 내가 호위할게, 누님!”

카를로트가 적극적으로 나를 호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페르디아 공작이 단호하게 잘랐다.

된다. 그러다 저번처럼 습격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때는 아무도 없는 산길이었잖아요. 사람들이 득실득실한 시내에서 습격할 멍청이가 어디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며 습격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카를이 본격적으로 떼를 쓰려는 순간 공작 부인이 웃으며 지적했다.

카를. 돌아가자마자 훈련 있잖니?”

하지만 누님 호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지한 말에 페르디아 공작이 나직하게 말했다.

카를로트. 일주일 사이 네가 빠진 훈련이 11번이다.”

“……, 들켰다.”

변명이 궁색한지 카를로트가 불퉁한 얼굴로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때 줄곧 웃는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얀시가 살짝 손을 들었다.

제가 같이 갈게요, 아버지.”

그러겠느냐?”

. 그렇지 않아도 사고 싶은 것도 있었고, 제가 카를보다는 강하잖아요.”

말에 카를로트가 눈을 매섭게 부라리며 얀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얀시가 장갑 손으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깨갱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카를 녀석, 형은 무섭나 보네.’

나한테는 힘을 다해 깝죽거렸으면서……. 잠깐 생각하는 얀시를 바라보던 페르디아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거라.”

. 걱정하지 마세요.”

그야말로 든든한 장남의 표본 같은 미소를 지은 얀시가 이내 뒤돌아 나를 보았다.

가자, 리리.”

고개를 끄덕이며 발짝 떼자 얀시가 고개를 저으며 앞을 가로막았다.

손잡고 가야지. 잃을지도 몰라.”

저는 어린애가 아닌걸요…….”

호위의 일환이야.”

손을 잡지 않으면 출발도 것처럼 구는 완강한 태도에 나는 별수 없이 얀시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잡는 걸까. 원래는 남이랑 접촉하는 것도 싫어하면서. 그보다 권능도 제어하지 못하면서 손을 잡겠다고 우기니 두려움은 오로지 몫이었다. 이러다 권능이 발현돼서 내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지?

얀시 페르디아, 음침한 인간.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분명해…….’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으로, 오들오들 떨며 용병단으로 향했다. ***

이안 있어?”

물음에 본부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마치 것이라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페르디아 공녀님?”

며칠 전에도 봤으면서 새삼스럽게. 그래서 이안은?”

……. 단장은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페르디아 공녀님을 찾고 계십니다.”

나를?”

…….”

어쨌든 지금 본부 건물에는 없다는 말이었다.

일단 알겠어.”

얼빠진 직원을 등지고 본부를 빠져나왔다. 모든 대화를 들은 얀시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리리 네가 남자 앞에서 사라지기라도 했나 보네. 찾고 있다는 보면.”

그렇다니까요. 거짓말 했어요.”

의심 빼면 시체인 음침한 얀시를 올려다보자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본부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놓아서 다행이었다. 언제 권능이 발현될지 몰라서 얼마나 무서웠던지.

레이안이 나를 찾고 있다니, 최대한 빨리 내가 무사하다는 알리긴 해야 하는데.’

어디 있는지 알아야 만나지. 본부 앞에 서서 어떻게 접선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그때였다. 히힝-! 달리던 말이 급하게 멈춰 서는 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레이안.’

그의 뒤로는 용병단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며칠 동안 식사도 하지 않고 수면도 취하지 않은 것처럼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레이안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비척비척 앞까지 걸어와서는-.

“……?!”

와락. 레이안이 나를 끌어안았다.

당신을 잃는 알고…….”

‘……?’

이번에도 이해할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49. 안녕. 동생한테서 떨어질래?

6–7 minutes


[오오, 뭐임. 청춘임?]

계속 조용히 있던 탐욕이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신기함. 보기와 다르게 인기가 많음. 인간 놈들 눈깔은 바닥에 달려 있나 .]

열불 나게 하는 탐욕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레이안에게 안겨 있는 난감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 아니 아니, 이안?”

지척에 있을 얀시를 의식해서 서둘러 이름을 고쳐 불렀다. 하지만 레이안은 나를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가, 얼마나…….”

레이안의 목소리가 떨리는 느껴졌다.

, 이런 상황은 예상 했는데.’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사라지긴 했지만 조금 찾다가 기다리고 있겠거니 하고 가볍게 여긴 사실이었다. 한데 이렇게나 나를 찾아다녔을 줄이야. 그리고, 레이안은 분명히잃는다고 말했다. 마치 잃어 사람처럼.

레이안. 대체 숨기고 있는 거야?’

잃은 손을 엉거주춤 들어 올리는 바로 그때였다. 우지직, 쿠웅-! 무언가 박살 나는 엄청난 굉음이 옆쪽에서 들려왔다. 예상이 맞다면 얀시가 있는 방향이었다.

[와우. 뭐가 있다가 없어졌음.]

레이안을 밀어내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탐욕의 말대로 무언가 파스스 소멸하고 있었다. 기억상으로 저기에는 분명 용병단 본부 난간이 있었는데,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녕.”

얀시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웃고 있긴 한데…….

동생한테서 떨어질래?”

웃는 웃는 아니었다.

  미소 뒤에 감추어진 살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있을 같은,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얀시가 저렇게 화가 건지는 이해할 없지만, 일단 원하는 대로 레이안과 떨어지는 좋을 듯싶었다. 나는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레이안을 바라보며 진정시켰다.

이안. 괜찮아.”

정말 엘로디 님입니까?”

그래.”

레이안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믿을 없다는 손을 들었다. 만져서 확인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진정할 있다면 나쁜 방법이 아니라 잠자코 있을 그때였다. 평소 규칙적으로 걷던 걸음과 달리 빠르게 다가온 얀시가 장갑도 없는 맨손으로 레이안의 팔을 낚아채었다.

떨어지라고 했잖아.”

끼고 다니는 장갑은 권능이 발현되면서 난간과 함께 소멸한 같았다. 분명 아직도 얀시는 웃고 있는데, 분위기는 걷잡을 없이 험악해졌다. 졸지에 남정네 사이에 나는 얀시와 레이안을 번갈아 보다가 게걸음으로 스르륵 빠져나갔다.

저는, 싸움에서 빠지겠습니다…….’

하지만 얀시가 반대쪽 손으로 나를 붙잡는 바람에 도주는 실패하고 말았다.

리리. 어디 가니?”

하하……. 사람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자리 비켜 거예요.”

이리 .”

.”

나는 감히 얀시의 명령을 거절할 정도로 강심장이 아니었다. 사실 세계관에서 가장 무서운 페르디아 공작도, 공작 부인도 아닌 바로 얀시 페르디아였다. 원작에서 얀시는 양동생인 에스텔을 위해서 뒤에서 무슨 짓이든 하는 흑막 오라버니 캐릭터였으니까.

혹시라도 앙심 품으면 나중에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런 만큼 심사가 뒤틀리지 않게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내가 고분고분 옆에 다가가 서자 얀시가 웃는 얼굴로 레이안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을 풀었다.

당신의 고용주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 용병 이안.”

“…….”

다시 분위기가 싸늘해지려고 했다. 나는 황급히 얀시를 올려다보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오라버니. 괜찮은 거죠?”

뭐가?”

장갑이요.”

소멸되어 버린 비운의 장갑을 애도하며 얀시의 맨손을 흘깃 바라보며 돌려 말했다. 권능 제어가 어렵다는 사실을 레이안이 알게 되는 원치 않을 테니까.

, 이제 괜찮아, 리리.”

다행이네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얀시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리리, 네가 옆에 붙어 있어 주면 괜찮을 같은데.”

목숨은 괜찮을 같은데요? 하지만 후환이 두려웠던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얀시 쪽으로 아주 조금 붙었다. 겨우 화제를 돌렸나 싶었는데, 얀시는 또다시 레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당신, 동생을 끌어안았지?”

레이안이 대답하기 전에 내가 얼른 가로채 답했다.

내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잖아. 놀랄 만도 하지. 그렇지, 이안?”

물음에 레이안이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은 데다 계속 얀시와 이야기하게 두는 것도 난감한 일이니 아무래도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하는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자. 이만 가볼게.”

얼른 얀시를 이끌고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없었다. 레이안의 손이 어느새 옷자락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얀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크, 위험하다.’

나는 황급히 레이안을 타이르듯 불렀다.

이안.”

“…….”

이안?”

“…….”

창공의 용병단 단장님?”

바로 뒤에 부하들이 있는데도 레이안은 옷자락을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마치 분리불안에 시달리는 대형견 같다고 느껴진다면 너무 과한 걸까. 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레이안을 타일렀다.

내일 아침에 데리러 , 이안. 그때 만나자.”

“……알겠습니다.”

좋아.”

드디어 레이안이 옷자락을 놓아주었다. 레이안은 나와 얀시가 용병단 본부 앞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그곳에 멀거니 있었다. . . . 레이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얀시가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용병왕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네, 리리.”

호위니까 친해진 것뿐이에요.”

정말이니?”

.”

내가 주저 없이 대답했음에도 얀시는 뭔가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너는 몰라도 용병왕은 리리 너한테 흑심이 있는 같은데. , 정부로라도 셈이야?”

? 아니요?”

하긴. 1황자가 약혼녀의 정부를 허락할 같진 않네.”

얀시가 내게 질문해 놓고는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정부를 두다니. 제법 재미있는 상상에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정부를 둔다고 한들 황자 전하는 신경 쓰실 거예요.”

, 그럴 수도 있겠다. 1황자는 페르디아의 권력만 필요한 거니까.”

애초에 그런 약혼이었으니까요.”

내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얀시가 웃는 얼굴로 나를 유심히 주시했다.

왜요?”

아무렇지도 않아? 1황자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데.”

괜찮아요. 저도 좋아하니까.”

그러자 얀시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리리 네가 1황자를 좋아하는 알았어.”

굳이 말하자면 약혼을 조를 얼굴만 보고 좋아하긴 했죠. 지금은 별생각 없어요.”

지금도 얼굴만큼은 취향이지만 남의 남자를 뺏는 취미는 없었다.

나중에 에스텔이랑 잘될 테니까.’

그때가 되면 페르디아를 떠날 테니 선남선녀의 모습을 없다는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목숨이 제일 중요하지. . 얀시가 보폭에 맞춰 걸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래서 저번에 아버지께 파혼하겠다고 말씀드렸던 거니?”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대충 맞는 말이기도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얀시가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내가 도와줄까?”

오라버니가요?”

그래. 사실 1황자가 마음에 들거든.”

얀시의 제안은 상당히 뜻밖이었다. 어쨌든 얀시 또한 페르디아의 사람이니 1황자와 정치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를 깨는 바라지 않을 같았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얀시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괜찮아요. 1황자 전하와 파혼하기로 이야기 끝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얀시가 우뚝 멈춰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1황자와? 사실, 아버지도 아시니?”

제가 말씀드리면 기분 나쁘실 테니까 아직 말씀드리진 않았어요. 1황자 전하께서 말씀드리지 않을까요?”

이미 한번 파혼 이야기를 했다가 페르디아 공작의 심기를 어지럽힌 전적이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그러다 근신 처분을 받으면 상당히 귀찮아졌다.

리리 너는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기꺼이 도울게.”

얀시답지 않게 적극적이라 이상했다.

얀시가 1황자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는데.’

도운다니 나야 좋지.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중에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얀시 오라버니.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호위로 따라왔었는데,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얀시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 그거. 이미 샀어.”

? 아무 상점도 들렀는데……. 샀는데요?”

용병단 본부 난간, 변상액.”

……?”

얀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지만, 녀석은 나를 이끌고 걸어갈 뿐이었다. 그때 탐욕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임? 사러 나온다는 핑계였다는 뜻임.]

그런 핑계를 대면서까지 호위를 자처한 건데?’

[네가 좋나 .]

말도 .’

얀시가 누군가를 좋아하다니 정말 말도 되는 이야기였다. 최근에 태도가 이상해지긴 했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는 행동이겠지. 흑막 같은 성격의 얀시 페르디아를 파악하는 쉽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문득 아까 얀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는 몰라도 용병왕은 리리 너한테 흑심이 있는 같은데.”

  타인의 감정 변화에 예민한 얀시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말인가. 당연히 레이안이 나를 좋아한다는 얀시의 가정이 불편했다. 레이안이 내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성애적 감정과는 뭔가가 달랐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 레이안이 내게 숨기고 있는 비밀과 연관되어 있겠지. 고민은 짧았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얀시도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니, 리리?”

얀시 오라버니.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얀시가 친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그럼 용병왕 이안을 조사해 주세요.”

언젠가는 내게 자신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려 주겠다고 말했지만 그게 언제인지 알고 기다린단 말인가.

비밀이 뭔지, 알아야겠어. 나를 그렇게 절절한 눈으로 보는지도.’

꺼림칙한 얀시의 힘이라도 나는 기꺼이 빌릴 있었다. 그래야만 내가 세계에서 살아남을 있다면. *** 창공의 용병단 본부 . 엘로디를 수색하는 단장의 뒤를 따르던 용병 단원 전원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해괴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들은 전원 기함했다.

단장님이…… 마물에게 먹히셨다.”

저건 단장이 아니야.”

, 들은 있어. 잡아먹고는 껍데기를 뒤집어쓰는 마물이 있다고…….”

그건가 보다.”

무려 용병왕 이안이 누군가를 저렇게 애절하게 끌어안고, 가려고 하니 미련 넘치게 붙잡는다? 거기다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리기까지? 용병왕 이안?!

, 속이 좋은 같아…….”

, 나도.”

웨에엑.”

여기저기서 입을 틀어막는 용병 단원들이 속출했다. 그들이 현실 부정을 동안 문제의 여인이 떠나고, 레이안이 용병 단원 앞에 섰다.

임무에 복귀해라.”

레이안의 명령에 용병 단원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불복했다.

저희는 단장님 명령만 듣습니다.”

“…….”

당신, 누구야? 단장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지?!”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에 레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머리.”

머리를 박으라는 명령에 용병 단원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싫습니다!”

단장님도 아니면서!”

단장님을 돌려줘, 마물!”

하지만 소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 , , , -!

으아아악!”

레이안의 눈짓 번에 그들은 맥없이 머리를 처박았기 때문이었다. 십수 명의 용병 단원이 길거리에 단체로 머리를 박는 엄청난 광경이 연출되었다.

어머나. 대가리 터진다.”

걸어가다가 엄청난 소리에 멈춰 행인이 깜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경고도 없이 곧바로 권능으로 기합을 주는 무자비함……! 용병 단원들은 신음을 흘리며 인정했다.

단장, 맞네.”

아니라고 누구야…….”


 

50. 이게 횡재야!

6–7 minutes


물갈이된 이후로 뭐만 하면 민망한 칭찬을 하는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한숨 자고 일어난 아침. 신전에서 나온 다음 날이 되었지만 정말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신관들이 나를 둘러싸고는 구원자니 뭐니 떠들어대었던 것이 아직도 생생했으니까. 이쯤 되면 내가 신전으로 떨어진 꿈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가 안을 마구잡이로 어지르고 있었다.

[, 이건 뭐임? 세상 좋아졌음!]

, 덜그럭, 타다다다. 쿠당탕! 이름값을 하는지 비싸 보이는 건드리고 보는 탐욕을 애써 무시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위에는 내가 마사에게 부탁해 두었던 여러 신문사의 조간신문들이 놓여 있었다. 대형 신문사의 신문부터 가십거리만 다루기로 유명한 신문사의 신문들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잔뜩 긴장되는 마음으로 재빠르게 내용을 훑었지만, 이게 웬걸. 나에 관한 이야기는 엘로디의자도 없었다. 누가 손을 썼는지 봐도 같아 감탄만 나왔다.

역시 페르디아 가문이야.”

언론 통제가 아주 능숙하다. 분명 이슈타르 신전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미친놈들이니구원자라고 생각하는 나를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텐데, 페르디아는 그걸 해냈다.

역시 나라를 떠야겠어…….”

근교에서 채를 사서 안락하게 살겠다는 꿈은 이미 예전에 건너간 오래였다. 대륙에 페르디아와 이슈타르 신전의 영향이 미치는 곳이 없다지만 그래도 최대한 곳으로 떠나야 이유가 생겼다. 자연스럽게 일이 하나 늘었다. 외국어 공부.

산다는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하지만 기사들을 훑고 나니 마음은 훨씬 편해졌다. 혹시나 소란의 중심이 될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페르디아가 나의 보호막이 되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이후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기사가 줄도 없는 대신 몇몇 신문에 공통으로 실려 있는 기사가 있었다.

[우리의 자수정 아가씨, 도로테아 앙겔로스의 눈물? 회합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바로 이슈타르의 샘에서 도로테아 앙겔로스가 울며 뛰쳐나갔던 사건을 다룬 기사들이었다. 내용 속에 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빠져 있었다. 그런데 기사가 실려 있는 신문이 있는가 하면, 다른 신문사에는 기사가 있어야 자리가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 기사를 띄우려고 하는 페르디아 공작 부인일 테고, 지우는 앙겔로스 공작인가? 손에 땀을 쥐는 세기의 대결이 여러 신문사를 통해 펼쳐지고 있었다.

부인 힘내세요!’

능구렁이 같은 앙겔로스 공작이 페르디아 공작 부인 앞에 무릎 꿇기를 바라며 마음속으로 부인을 응원했다. 그때였다. 쨍그랑! 날카롭게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가 탐욕의 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기어코 탐욕이 녀석이 창가에 있던 화병을 떨어트려 깨트린 것이다.

탐욕아.”

내가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저린 탐욕이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 내가 그랬음. 자기가 혼자 떨어진 거임!]

화병에 발이라도 달렸냐? 혼자 떨어지게? 내가 말없이 탐욕에게 이리 오라 손짓하자 탐욕이 쭈뼛쭈뼛 앉아 있던 소파로 다가왔다. 화병에 담겨 있는 물을 밟는 바람에 탐욕의 걸음걸음마다 자그마한 여우 발자국이 뽁뽁 생겨났다. 나는 품속에서 봉인석을 꺼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이제 그만 봉인석에 들어가 있어 줄래?”

방금 화병이 깨지는 소리에 머지않아 사용인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처음 보는 흑여우가 있으면 수상하게 여기겠지. 하지만 탐욕은 다리를 빳빳하게 펴며 버텼다.

[싫음! 답답함!]

내가 명령 했다고 그렇게 버티는데, 계속 그러면-.”

양손을 허리에 얹고 본격적으로 혼내려는데 문이 끼이익 열렸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마사가 보였다.

노크했는데, 답이 없으셔서 들어왔는데……. 금방 깨지는 소리는 뭐였어요?”

아니, 어쩌다 화병을 버렸어.”

. 다친 없으시죠?”

으응.”

황급히 탐욕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가씨. 흑여우는 뭐예요?”

우와, 마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탐욕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들켜버리고 말았다.

, 그게-.”

대충 둘러대려고 했지만 마사가 빨랐다. 그녀는 들고 있던 은쟁반을 대충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탐욕 앞에 쭈그려 앉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머나, 새까맣고 귀엽다아. 아이 예쁘다아. 이리 오련. 우쭈쭈쭈.”

영락없는 여우 취급에 화가 건지 탐욕이 슬쩍슬쩍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광경을 보며 탐욕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처신 잘해라. 영원히 봉인석에 갇혀 있고 싶지 않으면.’

미리 협의했던 대로 반려동물인 척하라는 경고였다. 그러자 한껏 내려갔던 탐욕의 귀가 쫑긋 섰다. 금방이라도 마사를 깨물기라도 것처럼 굴던 온데간데없이 맑은 눈빛을 자랑하며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 이애옹……?”

고양이예요?”

……?”

? 여우가 , 하고 우나?”

키애옹?”

그런데 이렇게 의문문으로 우니?”

거듭되는 마사의 의문에 탐욕이 눈으로 욕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저러다 진짜 마사를 공격하기라도 할까 걱정된 나는 얼른 탐욕을 품에 안았다. 인성과 별개로 보들보들하고 매끈매끈한 털의 촉감이 손에 감겼다. 원래라면 발버둥 쳤을 탐욕은 여우 연기를 하는 탓에 아주 얌전했다.

주웠어.”

어디서요?”

글쎄, 어디였더라…….”

숲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숲에는 언제 갔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그럴싸한 장소를 짜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마사는 애초에 여우의 출처가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곧장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이름은 뭐예요?”

이름, 이름이라.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을 했는데. 탐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남들 앞에서 그렇게 부를 수는 없었다. 자그마한 여우를 탐욕이라고 부른다고 진짜 7 죄악 하나인 탐욕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아직 지었어.”

세상에. 어떻게 귀여운 아가에게 이름을 아직 붙여 주실 수가 있어요!”

말도 된다며 펄쩍 마사가 신중한 어조로 이름을 제안했다.

그럼새깜이어때요?”

그르르릉…….”

탐욕이 이를 드러내며 마사를 노려보았다. 진심으로 싫은 듯했다.

이상하다. 새깜이 귀여운데. 아니면 까미도 좋지 않아요?”

크르르릉…….”

계속해서 의견을 내는 마사와 으르렁대는 탐욕 사이에서 버티지 못한 나는 얼른 대화 주제를 돌렸다.

이름은 고민해 보는 좋겠어. 그런데 마사. 쟁반 서신은 뭐야?”

. 아가씨 앞으로 서신이에요.”

정신 차린 마사가 쟁반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위에 찍힌 황실의 인장을 나는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친서잖아?”

무려 옥새가 찍힌 문서였다. 친서에 적힌 내용은 간략했다. 일주일 후에 독대를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확한 날짜를 지정하지 않는 황제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겠지. 갑작스러운 독대 요청. 짚이는 이유는 크게 가지였다. 번째, 그저께 신전 결계를 뚫고구원자라고 불렸던 사건. 번째, 1황자 아덴미르와의 파혼 . 어쩌면 다일 수도 있고.

  *** 저택을 나서는 내내 탐욕은 마사 욕을 했다.

[끔찍한 작명 센스 자체임.]

그래, 그래.”

[본인 이름은 그럼 갈색이로 개명하는 추천함. 갈색 머리, 갈색이, 어울림.]

까맣다고 새깜이로 지었던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탐욕이 봉인석에 들어가 있어 툴툴거리는 짜증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조금 위안이었다. 나는 영혼 없이 탐욕을 달랬다.

어어, 풀어.”

[나는 엄연히탐욕. 다른 이름은 필요 없음.]

남들 앞에서 탐욕이라고 부를 없잖아.”

[ 어떰.]

어떻긴. 곤란하지. 그러지 말고 반려동물용 이름 하나만 작명하자.”

[마음에 . 불쾌함!]

진저리를 치던 탐욕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은근히 말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마음에 들었던 이름이 있음.]

뭔데?”

이윽고 들려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흑염룡.]

“…….”

봉인된 동안 어떤 삶을 살았던 거냐, 탐욕아. 이름이 좋다면 막을 이유는 없지만 남들 앞에서흑염룡아하고 부르는 상상을 하니 끔찍했다. 막아야 한다. 탐욕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이 아니라 여우잖아.”

[무슨 소리임? 여우가 아니라탐욕. 외형은 그저 이르칼라 님의 취향일 뿐임. 그리고 용은 멋있음.]

그래도 …… 어쩌고는 .”

[…… 어쩌고가 아니라 흑염룡임.]

이름이 정말로 마음에 드는 듯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좋아. 흑염룡, 줄여서블랙어때?”

무엇도 줄이지 않았지만, 아예 다른 뜻이지만, 줄이는 좋아하는 탐욕의 눈높이에 맞춰 제안한 것이었다. 글자 수가 줄긴 했다. 설마 말도 되는 제안을 받아들일지 회의감이 들었는데, 웬걸. 탐욕은 헛기침하며 이기는 수락했다.

[크흠, 그럭저럭 봐줄 만함. 허락하겠음.]

결론적으로 탐욕의 대외적 이름은 마사가 말한새깜이 같은 뜻이 되었다. 본인은 깨닫지 못한 듯했지만. 탐욕과 대화하며 마차 앞에 도착하니 레이안이 미리 있었다. 위태로워 보였던 어제와 달리 오늘의 레이안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어쩐지 얼굴을 보기 머쓱했지만 나는 일부러 밝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레이안. 자세한 이야기는 본부 가서 하도록 하자.”

, 알겠습니다.”

가문의 마차니만큼 혹시라도 얀시가 도청 마도구를 설치해 놓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없었다. 이윽고 본부의 단장실에 들어온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았다. 숨을 돌리기도 전에 레이안이 물었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지신 겁니까.”

그게, 봉인석에 손을 대자마자 탐욕이 봉인된 과거 신전으로 이동됐어.”

이후에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그곳에서 나왔더니 회합 이슈타르 신전이라 곧바로 위치를 알릴 없었다고.

그렇군요. ……어디에도 엘로디 님의 흔적이 없어서 의아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됐어. 그래도 성과가 있어.”

나는 봉인석을 꺼내 보여 주고는 레이안을 보며 호기롭게 웃었다.

소기 목적도 달성했고.”

말과 동시에 봉인석에서 소환된 탐욕이 테이블 위로 폴짝 내려앉았다. 탐욕이 심드렁한 눈으로 레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안녕임. 탐욕임.]

“…….”

아마 나와 같은 이유로 레이안이 침묵했다.

[ ?]

정상이 아닌 듯합니다.”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탐욕 유경험자로서 나는 능숙하게 조언해 주었다.

원래 이래. 말투는 신경 쓰지 .”

[맞음. 정상임.]

탐욕이 중간에 끼어들어 의견을 피력했지만 레이안은 그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말투가 중요한 아니니까요. 능력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 레이안 말이 맞아.”

[ 여기 있음. 무시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음.]

나는 관심 받고 싶은 탐욕의 말을 들은 레이안을 주시했다.

그래서, 탐욕 능력이 뭔데?”

7 죄악 하나인 탐욕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봉인석을 구하지 않았던가. 레이안의 말대로 탐욕과의 거래도 끝났다. 이제 대가 없이 능력을 때였다. 안에 있는 봉인석을 주시하던 레이안이 입술을 떼었다.

탐욕의 능력은 재물, 가치를 알아보는 눈입니다.”

“……!”

맙소사. 이거 완전 그거잖아.

황금알 낳는 거위네!”

이게 횡재야! 내가 잔뜩 흥분해서 내뱉은 관용어를 들은 탐욕이 펄쩍 뛰며 외쳤다.

[, 거위라니, 여우임!]

, 언제는 여우 아니라며!